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도인 강창원 글씨 숨은 명필 옛날글씨 한국 서예의 거장
옛날 수십 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소지도인 강창원 글씨입니다 서예계에서는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명필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 입니다 허나 정작 자신의 글씨는 국전에 단 한 번도 출품하지 않는 않았던 딸깍바리 선비 정신이 대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누가 나의 글을 평가하고 심사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본래 글이란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뜻이 있다고 하면서 재야에 은거하며 글씨를 즐기면서 살아온 서예가 입니다
자신의 작품 천여 점을 추사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상업적인 용도로 글을 쓰지 않아서 만나 보기가 쉽지 않은 숨은 명필 소지도인 강창원 글씨입니다 이 글씨는 소지도인 강창원이 초창기에 쓴 것으로 보이며 완숙함이 묻어나지 않지만 청춘의 정열적인 기가 흐르는 글씨로 보입니다 상태 양호하고 좋습니다 쉽게 만나 볼 수 없는 귀한 글이며 직접 쓴 것으로 보입니다 ㆍ
상당히 귀한 글씨로 여겨집니다
세상이 잘 모르는 숨은 명필名筆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하나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서예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해 올리는 일이다. 추사 김정희와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아는 사람인 반면, 나머지 다섯 분의 우리나라 서예가들은 서예에 큰 관심을 가진 분들만 알만한 분들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소지도인 강창원은 서예계의 깊숙한 내용을 알고 서예에 상당한 안목을 갖추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숨은 서예가다. 그는 국전을 등지고 살았기 때문에 오직 전문 서예가들에게만 알려진 까닭이다. 이런 숨은 보배와 같은 예술가를 세상에 드러내고 알리는 일도 보람있는 일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서예계에서 국전이라는 화려하고 막강한 등용문을 등지고 재야에서 홀로 글씨를 즐기고 쓴 서예가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소지도인이다. 당시 서예계는 소전 손재형을 중심으로 한 국전파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붓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소지도인 강창원 한때 소전과 한 동네에 이웃하여 살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지도인 강창원은 이런 국전파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는 서예란 선비가 학문과 더불어 스스로 즐기며 수양하는 예술이지 이를 이용하여 입신양명하거나 권력을 휘두르는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국전을 통하여 서예가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던 소지도인은 이런 단순한 이유로 국전을 외면하였다.
국전의 등용문을 거치기 위하여는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는 자신보다 글씨를 더 잘 쓴다거나 서예에 관한 더 높고 깊은 안목을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내고 심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런 까닭에 그는 그저 좋아하는 글씨를 즐겨 쓰면서 맑고 밝게 살기를 원하였다. 선생의 그런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90세에 다가간 지금도 아무런 잔병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며 열심히 글씨를 쓰고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추사는 일생에 단 한번 생부를 따라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하여 석 달쯤의 짧은 기간 동안 당대 중국의 서예계를 둘러보고 많은 영향을 받고 돌아 왔다. 검여 유희강은 약 5년간 중국의 북경과 상해에 머물며 서예를 공부하고 돌아 왔다. 그러나 소지도인은 15년 이상 중국의 베이징에서 공부하였다. 그것도 “베이징의 맹상군孟嘗君”이라 불릴 정도로 부유하고 후덕하였던 부친의 덕택에 서예의 본고장 한 가운데서 서예를 생활화하고 서화 속에서 성장하며 배운 것이다.
소지도인 강창원은 1918년 서울 종로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 강창흠 姜昶欽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를 모셨던 전의典醫로 정삼품正三品에 오른 명의였다. 지금의 제도로 말하면 역대 대통령 두 분의 주치의를 지낸 것이다.
부친 강태영姜台永은 매우 진취적이고 선각자적인 생각을 품은 사람이었다. 급격히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고 일본에 유학을 한 다음 일제의 강압통치를 피하여 베이징으로 망명, 치과전문의로 개업하였다.
부친이 중국인 동창생 융조민戎肇敏과 함께 연 치과병원은 크게 번창하여 당시 북경에 사는 한중일 상류인사들과 명사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많은 식객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 때 선친의 병원과 응접실에는 늘 당대의 유명인들이 환자나 친지로 찾아 왔는데, 그 중에는 중국 군벌의 오패부吳佩孚 장군, 북경대학교 팽한회彭漢懷 교수, 개혁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선생, 가장 중국민중의 존경을 받은 청말淸末 민국民國 시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이고 전각가인 국화사國畵師 제백석齊白石 등과 그들 인맥을 통한 수많은 문인, 화가, 서예가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병원과 선생님 댁은 이들이 기증한 수많은 서화작품으로 둘려 싸여 화랑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북경 거리의 모든 건물에는 의례 금분을 입힌 목각 현판들이 경쟁하듯 현란하게 붙어 있었는데, 명필들이 쓴 글씨를 감상하며 걸어 다니는 것만도 학창시절의 소지도인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골통 서화상이 집결하여 있는 유리창琉璃窓 거리와 베이징의 주요 건물에는 모두 대가들의 작품들이 걸리어 그가 북경에서 보낸 학창시절은 그야말로 서화 속에서 살았다 한다. 자연 그 많은 서화 속에 묻혀 산 젊은 시절의 강창원은 일찍 서예에 눈뜨고 높은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이때 어린 강창원이 서예에 관심 깊은 것을 보고 당시 베이징 망멱객인 고강高岡 이세민李世民 선생(이순신 장군의 10대 손, 독립지사)이 안진경의 <쌍학명첩雙鶴銘帖>을 지도해 주었고, 한세량韓世良 목사는 유공권체를 지도하여 주었다 한다. 또한 제백석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중국인 잠암潛庵 양소준楊昭雋과 그의 처삼촌인 서예가 서백타徐百佗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 베이징 명문가 자녀들에게 중국 정통 서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런 선생님들에게 배운 까닭에 소지도인 강창원의 글씨는 대륙의 기상이 담겨있고 독립투사들의 정신과 기백이 배어있다. 소지도인 강창원은 특히 당나라 시대에 발전하였던 해서체에 두루 능통하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서예 공부를 계속하던 청년 강창원은 조국이 해방되자 중도에 귀국하여, 건국 후 재무부에서 관리생활를 시작하였다. 이어 한때 보험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잘 풀리어 돌아가지 않자 서울의 종로 인사동에 개인 서실 임지헌臨池軒을 열고 서예를 가르치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였던 강창원은 지금의 아리랑방송의 전신인 KBS국제방송에서 우리나라 초대 중국어 아나운서를 맡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중공군이 참전하자 대중공군 심리방송을 위하여 만든 중국어 방송의 초대 아나운서를 한 것이다. 그만큼 소지도인 강창원은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제자들에게 체본體本을 해 주고 나면 하루 종일 중국차를 다려 마시면서 늘 중국책을 읽었다. 당대의 한학자이셨던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도 소지도인 강창원의 고상하고 유창한 중국어 실력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