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한국교회가 전부 이단이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복음에 대해서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복음을 전하면, 자신도 복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꼭 뒤에 토를 다는 게 있다. 그것은 모든 교회가 다 이단인 것은 아니란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필히 이단이다 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항하고 싶은 것이다. 그 심보가 뭘까? 왜 이단이고 싶지 않을까? 예수님을 보고 사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그 단체를 자신의 대변자로 간주하여 그 안에서 들어 있는 자신을 늘 지켜보면서 살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상대하고 있다. 이러니 참으로 복음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자기가 자신을 쳐다보고 사는 것도 복음 안에서의 삶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굴레를 뒤집어 쓰고 존재한다. 인류는 처음에 샤마니즘적 사회를 구성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사원(寺院)국가’라 한다. 사원국가는 중앙에 부도(浮屠)라는 제단이 있다.
부도란 옛날 천문대를 말한다. 별자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그 변화에 맞추어 정치하는 정치제도를 취했다. 이 일을 전문하는 하는 자들이 샤먼(무당)이다. 이러한 국가 형태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와서는 데모크라시, 즉 민주적인 공화정 국가 형태를 띠게 된다
. 즉 정치제도는 백성들 간의 의견과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자문기관으로서만 자리 잡는다. 자연적으로 종교계급의 역할은 전사(戰士) 계급이나 생산자 계급에 비해서 뒤로 밀려 보조하는 역할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이 민주 사회에서 교회를 나온다는 것은 기껏 해야 종교 계급의 역할을 일부 인정해주겠다는 선에 머문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자기 개인의 이익과 의견이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친 공간 같은 것이다. 이 버릇이 모든 인간들이 날 때부터 주입받게 된다.
물주머니 안에서 물이 출렁출렁하듯이 이 버릇도 늘 출렁출렁한다. 교회라는 사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월남치마 껴입듯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 계급에 종사하는 목사나 신부에게는 세상 전체가 사원국가가 되었으면 고대한다.
자신들의 말발이 절대적으로 먹히는 소위 ‘거룩한 지상천국’을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속에 들어있는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반발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썩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는 아니올시다”고 말이다.
이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그 사회에는 자신의 건전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켜내는 보호막이 제대로 가동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들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 탈이 없이 바르게 복음대로 잘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도의 몸 자체가 성전’이라는 성경의 취지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특정 사회 안에 놓아두므로 서 그 건전한 사회 안에 있는 자신도 덩달아 건전성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그런 사원국가적 안목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고 난 뒤의 소감이다.
자기도 망하고 자기가 소속한 사회도 같이 망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매일같이 되풀이 되어 십자가 피가 가동되어야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존재 자체로서 이단이 안 될 수 있는 방안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이단으로 매일같이 발각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그 만들어진 사회 안에서 사회를 보면서 그 안에서 보호를 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방안으로 건전하고, 훌륭한 사회 속에, 교회 속에 거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지상을 정의로운 사회로 변혁하고자 한다. 그런 노력을 시도하는 자아는 그런 의향 자체로 인하여 마치 이단이 더 이상 아닌 존재인 것처럼 정체성을 날마다 확인하려 든다.
이렇게 되면 평생을 자신을 커버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썩은 것은 알지만 …”이 무슨 뜻인가? 곧 자신은 복음과 비-복음을 구분할 줄 아는 건전한 안목을 가졌기에 이런 건전한 안목을 지닌 내가 무슨 하자가 있겠느냐는 자신감이다.
다음에 “다는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곧 건전한 사상을 지닌 우리 손으로 하나님도 거할 실만 한 사회를 친히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단체 안에 소속되어 있는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한 이단은 아니라는 주장을 늘어놓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 있어 강사 문제가 음성적으로 회자(膾炙)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래서 이단 맞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강사만이 참된 강사다. 그러나 반대로 “나도 복음을 아는데 왜 강사로 안 세우느냐”고 덤벼들면 이 사람은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다.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훌륭한 강사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 대신 왜 자신들이 날마다 이단으로 살아가는지 그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유일무이한 소식이 듣고 싶은 사람들이다. “나도 복음 안다”고 우기는 자들은 십자가 마을이 하나의 사원국가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즉 소위 건전하고 복음적인 기독교 모임 안에 자신을 존재케 함으로서 덤으로 성도티를 내려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급한 분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교회가 유지되느냐가 급한 문제이고, 자신의 업적을 기릴 만한 역사와 전통을 뒷받침해 줄 모임이 필요할 뿐이다.
십자가 마을도 매일같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모든 사람이 늘 이단이요 모든 교회가 늘 이단이다’는 명제 안에 당연히 십자가 마을도 포함된다. 쉽게 말해서 늘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용서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구원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사태가 늘 일어나는 그 현장이 성도의 몸을 통해서 진행되기에 ‘성도의 몸이 곧 성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