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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과 왕비 왕릉 위치 사망날짜 기록문서-귀중한 문화재-조선시대 보물 문화재-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4. 12. 11.

조선시대 왕과 왕비 왕릉 위치 사망날짜 기록문서-귀중한 문화재-조선시대 보물 문화재-

 

 

조선시대 역대왕 왕비 묘지 위치와  제사날짜 사망일 기록문서-중요 문화재-

 

 

조선시대 왕들의 제사날짜를 기록한 문서 입니다..

 

 

단순히 조선시대  왕들의 제사날짜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왕들의 묘지 위치와 함께 왕비의 묘지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한 아주 중요한 문서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록 문서가 아쉽게도   온전하지 못한 것이 흠이지만... 조선 역대 왕들과 왕비의  묘지위치와 제사날짜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기록물은 아주 보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귀중한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기록문서의 가치성을 잘 아시는 분은 직접 전화를 한통 주시기 바랍니다..

 

 

- 공 일 공 -  삼 삼 육 사  --  삼 팔 삼 육--  김형희 드림

 

조선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날짜와 무덤 위치를 정확하게 기재하여 기록한 이 기록 문서는 너무도 귀중한 문화유산이 될 수가 있으며... 그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택비포함  십구만원에 드립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과 왕비의 사망날짜  왕릉위치를 자세하게 기록한 중요한 기록문서 입니다...

태조왕부터.....태종대왕 신덕왕후 등등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이름도 보입니다.................................

 

 

 

문종대왕  성종대왕  그리고 왕비들의 사망날짜와  무덤위치를 기록한 글들이 보입니다..문종왕의 왕비인 현덕왕후의 이름도 보입니다........

 

 

 

고양.... 파주   광주  양주 등의 지명이 보입니다... 이 위치에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기록한 기록문서 입니다.............................

 

 

 

선조대왕의 이름도 보이고.....인조대왕도 보이고,......인연 왕후를 비롯한 왕비들의 이름도 보입니다..

 

 

 

 

 

 

 

기일을 적어 놓은 것과 왕릉과 무덤의 위치를 적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 기록  문서는 아마도  아주 귀중하고 중요한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392년 고려 멸망 후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9년 동안의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이다. 역대 왕조의 왕릉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왕과 비들의 무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왕실의 장례와 제례를 엿볼 수 있으며, 국조오례의와 같은 상세한 기록까지 후대에 전해져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를 잘 조명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

 

한편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는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 그리고 태조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양친의 능은 여기서 제외된다.

 

 

조선 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의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는 입지 조건에 따라 선정되었다. 실제로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이전의 태조의 조상들의 능묘, 신의왕후의 능묘인 제릉, 정종의 능묘인 후릉여주세종효종의 능묘인 영·녕릉, 영월에서 객사한 단종장릉을 제외하면 서울 사대문에서 100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은 풍수지리적인 요소를 고려해 위치를 선정하였으며, 바람, 물, 불, 나무, 흙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재해의 발생이 없어야 하고, 배산임수 지형을 갖추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