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목사 설교해부.[1]
개혁적 마인드를 이용하여 한국교회안에서 어느정도 자신의 입지를 세워놓은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해부해 보고자 한다. 예전에도 그런 시도를 하려 한적이 있었지만, 타락한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폐쇄성을 높은뜻 교회도 답습하려는지 글쓰기를 차단시켜 버려서 하지 못한 적이 있다. 비난을 싫어 하는 교회에서 일찍 퇴출되려 하지 않으려고 김동호 목사에 대한 비판을 미루어 놓았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다.
김목사는 근사한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김홍도 목사를 비판한다.오래전에 죽을 뻔한 실화를 이야기 하면서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라는 신앙관을 고백한다.물질에 대한 초연한 자기 의지를 보여주는 설교를 통하여 거대한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왕권을 물려 주듯이 대물려주는 김홍도 목사의 타락한 목회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고 권면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당연한 도리이자 십자가의 행동인것이다. 그런 면으로 볼때 김동호 목사의 발언은 시의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근 사한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살펴보면서 복음은 없는 윤리 도덕책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더 정확하게 비판을 가하자면, 김동호 목사를 외식하는 자라고 까지 지적해 주고 싶다.
김목사는 오직 의인은 믿으로만 산다"로마서 1장17절의 말씀을 들어가며 자신의 의인됨을 나타내고 있다. 김홍도와는 사뭇다른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것이다. 이 설교를 살펴본 소감은 아전인수의 맹점이 가득참이 여실히 드러난 다는 점이다.하느님 한분만 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말을 강력하게 외치는 자가 1억이 넘은 연봉을 받으며 살고 있고, 그 행위 또한 능력껏 대우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자본주의식 사고관을 매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정당화 한다. 그러면서도 김홍도 목사의 세습에는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행위가 김홍도 목사와는 천차 만별일 정도로 근사하고 자유하고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 [오직 믿음이라고 하면서 오직 부귀만큼은 함께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교회를 세습시키는 아버지에게 사양을 하지 않은 아들 또한 문제라고 하면서 문제점을 들쳐 내지만, 과연 김동호 목사와 그 아들은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가 있을까?. 왜 일억이 넘은 연봉을 줄 때에 사양한다는 말을 못했을까? 잘못인줄 몰라서?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김홍도 목사와 그 아들도 몰라서였다든지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을 한것이니 내가 용서 되듯이 그들도 용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도 용서가 되지 않듯이 나또한 용서가 안되는 것이던지 말이다. [그들이 그런 행위로 인해 거짓 목사로 판명되듯이 김동호 목사도 거짓으로 판명되어야 정정당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볼때 김목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홍도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것을 염려한 탓에 입에 재갈을 물리던 김목사가 어쩔수없이 시대조류에 따라 할말을 하였지만, 자신에게 직격탄으로 돌아올 부메랑을 두려워 하여서 결국에 꺠끗한 부자라는 등식을 설교중간에 대입시킨다. 하느님을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쉽지만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는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부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을 위해 일부러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위해 가난해지지 않고 께끗한 부자로 남을 수 있다는 기가찬 주장을 한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부자가 되는 것이 가난한 자가 되는것보다 훌륭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믿음에 차별성이 있단말인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김동호 목사가 제대로된 목사일 수 있을까? 쉬운 예로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거지가 되는 것과 부자로 살면서 [부자를 유지하기 위한 한계성]남은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과 어느것이 더 어려운 일일까?..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김동호 목사는 지극히 인본주의 적이며 윤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바리새인이다. 근사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설교를 통하여 단 한군데도 찾아 볼수가 없다. 결론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설교일 뿐이다. 자신이야 말로 가장 깨끗한 부자 목사라고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인 복음을 전혀 모르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바리새인 목사이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설교를 듣기 위해 몇시간을 달려 온다는 숭의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눈과 귀가 어두운 자들인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바리새인들을 집단적으로 양산하는 김동호 목사는 이 시대의 전형적 리새인이라고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
**김동호 목사의 잘못된 설교에 아멘하는 자들이나 김홍도 목사의 잘못된 설교에 아멘하는 자들이나 잘못을 보지 못하는 것은 똑같다.약간의 도덕적 차이에 교인들의 수준이 차이가 날뿐이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배를 탄 자들이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2)
창 12:1-4.
1983년 1월 후배 목사가 목회하던 충청도 시골 교회에서 집회를 하던 중 차사고로 죽을 뻔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수안보 온천으로 목욕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다리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 다리 아래로 추락할 뻔 하였던 것입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도로가 얼지 않았었는데 공중에 매달려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다리만 얼어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빙판에서 브레이크 밟아서 차가 다리 위에서 돌았던 것입니다.
100번이면 99번 죽을 뻔 했던 사고였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100번이면 99번 죽을 뻔 했었는데, 만일 내가 오늘 그 사고를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아주 심각하게 하였습니다. 외아들의 홀어머니인 어머니 생각도 났고, 삼십대 초반에 과부가 되어 어린 아이 셋을 길러야 할 아내 생각도 났고, 애비 없이 자라야 할 제 어린 세 아이 생각도 났습니다. 모두가 다 저 없으면 살 수 없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생각으로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얘, 내가 죽어야 문제지 네가 죽는데 무슨 문제냐? 물론 자식이 먼저 죽으면 힘들지만 믿음은 그것도 극복하는 것이란다. 네 어머니 나를 믿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물론 힘들겠지만 잘 극복하고 이겨 낼 꺼다. 남편 없는 여자는 다 못 산다든? 남편 없이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못사는 것은 아니란다. 네 아내가 나 잘 믿으면 아이 셋 잘 기르면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자식도 마찬가지다. 아비 없다고 못하는 것 아니다. 네 아이들이 나만 잘 믿고 자라 준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어야 문제지 너 죽는다고 문제 될 것 아무 것도 없다.' 저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그날 아주 철저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 없으면 못살고, 남편 없으면 못살고, 아비 없으면 못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로운 일도 아닙니다. 자식과 남편과 아비는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인데 그 나약한 존재가 없으면 못사는 존재가 된다면 그는 당연히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문제없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사람을 참 근사하게 합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당당하게 하며 깨끗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살면 복의 근원이 되는 큰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데, 믿음이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시는 까닭은 세상 줄 다 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게 하려 하심 입니다. 모세가 그 훈련을 받았고, 바울이 그 훈련을 받았으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그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를 하게 되어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강북에 있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최종적으로 받음으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아직 35살도 안 되었다는 아들 목사에게 당회장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여러해 전 강남에서 역시 대형교회를 목회하시던 그 목사님의 형님 목사님도 38살 된 아들에게 수 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습케 하시더니 동생도 똑같이 그와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세습은 참 전근대적인 것입니다. 사업도 조그맣게 할 때는 자식에게 물려 줄 수도 아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업이 커져서 주식회사가 되고 여러 주주들의 돈으로 큰 회사를 이루게 되면 사장의 아들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 회사는 개인의 것이니까 아들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어도 되지만, 주식회사는 개인의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장과 회장의 회사가 아니라 주주들의 회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기 아들이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뒤를 이어 사장을 만들고 회장을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옳지 않은 일입니다.
선진국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선진국일수록 그와 같은 생각, 즉 회사의 주인은 주주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주식을 상속함으로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지만, 무조건 자기 자식을 회장과 사장으로 세워 회사 경영을 대대로 하려고 하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삼성이 혼을 나고, 현대 자동차 회장이 감옥에 들어가 옥고를 치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 하건데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와 같은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회장이라고, 권력이 있다고, 남보다 좀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 회사를 개인 회사인양 생각하고 운영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둑심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교인들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영수직을 자식에게 대대로 세습케 하려는 것은 말로는 나라가 국민들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라를 자기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에 35살도 안 된 어린 아들에게 수 만 명 교세의 큰 대형교회를 물려주는 그 목사님은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는 김일성을 꼭 빼다 닮았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강남의 대형교회가 아들에게 세습을 할 때 저희 큰 아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아들에게 세습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가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눈이 멀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렇다고 그것을 아무 사양 없이 그냥 받는 아들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잘 만나, 그 덕으로 젊은 나이에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자리에 앉게 되는 황태자들. 사람들은 배 아파하고, 부러워 하지만,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부러워할 일이 못됩니다. 자리는 근사하지만 사람은 별로 근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로 정당한 승부 끝에 얻는 승리의 기쁨이 무엇이지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죽어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성공한 줄로 착각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와 같은 식으로 얻는 자리를 성공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공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성공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공정한 경쟁을 통했다면 그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마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는 남의 자리와 기회를 도적질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자리와 기회만 도적질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리와 기회를 도적질 한 셈이 되어 문제가 생각보다 커집니다.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되면 그와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한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은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도 옳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에게 절망을 주게 하여 정당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옳지 않은 일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큰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눈이 어두워 자기에게 전혀 맞지도, 옳지도 않은 자리에 덥석 앉아 버린 사람들이 꼭 읽고 교훈을 얻었어야 할 말씀이 저는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저들에게도 아브람에게처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아비의 덕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덕을 볼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덕을 입지 못하게 되면 나약한 자가 되고 진정으로 성공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틀림없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저들도 목사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과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 아는 사람이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훌륭한 아브람의 믿음에 대하여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끈을 붙잡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끈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외치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도 의지하지도 잘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돈을, 권력을 더 의지하여 실제로는 그것으로 자신의 하나님을 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브람처럼 떠나야만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성공한 이유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꼭 가난해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 남편으로, 자식으로 하나님을 삼지 않는다는 것은 꼭 저들과 헤어져 독신으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소극적이다 못해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는 아내와 남편이 함께 살면 참 관계가 좋아집니다. 서로 잡아당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 참 자유 함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입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일 때 부부의 사이와 관계가 제일 좋아집니다. 돈으로 끈을 삼지 않는 사람이 부자가 되면 경제가 좋아집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돈으로 끈을 삼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고 돈으로는 끈을 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난해 지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깨끗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가난해 지는 것이 믿음을 지키기가 쉽습니다. 돈을 끈으로 삼으려고 하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것은 부자인데 돈으로 끈을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으로 끈을 삼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 때문에 세상은 참 힘들어 지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권력을 끈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만을 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면 세상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끈이라고 하여 권력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장난 같지만 권력을 끈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정말 끈이 아니라고 확실히 믿는다면, 그것을 끈으로 잡지 않는다면, 권력의 순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누군가가 깨끗한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아브람은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정말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땅을 떠납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돈과 권력과 사람에 얽매여 그것을 끈으로 알고 자신과 세상을 칭칭 감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브람과 같은 사람을 보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믿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개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의 사람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만 믿고 삽니다. 그래서 깨끗합니다. 그래서 당당합니다. 그래서 근사합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성공합니다. 그래서 승리합니다.
저는 제가 아브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이 아브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혹시 셋 중에 목사가 된다면 막내가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목사만 주의 종이고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가 성직이기 때문에 막내가 목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볼 때 막내는 목사가 되는 것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는 이제껏 패션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생각을 바꾸어 목사가 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저에게 전해 왔습니다. 저는 참 기뻤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정한 막내에게 제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 덕 볼 생각하지 말아라'였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잘 만나서 대형교회의 후계자가 되는 그런 아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아브람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아이가 한동대학교에 입학한 후 다시 재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대학에 다닌 다는 것이 약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선배들이 후배를 이끌어 주는 우리 사회에서 선배가 없는 대학을 졸업하여 이 세상에서 생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수하면 어떻겠냐고 묻는 큰 아이에게 나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뜻으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 보라 말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사흘을 작정하고 기도원에 갔다가 이틀 만에 응답을 받고 기도원을 내려왔습니다. 우리 큰 아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은 이사야 3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 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 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학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아멘.
큰 아이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두 말 않고 한동대로 내려가 졸업을 하였습니다. 제 아이는 그날 선배와 학연이라고 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한동대로 내려가는 아이에게 저는 ‘아버지는 네가 학교와 선배 덕이나 보는 사람이 되는 것 원치 않는다. 학교가 네 덕 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제가 생각해도 참 근사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믿음으로 75세의 나이에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브람이 너무 근사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참 근사하게 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거듭남의 모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은 사람을 근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같은 믿음으로 근사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공하고 승리하고 복을 받아 그 복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설교해부.[1]
개혁적 마인드를 이용하여 한국교회안에서 어느정도 자신의 입지를 세워놓은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해부해 보고자 한다. 예전에도 그런 시도를 하려 한적이 있었지만, 타락한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폐쇄성을 높은뜻 교회도 답습하려는지 글쓰기를 차단시켜 버려서 하지 못한 적이 있다. 비난을 싫어 하는 교회에서 일찍 퇴출되려 하지 않으려고 김동호 목사에 대한 비판을 미루어 놓았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다.
김목사는 근사한 하느님의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김홍도 목사를 비판한다.오래전에 죽을 뻔한 실화를 이야기 하면서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라는 신앙관을 고백한다.물질에 대한 초연한 자기 의지를 보여주는 설교를 통하여 거대한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왕권을 물려 주듯이 대물려주는 김홍도 목사의 타락한 목회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고 권면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당연한 도리이자 십자가의 행동인것이다. 그런 면으로 볼때 김동호 목사의 발언은 시의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근 사한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살펴보면서 복음은 없는 윤리 도덕책이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더 정확하게 비판을 가하자면, 김동호 목사를 외식하는 자라고 까지 지적해 주고 싶다.
김목사는 오직 의인은 믿으로만 산다"로마서 1장17절의 말씀을 들어가며 자신의 의인됨을 나타내고 있다. 김홍도와는 사뭇다른 차별성을 두려고 하는 것이다. 이 설교를 살펴본 소감은 아전인수의 맹점이 가득참이 여실히 드러난 다는 점이다.하느님 한분만 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말을 강력하게 외치는 자가 1억이 넘은 연봉을 받으며 살고 있고, 그 행위 또한 능력껏 대우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자본주의식 사고관을 매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정당화 한다. 그러면서도 김홍도 목사의 세습에는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행위가 김홍도 목사와는 천차 만별일 정도로 근사하고 자유하고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 [오직 믿음이라고 하면서 오직 부귀만큼은 함께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교회를 세습시키는 아버지에게 사양을 하지 않은 아들 또한 문제라고 하면서 문제점을 들쳐 내지만, 과연 김동호 목사와 그 아들은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가 있을까?. 왜 일억이 넘은 연봉을 줄 때에 사양한다는 말을 못했을까? 잘못인줄 몰라서?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김홍도 목사와 그 아들도 몰라서였다든지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을 한것이니 내가 용서 되듯이 그들도 용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도 용서가 되지 않듯이 나또한 용서가 안되는 것이던지 말이다. [그들이 그런 행위로 인해 거짓 목사로 판명되듯이 김동호 목사도 거짓으로 판명되어야 정정당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볼때 김목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홍도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것을 염려한 탓에 입에 재갈을 물리던 김목사가 어쩔수없이 시대조류에 따라 할말을 하였지만, 자신에게 직격탄으로 돌아올 부메랑을 두려워 하여서 결국에 꺠끗한 부자라는 등식을 설교중간에 대입시킨다. 하느님을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쉽지만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는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부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을 위해 일부러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위해 가난해지지 않고 께끗한 부자로 남을 수 있다는 기가찬 주장을 한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부자가 되는 것이 가난한 자가 되는것보다 훌륭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믿음에 차별성이 있단말인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김동호 목사가 제대로된 목사일 수 있을까? 쉬운 예로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거지가 되는 것과 부자로 살면서 [부자를 유지하기 위한 한계성]남은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과 어느것이 더 어려운 일일까?..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김동호 목사는 지극히 인본주의 적이며 윤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바리새인이다. 근사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설교를 통하여 단 한군데도 찾아 볼수가 없다. 결론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한 설교일 뿐이다. 자신이야 말로 가장 깨끗한 부자 목사라고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인 복음을 전혀 모르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바리새인 목사이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설교를 듣기 위해 몇시간을 달려 온다는 숭의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눈과 귀가 어두운 자들인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바리새인들을 집단적으로 양산하는 김동호 목사는 이 시대의 전형적 리새인이라고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
**김동호 목사의 잘못된 설교에 아멘하는 자들이나 김홍도 목사의 잘못된 설교에 아멘하는 자들이나 잘못을 보지 못하는 것은 똑같다.약간의 도덕적 차이에 교인들의 수준이 차이가 날뿐이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배를 탄 자들이다.***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2) 창 12:1-4. 1983년 1월 후배 목사가 목회하던 충청도 시골 교회에서 집회를 하던 중 차사고로 죽을 뻔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수안보 온천으로 목욕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다리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 다리 아래로 추락할 뻔 하였던 것입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도로가 얼지 않았었는데 공중에 매달려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다리만 얼어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빙판에서 브레이크 밟아서 차가 다리 위에서 돌았던 것입니다. 100번이면 99번 죽을 뻔 했던 사고였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100번이면 99번 죽을 뻔 했었는데, 만일 내가 오늘 그 사고를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아주 심각하게 하였습니다. 외아들의 홀어머니인 어머니 생각도 났고, 삼십대 초반에 과부가 되어 어린 아이 셋을 길러야 할 아내 생각도 났고, 애비 없이 자라야 할 제 어린 세 아이 생각도 났습니다. 모두가 다 저 없으면 살 수 없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생각으로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얘, 내가 죽어야 문제지 네가 죽는데 무슨 문제냐? 물론 자식이 먼저 죽으면 힘들지만 믿음은 그것도 극복하는 것이란다. 네 어머니 나를 믿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물론 힘들겠지만 잘 극복하고 이겨 낼 꺼다. 남편 없는 여자는 다 못 산다든? 남편 없이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못사는 것은 아니란다. 네 아내가 나 잘 믿으면 아이 셋 잘 기르면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자식도 마찬가지다. 아비 없다고 못하는 것 아니다. 네 아이들이 나만 잘 믿고 자라 준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어야 문제지 너 죽는다고 문제 될 것 아무 것도 없다.' 저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그날 아주 철저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 없으면 못살고, 남편 없으면 못살고, 아비 없으면 못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로운 일도 아닙니다. 자식과 남편과 아비는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인데 그 나약한 존재가 없으면 못사는 존재가 된다면 그는 당연히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문제없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사람을 참 근사하게 합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당당하게 하며 깨끗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살면 복의 근원이 되는 큰 사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데, 믿음이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시는 까닭은 세상 줄 다 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게 하려 하심 입니다. 모세가 그 훈련을 받았고, 바울이 그 훈련을 받았으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그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를 하게 되어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강북에 있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최종적으로 받음으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아직 35살도 안 되었다는 아들 목사에게 당회장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여러해 전 강남에서 역시 대형교회를 목회하시던 그 목사님의 형님 목사님도 38살 된 아들에게 수 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습케 하시더니 동생도 똑같이 그와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세습은 참 전근대적인 것입니다. 사업도 조그맣게 할 때는 자식에게 물려 줄 수도 아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업이 커져서 주식회사가 되고 여러 주주들의 돈으로 큰 회사를 이루게 되면 사장의 아들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 회사는 개인의 것이니까 아들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어도 되지만, 주식회사는 개인의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장과 회장의 회사가 아니라 주주들의 회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자기 아들이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뒤를 이어 사장을 만들고 회장을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옳지 않은 일입니다. 선진국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선진국일수록 그와 같은 생각, 즉 회사의 주인은 주주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주식을 상속함으로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지만, 무조건 자기 자식을 회장과 사장으로 세워 회사 경영을 대대로 하려고 하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삼성이 혼을 나고, 현대 자동차 회장이 감옥에 들어가 옥고를 치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 하건데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그와 같은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회장이라고, 권력이 있다고, 남보다 좀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 회사를 개인 회사인양 생각하고 운영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둑심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교인들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영수직을 자식에게 대대로 세습케 하려는 것은 말로는 나라가 국민들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라를 자기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에 35살도 안 된 어린 아들에게 수 만 명 교세의 큰 대형교회를 물려주는 그 목사님은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는 김일성을 꼭 빼다 닮았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강남의 대형교회가 아들에게 세습을 할 때 저희 큰 아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아들에게 세습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가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눈이 멀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렇다고 그것을 아무 사양 없이 그냥 받는 아들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잘 만나, 그 덕으로 젊은 나이에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자리에 앉게 되는 황태자들. 사람들은 배 아파하고, 부러워 하지만,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부러워할 일이 못됩니다. 자리는 근사하지만 사람은 별로 근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로 정당한 승부 끝에 얻는 승리의 기쁨이 무엇이지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죽어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성공한 줄로 착각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와 같은 식으로 얻는 자리를 성공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공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성공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공정한 경쟁을 통했다면 그는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마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는 남의 자리와 기회를 도적질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자리와 기회만 도적질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리와 기회를 도적질 한 셈이 되어 문제가 생각보다 커집니다.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되면 그와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한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은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도 옳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에게 절망을 주게 하여 정당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옳지 않은 일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큰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눈이 어두워 자기에게 전혀 맞지도, 옳지도 않은 자리에 덥석 앉아 버린 사람들이 꼭 읽고 교훈을 얻었어야 할 말씀이 저는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저들에게도 아브람에게처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아비의 덕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덕을 볼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덕을 입지 못하게 되면 나약한 자가 되고 진정으로 성공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틀림없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저들도 목사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말씀과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 아는 사람이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훌륭한 아브람의 믿음에 대하여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끈을 붙잡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끈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외치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도 의지하지도 잘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돈을, 권력을 더 의지하여 실제로는 그것으로 자신의 하나님을 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브람처럼 떠나야만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아브람이 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성공한 이유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꼭 가난해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 남편으로, 자식으로 하나님을 삼지 않는다는 것은 꼭 저들과 헤어져 독신으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소극적이다 못해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는 아내와 남편이 함께 살면 참 관계가 좋아집니다. 서로 잡아당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 참 자유 함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입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일 때 부부의 사이와 관계가 제일 좋아집니다. 돈으로 끈을 삼지 않는 사람이 부자가 되면 경제가 좋아집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돈으로 끈을 삼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고 돈으로는 끈을 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난해 지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깨끗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가난해 지는 것이 믿음을 지키기가 쉽습니다. 돈을 끈으로 삼으려고 하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것은 부자인데 돈으로 끈을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으로 끈을 삼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 때문에 세상은 참 힘들어 지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권력을 끈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만을 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면 세상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끈이라고 하여 권력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장난 같지만 권력을 끈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정말 끈이 아니라고 확실히 믿는다면, 그것을 끈으로 잡지 않는다면, 권력의 순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누군가가 깨끗한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아브람은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정말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땅을 떠납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돈과 권력과 사람에 얽매여 그것을 끈으로 알고 자신과 세상을 칭칭 감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브람과 같은 사람을 보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믿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개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의 사람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만 믿고 삽니다. 그래서 깨끗합니다. 그래서 당당합니다. 그래서 근사합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성공합니다. 그래서 승리합니다.
저는 제가 아브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이 아브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혹시 셋 중에 목사가 된다면 막내가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목사만 주의 종이고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가 성직이기 때문에 막내가 목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볼 때 막내는 목사가 되는 것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는 이제껏 패션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생각을 바꾸어 목사가 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저에게 전해 왔습니다. 저는 참 기뻤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정한 막내에게 제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 덕 볼 생각하지 말아라'였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잘 만나서 대형교회의 후계자가 되는 그런 아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아브람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아이가 한동대학교에 입학한 후 다시 재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대학에 다닌 다는 것이 약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선배들이 후배를 이끌어 주는 우리 사회에서 선배가 없는 대학을 졸업하여 이 세상에서 생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수하면 어떻겠냐고 묻는 큰 아이에게 나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뜻으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 보라 말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사흘을 작정하고 기도원에 갔다가 이틀 만에 응답을 받고 기도원을 내려왔습니다. 우리 큰 아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은 이사야 3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 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 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학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아멘. 큰 아이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두 말 않고 한동대로 내려가 졸업을 하였습니다. 제 아이는 그날 선배와 학연이라고 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한동대로 내려가는 아이에게 저는 ‘아버지는 네가 학교와 선배 덕이나 보는 사람이 되는 것 원치 않는다. 학교가 네 덕 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제가 생각해도 참 근사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믿음으로 75세의 나이에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브람이 너무 근사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참 근사하게 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거듭남의 모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은 사람을 근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같은 믿음으로 근사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공하고 승리하고 복을 받아 그 복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