조영남이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른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노래는 울릉도 평리 봉우리에 메아리쳐 울렸다. 농업인의 날에 맞춰 열린 울릉도 노래비 제막식 기념 공연이었다. ‘공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애초에 정해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제막식은 오전 11시였으나, 조영남이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온 시간은 12시쯤이었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난 뒤 집 앞 야외무대에 선 건 오후 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함께 울릉도를 찾은 사진작가 김중만, 개그맨 전유성, 홍대 미술대학 교수 이두식, 기타리스트 강근식 등도 객석을 채웠다. 이들을 모두 울릉도로 불러 모은 사람은 바로, 가수 이장희다. “신기하게도 이장희가 소집하면, 심지어 잠자고 있는 송창식까지 일어나 찾아올 정도예요. 우리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세시봉 콘서트가 열릴 수 있었던 건 장희의 리더십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죠.” 조영남과 그 일행들은 이장희의 전화 한 통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조영남은 “이렇게 작은 규모에, 그것도 물가 근처에서, 돈 안 받고 노래해본 것은 처음”이라면서, “돈 안 받고는 노래가 안 나오는데, 내 생각에 참 근사한 공연을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밥을 먹고 나니, 이장희가 ‘노래 부르고 갈래, 밥값 내고 갈래?’ 그러더군요. 노래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공연을 했어요.”
하와이보다 멋진 울릉도
언젠가부터 ‘울릉도’ 하면 이장희를 떠올리게 됐다. 그는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등의 노래로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다. 1980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뒤 귀국해 1998년부터 울릉도에 머물고 있다. 이장희의 유명세 덕분에 울릉도는 더 친근한 섬이 됐다. 관광객이 늘고, 곰치와 명이나물 등 울릉도 특산물이 알려지는 ‘이장희 효과’도 일어났다. 경상북도의 ‘자랑스러운 도민상’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시봉 친구들을 포함해 이장희의 지인들 역시 울릉도와 인연을 맺고 있다. 김민기와 김중만은 작업을 위해 울릉도를 자주 찾고 있으며, 전유성은 울릉도에 아예 집을 한 채 샀다. 스스로를 ‘도시형 인간’이라 부르는 조영남도 울릉도 방문이 벌써 여섯 번째다. “장희 덕분에 울릉도가 친근해졌어요. 장희가 친구들에게 엄청나게 울릉도 선전을 하는데, 설득 안 당할 수 없어요. 그런데 울릉도는 직접 와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어요. 다른 섬들과는 완전히 다르죠. 제가 알프스를 가도 그냥 쳐다보고 마는 사람인데, 이곳에 오면 장희가 왜 여기 사는지 알게 돼요.” 이장희 덕분에 친구들은 모두 울릉도의 비공식 홍보대사가 됐지만, 처음 이장희가 울릉도에 정착한다고 했을 때 반응은 냉담했다. “한마디로 시큰둥했죠. ‘미친놈 아니야?’ 하거나.” 이장희가 옛일을 회상하며 웃는다. “김동길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장희야, 그런 데 가서 사는 거 아니야. 서울에 살아도 자주 보기 힘든데….’ 친구들도 울릉도를 오지라고 생각했으니, 대부분 반대를 했죠.” 울릉도가 그에게 제2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 된 건 1997년, 우연히 울릉도를 방문하게 되면서 부터다. 그는 울릉도의 풍광에 반해 바로 다음 해에 부지를 매입했고, 집을 지었다. “사실 울릉도를 알기 전에는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은퇴 후의 삶은 하와이에서 보내려고 했죠. 수십 번을 드나들며 집도 알아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울릉도에 한 번 가보고 나서, ‘울릉도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해에 떠 있는 울릉도가 정말이지 아름답더군요.” 조영남은 “이장희는 역마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가 울릉도에만 머물 리 없다. 1년 중 울릉도에 4개월, 로스앤젤레스에 2개월, 나머지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 머물거나 세계 곳곳을 여행하곤 한다. 제대로 보헤미안이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니, 그동안 번 돈을 여행 다니며 다 쓰고 살고 있어요. 그래도 울릉도에서는 죽을 때까지 살지 않을까요? ‘자랑스러운 도민상’까지 받았고, 군민을 위한 노래도 만들고, 울릉도에 노래비까지 세웠으니.”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 만들고, 노래비까지 세워
이장희는 올해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가 가수생활에서 은퇴한 후 30년 만에 내놓은 신곡이다. 이날 그는 울릉도민 앞에서 이 노래를 열창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 무대였다. “‘울릉도는 나의 천국’을 울릉도민 앞에서 처음으로 불러봤어요. 음반으로 발표는 했지만 무대에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공연을 한 게 몇 년 만인지, 무대에 섰는데 ‘참 행복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울릉도를 위해 만든 노래를, 울릉도 노래비 제막식에서, 울릉도민 앞에서 부른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이날 세워진 울릉도 노래비는 2m 높이의 비석과 바닥의 대리석 현판으로 이뤄졌다. 비석에는 이 씨가 직접 쓴 ‘울릉천국’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 현판에는 ‘울릉도는 나의 천국’의 가사가 담겼다. 재미있는 것은 노래비 주위를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김민기 등 세시봉 출신 가수들과 김중만, 전유성, 이두식, 강근식, 이상벽 등의 사인이 새겨진 작은 석주가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후배들의 사인을 넣었어요. 이제는 다들 유명한 사람들이 되어 있네요. 앞으로도 이 자리가 울릉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됐으면 좋겠어요.” 울릉도에서의 삶은 모두 그의 손으로 직접 꾸몄다. 직접 집을 지었고, 집 앞 연못까지 직접 팠다. 고지대에서 나물농사를 짓기 위해 모노레일까지 갖추었다. 기자가 “정말 직접 만들었나?”라고 놀라 물으니, “정성이 들어가면 들어갔지 돈은 그렇게 안 들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는 현재 40년 전 함께 활동했던 베이스기타리스트 조원익과 함께 살고 있다. 남자 둘만 사는 집치고는 의외로 깔끔했다. 이장희 방의 책장에는 책과 LP가 빼곡했으며, 한쪽에는 기타와 신디사이저가 놓여 있었다. 여전한 음악사랑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 울릉도를 찾은 이장희의 친구들. 왼쪽부터 이두식, 강근식, 전유성, 조영남, 이장희
- (왼쪽)이장희의 자작곡 ‘울릉도는 나의 천국’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던 날, 조영남이 즉흥 콘서트를 열었다.
50년 지기 조영남, “이장희는 천재”
조영남은 “이장희와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래서 친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장희는 조영남의 단짝 친구의 조카였다. 중학생 무렵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스무 살 무렵 세시봉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신기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관계와 비슷하죠. 물론 제가 폴 매카트니고요. 제게 처음으로 레코드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이장희였어요. 숙명이라면 숙명일 거예요.”(조영남) “중학교 2학년 때 삼촌 친구로 만나 지금까지 늘 함께였어요. 당시 형의 노래를 듣고 음악에 빠져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죠.”(이장희) 조영남은 이장희에게 “음치니까 가수는 안 된다”고 했지만, 이장희는 데뷔 후 탁월한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가수가 된 것도 잠시, 이장희는 어느 날 갑자기 노래를 그만두고 연예계를 떠난 뒤 레코드 음반 제작자가 되어 조동진, 사랑과 평화, 김현식, 김정호 등 수많은 가수를 데뷔시켰다. “제 첫 음반을 제작해준 사람이 바로 이장희예요. ‘불 꺼진 창’이 수록된 앨범은 기록적인 음반이죠. 6만 장까지 팔렸는데, 요즘으로 치면 100만 장 수준이에요. 미국에서 돌아와서 활동할 때도 장희가 함께했죠.” 그러나 이장희는 돌연 한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 LA에 ‘로즈가든’이라는 영국식 레스토랑을 차렸다. 코리아타운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아 손님이 들끓었다. 할리우드 스타들도 꽤 찾아왔다. 조영남은 친구들을 데리고 그를 보러 수시로 미국을 방문했다. “저는 앉아 있는 천재라면, 장희는 행동하는 천재예요. 사람을 끄는 힘은 저와는 비교가 안 돼요. 사업을 해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LA 라디오 코리아’를 최고의 매스컴으로 키울 수 있다는 자체가 천재라는 뜻 아닐까요?” 이장희는 연예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사업을 준비한 끝에 1989년, LA에 한인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했다. 그러던 중 1992년, 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 일어나 흑인 거주 지역 주변의 한국 교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피해가 커지자 그는 라디오 코리아 비상방송 체제에 돌입했고, 교민들을 위한 구호물품이 방송을 통해 속속 도착되었다. 이후 라디오 코리아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졌으며, 부시 대통령이 직접 이곳을 방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장희는 물러날 때를 알았다. 2003년 12월 31일 마지막 방송을 하고 2004년에 은퇴했다. 이장희와 조영남 두 사람은 모두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장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아내로서는 그런 가장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전 부인과의 관계는 정반대다. 알려졌다시피 조영남은 전 부인과 전혀 왕래하지 않는데 비해 이장희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장희는 나와 달라요. 애들 엄마랑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어요.” 지난 50년을 함께 보냈듯, 이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생각이다. “서울 집은 영남이 형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요. 서울에 갈 때마다 형과 만나서 갈비탕을 먹으러 가죠. 우리 둘 다 싱글이니까 더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늘 가깝게 지내왔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요?”
사진작가 김중만과 이장희 그리고 김현식
사진작가 김중만은 빠듯한 일정을 쪼개 울릉도를 찾았다. 2박3일은 되어야 가볼 만한 울릉도에 그는 당일로 다녀갔다(정말 점심만 먹고 돌아갔다). 다음 날 촬영 일정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울릉도에 오게 된 것은 이장희와의 특별한 우정 때문이다. “당시 앨범 재킷 사진을 찍으면 보통 5만 원 정도 받았어요. 그는 내게 음반 재킷을 부탁하고는 20만 원을 주었죠. 그렇게 통이 큰 사람이었어요. 제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주었죠. 그리고 제게 김현식을 소개시켜준 장본인이에요” 한편 김중만은 고(故) 김현식과도 우정이 남달랐다. 그는 김현식 헌정앨범 발매를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랜 시간 같이 보내며 여태까지 내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 있는 아티스트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가수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