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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박정희와 김재규 인연-박정희를 왜 쏘았는가?200여명의 연예인 성폭행한 박정희?펌글-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4. 10. 7.

박정희와 김재규의 인연-김재규는 박정희를 왜 쏘았는가?.- 200여명의 연예인들을 강간한 박정희?-

 

 

김재규의 '거사' ... 10.26이 전부가 아니었다

[서평] 김재규 평정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정은균 2014.01.12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김재규 평전'이다. <물은 생명이다>로 알려진, 27년 경력의 다큐멘터리 작가 문영심이 썼다. 김재규 장군이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쏜 지 35년이 지났다. 작가 문영심은 김재규를 왜 다시 이야기하는가.

우리에게는 햇빛 아래 끌어내야 할 역사가 많다. 10·26사건과 김재규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그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왜곡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유신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신독재를 끝장낸 김재규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지금 김재규가 누구인지 다시 이유는 유신의 악몽이 우리 머리 위에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15쪽)

유신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헌법의 초안자 김기춘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요지경 세상이다. '긴급조치'가 없어도 대통령은 지엄한 존재라 누가 감히 쓴소리를  못한다. '유신의 악몽'이 '꿈'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김재규와 박정희의 인연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나는 김재규가 5·16 쿠데타 당시부터 박정희 휘하에 있는 줄 알았다. 이 책을 보고서야 그것이 착각인 줄 알았다. 이 책에 따르면, 김재규는 5·16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재규와 박정희의 인연은, 5·16 이후 박정희가 김재규를 불러들여 호남비료사장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김재규의 능력을 믿고 출세 가도로 이끈 사람은 박정희였다.

그런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쏘았나. '조국 근대화의 지도자' 박정희는 허상이었을까. 그랬다. 작가는 박정희가 밀실에서 솜털 보송보송한 갓 스무 살의 처녀를 잡아다가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 처녀가 자신의 두 딸처럼 어느 선량한 국민의 귀한 딸이라는 생각은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행사라는 것이 사실은 술자리와 '대통령의 사적인 유희'를 가리킨다. 대통령의 '행사'는 소행사와 대행사로 나뉜다. 소행사는 대통령과 젊은 여성이 간단한 만찬 겸 술자리를 갖고 나서 잠자리를 갖는 것이고, 대행사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해서 두어 명의 여성을 데리고 술과 여흥을 즐기고, 여흥이 끝나면 대통령이 점찍은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걸로 마무리된다. 이런 행사가 사흘에 한 번, 한 달이면 열 번 가까이 있었다. (52쪽)

박정희의 '채홍사'(조선 연산군 시절, 전국에서 미녀를 모아서 왕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했던 관리-기자 주) 역을 했던 의전과장 박선호는 그렇게 박정희를 거쳐간 여자들이 200여 명이 넘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 소박하고 선량한, 혹은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을 연출하는 데 능숙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막걸리 잔을 든 채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담소하는 모습으로 수백만 표를 긁어모으는 데 재능을 발휘했다. 반면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는 인면수심의 야비한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양면성을 보였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에 일본도를 휘두르며 일본 군가를 부르는 엽기적인 행동도 예사로 했다.(77쪽)

운명의 10월 26일에도 그랬다. 작가에 따르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는 '인자하고 서민적인 대통령'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갔다. 그즈음 박정희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40쪽)

10·26 직전의 한 정보 보고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이 내뱉은 말이다. 박정희는 이 말을 듣고 "얼굴에 희미한 미소"(40쪽)를 지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 있던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40쪽)며 면박을 주었다. 그날 김재규는 집무실에 돌아와 수행비서관 박흥주에게 "귀를 좀 씻어야"(41쪽)겠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박흥주는 1심 재판 중 면회를 온 태윤기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중정에 부임하시고 얼마 안 되어서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한 일, 기구 축소,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 개편,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 퇴직기금을 만든 일 등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근래의 온갖 시국사건에서 국민의 편에서 직언을 많이 하셨습니다. 거의 매일 청와대에 보고를 하시는데 제가 서류를 챙기기 때문에 대충이지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다 거론하기 힘듭니다. 이런 이야기는 밖에서는 알 길이 없겠지요.(189쪽)

기구를 축소하고,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 조직을 개편하는 일은 지금 중정 후신인 국가정보원(국정원)의 남재준 원장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 아닐까. 2013년의 국정원장이 떠올리지도 못할 일을 과감히 행할 줄 알던 사람이 1970년대에 중정부장으로 있었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재규의 '거사'는 1979년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작가는 수감 중 감옥에서 쓴 한 일기에서 김재규가 과거의 '거사'에 대해 고백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72년 유신 직후 3군단장으로 복무할 즈음이었다. 김재규는 대통령이 전방 군단에 시찰을 나오면 영내에 가둬두고 하야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결행하지 못했다. 다른 한 번은 건설부 장관 재직 시절이었다. 권총까지 준비하고 계획을 세웠으나 용기 부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김재규는 유신정권의 핵심 권력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거사를 했는데 내가 집권하면 역시 군사독재가 된다, 나는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작가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정희 측근이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할 기회가 있었지만, 박정희를 본뜬 전두환처럼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작가는 그것이 김재규가 바보여서가 아니라 유신의 핵심 권력자로서 유신을 부정했다는 역설 때문이라고 말한다.

10·26 사건 재판은 제대로 된 재판이 아니었다. 재판 중 재판부와 변호인이 의견 충돌을 빚을 때면 재판부에 수시로 쪽지가 전달되었다고 한다. '쪽지재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쪽지'는, 전두환이 이끌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이 재판부 출입문 바로 앞방의 법무감 집무실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들은 스피커를 통해 법정 재판 내용을 확인한 후 쪽지를 통해 재판부에 대응 방법을 전달했다.

재판 절차가 공정하지 못했으니 결과가 부당하게 나온 것은 당연했다. 10·26 관련자 6명(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대령, 유성옥 경비원, 김태원 경비원, 이기주 경비원 등)에 대한 재판은 시작한 지 16일 만에 선고공판이 이루어졌다. 변호인들이 줄기차게 요청한 공판조서 열람청구, 공판조서에 대한 이의신청, 외부의사 진단신청, 현장검증신청, 수많은 증인신청이 모두 무시된 후 내려진 선고는 전원 사형이었다.

1심 재판부는 선고공판에서 형법에도 없는 '대역죄', '시해' 등의 말을 썼다. 절대왕조 시대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10·26 사건의 반역성을 극대화하려고 한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신의 잔당들인 전두환 무리가 그들의 치부를 하루라도 더 일찍 숨기고 권력을 신속하게 찬탈하기 위해 속히 제거돼야 하는 존재였다. 세계에 유례없는 불공정한 재판이 진행된 이유다.

역사의 '괴물' 박정희가 20여 년 넘게 권좌를 주물럭거린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차지철이나 김기춘과 같이 저돌적이고 머리 좋은 부하들의 보좌 덕분이었을까.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최후의 박정희를 부축한 것은 화장실로 도망친 차지철이 아니라 이른바 '대행사' 진행요원이던 심수봉과 신재순 두 사람이었다. 부하들의 '충성' 덕분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의 탁월한 정치 감각이나 통치술 덕분이었을까.

김재규의 항소심을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는 1980년 1월 21일 자로 '사건일기'를 남겼다. 그 중 한 대목에 '괴물' 박정희의 장기 독재 비결이 잘 나와 있다.

유신독재를 비판하면서 감옥에 들락거리는 국민은 전체 국민의 숫자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실종된 체제 속에서도 저항만 하지 않으면 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심은 가치관이다. 독재가 나쁜 줄은 알지만 5·16 이후부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가치관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질 때 목 놓아 울던 국민들은 박정희가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실종시킨 독재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262쪽)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에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제거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에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 공교로운 우연을, 함세웅 신부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김재규 자신이 언급한 '역사의 심판'이자 '하늘의 심판'인 '제4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작가는,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한다. 더불어 김재규가 승리를 자신한 역사의 제4심은 열리지 않았지만, 죽은 세대의 그림자가 살아 있는 세대의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한 공정한 제4심은 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이 녹록치 않긴 하다. 유신 '괴물'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은 김재규 장군의 명예회복이 아직도 여전히 멀 것임을 말해 준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악행을 변명하기 위해서 김재규를 깎아내리는 사람들 말고 김재규를 가까이에서 만나고 접해본 사람들은 그의 진전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강신옥, 안동일 그리고 부산에서 올라온 노인 같은 사람들이 33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서 아직도 그를 찾아오는 것을 보면 제4심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367쪽)

추천사를 쓴 함세웅 신부의 말마따나, 10·26 의거를 역사적으로 함께 확인하는 그날이야말로 한국이 민주주의가 아름답게 꽃피는 날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왜 김재규를 다시 읽어야 할까

[서평]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안건모 2014.01.05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책이 또 나왔다.

한 권은 2012년 10월에 나온 <의사 김재규>(매직하우스)이고, 한 권은 2013년 10월에 나온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시사IN북)이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1979년 10월 17일부터 1980년 5월 24일까지 김재규가 박정희를 쏴 죽인 뒤 긴박하게 돌아가던 한국 사회를 소설 형식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책이다.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8년 동안 1인 독재로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인물이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를 구성해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대통령이 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심어 놓은 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유신체제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이 모두 박정희에게 집중됐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를 쏴 죽이면서 그 유신체제를 끝장냈다. 그 뒤,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사형당했다.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김재규에게 내란목적살인죄와 내란수괴미수죄를 적용했다. 김재규는 정말로 내란목적살인죄와 내란수괴미수죄를 저질렀을까?

시민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김재규는 독재 정권에서 특권을 누리다가 경호실장 차지철과 충성 경쟁을 벌이다가 우발적으로, 또는 영웅심에서 대통령을 쏴 죽인 인물이었을까. 실제로 내란죄를 저지른 박정희와 전두환이 혹시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시민들은 훗날, 그 당시 시민들의 항쟁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가 아니었더라도 박정희는 금방 무너질 정권이라고 했다. 또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광주 시민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가정을 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 과연 옳을까. 역사를 그렇게 가정해서 만일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부산 마산 시민들이 광주보다 더 많이 희생당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일성만큼이나 종신제로 한국 사회를 통치하지 않았을까. 책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김재규를 재조명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 박정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한다. 김재규는, 만일 그때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댔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 당시 박정희가 한 말을 보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4·19 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그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안 그래?"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이 말에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그 말에 한술 더 뜬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들을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용기가 없을 뿐이지 누구라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건 뻔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김재규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독재와 인권 탄압에 맞섰던 천주교 신자 가운데 함세웅 신부가 있었다. 저녁 미사가 끝나고 나서 청년 신도들이 준비한 다과회를 겸한 만찬회가 있었던 날, 그 자리에서 재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10·26 사건과 김재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당시 가톨릭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이 열을 올리면서 말했던 이야기는 내 생각과 비슷했다.

"중앙정보부장이 유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대통령을 쏘았다는 걸 쉽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중앙정보부방이면 완전히 박통하고 똑같은 인간일 텐데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학생들이나 민주 인사들을 얼마나 많이 잡아넣었다고요."

함세웅 신부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책에서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아,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박정희가 죽은 뒤 전두환은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유신의 수혜자였던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김재규를 사형시키는 데 집착한다. 5월 24일 김재규는 사형당했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함세웅 신부는 오히려 "우리가 만일 김재규 장군을 살렸다면 광주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전두환은 훗날 1995년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김재규는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을 당했고 그들은 풀려났다.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나 허술한지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런 진정한(?) 죄인들을 단죄하지 못했던 그런 역사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이들이 이 나라 대통령까지 해먹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우리가 왜 김재규를 다시 읽어야 할까. 함세웅 신부는 "유신의 괴물이 되살아나는 이 어두운 현실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이 깊은 사색과 용기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근혜와 그 하수인들은 그런 역사를 까마득히 잊고 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를 좇아 여론 조작으로 당선된 박근혜가 노동자들을 억누르면서 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을 보면 박정희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다.

요즘 조작된 내란죄 음모로 구속된 이석기, '대통령 사퇴하라'고 주장하는 장하나, '박정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한 양승조 의원을 제명하려는 정권은 박정희가 김영삼을 제명할 때보다 더욱 악랄하다. 게다가 민영화를 저지하려는 정당한 철도 파업을 불법 파업으로 매도하면서 노동자의 심장부 민주노총을 무지막지하게 침탈했다. 그 과정은 YH여공 농성장을 침탈할 때와 닮았다. 그 사건은 부마항쟁을 불러일으켰고,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는 서곡이 됐다.

정권의 하수인들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런 비슷한 말에 유난을 떤다. 지난 12월 10일 민주당 양승조 최고위원이 "신공안통치와 신유신통치로 박정희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국민적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더니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언어 살인과 같다"고 하고 발끈했다. 그 발언을 두고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트위터 (@unheim)에서 쏴 붙였다.
"그럼 박정희 정권의 전철을 밟으시라."

박근혜여, 전철을 밟으라. 또 다른 김재규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민중들일 터이니.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쏜 다섯가지 목적

[서평] <김재규 평전-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임윤수 2013.11.11

 

 

우리나라 근대사에는 두 번의 10·26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10·26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0·26이며, 두 번째 10·26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사살한 197년 10월 26일 10·26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지만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자기희생이며, 목숨을 던져 실천한 숭고한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10·26, 거침없이 내딛고 있던 유신 독재를 멈추게 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할 근대사의 오류입니다.

두 번째 10·26, 김재규를 역사적으로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우리는 현직 중앙정보부장, 심복 중의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박정희에게 왜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지은이 문영심, 펴낸곳 (주)참언론 시사IN북)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목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총으로 흥한 자 총으로 망하는 게 진리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부하의 총부리 앞에서 비참히 고꾸라지는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박정희는 유신으로 영구 독재를 꿈꾸고, 독재의 칼날만을 휘두른 게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권력과 돈으로 여성의 성을 능멸했습니다. 때로는 딸보다도 어린 여성들까지도 잠자리에 들였습니다. 안가에 끌려간 여성들이 박정희와 함께한 잠자리는 권력으로 자행한 성폭력이며 독재자에게 당한 성 매수입니다. 

대통령의 '행사'는 소행사와 대행사로 나뉜다. 소행사는 대통령과 젊은 여성이 간단한 만찬 겸 술자리를 갖고 나서 잠자리를 하는 것이고, 대행사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해서 두어 명의 여성을 데리고 술과 여흥을 즐기고, 여흥이 끝나면 대통령이 점찍은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걸로 마무리된다. 이런 행사가 사흘에 한 번, 한 달이면 열 번 가까이 있었다. - 본문 52쪽

박선호 "네.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면 서울시민이 깜짝 놀랄 것이고, 여기에는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밝히면 시끄럽고, 그와 같은 진행 과정을 알게 되면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나오는데, 이것을……" - 본문 270쪽

김재규는 박정희와 동향이자 육사 동기입니다. 박정희 주변 인물들 중 최측근 중의 최측근입니다. 누리고 행사할 수 있는 권력도 막강했습니다. 김재규는 망나니놀음 같은 권력에 편승하지 않고 점차 강경해지는 정국을 풀고, 좀 더 부드러운 정치를 펴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권력에 도취한 박정희는 그 도덕성이 점점 파렴치해졌습니다. 독재를 옹립하기 위한 폭력은 점차 망나니처럼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은 캘린더가 새로 나오면 캘린더에 나오는 여자모델들을 구경시키고 박정희는 골랐습니다. 그러면 그날 당장 여자를 잠자리에 들여야 했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차지철의 추임새를 즐기면서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선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걸 공공연히 말하곤 했습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박정희가 자행하는 만행을 김재규는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재규는 스스로의 몸을 던져 유신의 뿌리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몇 번이나 기회를 엿보던 김재규가 드디어 유신의 원흉인 박정희의 숨통을 끊어 놓으니 그게 바로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발발한 두 번째 10·26입니다.

김재규가 품었던 혁명 다섯 가지 목적은 박정희를 죽어야 했던 이유

책에서는 10·26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밑그림으로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이유, 김재규가 역사적으로 다시 평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재판 과정의 기록 등을 통해 보다 실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둘째, 보다 많은 희생을 방지, 셋째, 적화방지, 넷째,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은 10·26 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해결이 보장되었습니다. - 본문 242쪽

김재규는 법정 진술에서 박정희를 제거하고자 했던 목적을 다섯 가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질식 직전에 놓인 우리나라, 수백 수천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이자 항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유신의 심장은 제거했지만 김재규가 꿈꾸던 자유민주주의는 다시금 총을 들고 나선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됩니다. 그 과정, 김재규를 재판하는 과정에 법무사(군검찰)에서 보인 대한민국 사법질서야 말로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 보이는 개들의 몸짓이며 영혼 없이 으르렁거리는 꼭두각시놀음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사회, 자유민주주의에서 검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합니다. 요즘 어느 주요 일간지에서는 검찰을 '견(犬)찰'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검찰을 견찰이라고 해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려지는 게 요즘 우리나라 일부 검사들이 그려내는 실상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건 잘못되거나 불행했던 역사가 반복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먼 후일 세 번째의 10·26으로 명명되는 어떤 원인과 불행한 결과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김재규가 총을 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권력에만 아부하는 사법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비겁하고, 폭력적이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권력에 의해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김재규가 꿈꾸던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면 10·26이란 상흔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다시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살다간 김재규, 바람이 되어 꽃을 피우려했던 김재규 평전을 읽는 내내 '자식 팔자 부모 팔자 닮고', '딸 팔자 친정엄마 팔자 닮는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자식 팔자 부모 팔자 닮는다'는 말이 말짱 허망한 말이라는 걸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인자하 만인지상'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나

[서평] 김재규 평전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정태승 2013.10.2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사람이 같이 못 박힌 거 알고 있지? 둘 다 도둑질에 살인을 범한 중죄인이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잘못을 뉘우쳐서 구원을 받았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정의를 행한 사람에게 과거의 잘못을 가지고 그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옳지 않아. 안 그런가?"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서

가톨릭 대학의 한 학생이 '김재규가 박통과 똑같은 인물인데 유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10·26사건을 일으켰을 리가 있느냐'는 의견에 대한 함세웅 신부의 말이다. 그의 의견은 계속된다.

"실제로 자네들이나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행할 용기가 있었을까? (중략) 그가 박정희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 경우에 박정희를 쏜다는 행위는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보네."

 

10·26과 관련한 서적들이 꽤 있다. 대부분 이야기의 핵심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의 의견을 따라 선택한 육본 대신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다면 시국은 어떻게 변해갔을까 하는 데 있다. 순간의 선택으로 김재규가 어설픈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달 25일 출간된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다르다. 그간 묻혀 있던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에게 천착한다. 독자들에게 33년 만에 그들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일단 이 책에서는 그들, 10·26 직후 군인들에 의한 재판으로 사형된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이 주인공이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던 김재규,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다. 더구나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면서 한 고향 선후배지간이다. 누가 봐도 김재규의 거사는 석연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서열 다툼, 박정희 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저평가 등에 감정을 품은 우발적 살인 사건'이라는 당시 세간의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이 깊이 생각하기에는 그 사건의 시작과 끝이 너무 돌발적이었고 짧았으며 갑작스러웠다.

저자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현장을 잠행하고 와서 기억하는 차지철과 박정희의 대화를 인용한다.

"만약 4·19 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대통령의 말을 경호실장이 받는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이들의 대화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김재규가 그들과 한통속이었다면, 1980년 일어난 5·18 광주항쟁은 더욱 큰 규모로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저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인사들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그의 부하 박선호는 의전 담당이다. 해병대 출신 장교다운 임무를 수행하고 싶었으나 그의 임무는 불행하게도 대통령의 사적 유희를 위한 이른바 '소행사'와 '대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다. 행사 준비로 연예인을 데리고 가기 위해 만났던 감독으로부터 '채홍사'라는 말까지 듣고 자괴감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존경하는 김재규를 떠날 수 없어서 또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생계를 위해서라도 사표를 던질 수 없었다.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은 '군에 있을 때나 군복을 벗고 공직에 있을 때나 늘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는 존경스러운 상관' 김재규를 잠시도 떠날 수 없었다. 이들 둘은 거사 당일 바로 직전에 명령을 받고서도 지체없이 김재규를 엄호한다.

이야기 속 김재규는 10·26 거사의 이유를 세 가지 들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유신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즉, 박정희와 차지철의 국민에 대한 태도에 회의를 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박정희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립요정인 이른바, '궁정동 안가'를 만들어 놓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사흘이 멀다 하고 젊은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 그 수는 도합 이백여 명이 넘는다. 셋째, 자식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처신에 대해 대통령은 지나치게 싸고돌았다.

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 자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이 유신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니 권력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유신의 심장을 제거하고 난 후를 위한 어떤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민이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고, 평소 인권문제로 박정희에게 비판적이었던 미국도 자신의 행위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김재규의 예상은 빗나갔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서거에 국민들은 애도를 표했고, 미국은 방관하고 있었으며,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특별 사면이 이루어지는 등 새 세상이 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과 군 사조직 하나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권력을 그대로 인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육군사관학교를 추동하여 5·16 지지시위를 성사시킴으로써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그로부터 18년 후 10·26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 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김재규와 달리 전두환은 정권을 잡기 위해 애초부터 하나회와 같은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12사태 직후 전두환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 나를 믿으라. 우리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언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5·16군사쿠데타 직후 김종필이 당시 주한 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에게 한 말과 같다.

전두환의 12·12사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의 매뉴얼을 그대로 사용한다. 김재규의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이 유신의 손과 발이 되어 유신체제를 연장하며 역사를 후퇴시키고 말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자신이 모시던 각하 박정희를 저격했다. 유신정권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1972년 3군단장 시절 유신헌법을 꼼꼼히 살펴보던 김재규는 '이 헌법은 국민을 위한 헌법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을 위한 헌법'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1974년 건설교통부 장관 취임 때 대통령을 저격하고 자신도 자살할 생각이었다고도 했다.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인 소의(少義)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따랐다고도 했다.

김재규의 거사로부터 정확히 70년 전 1907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있었다. 이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끝까지 저격의 정당성에 추호의 의심이나 후회의 맘을 품지 않았던 김재규의 최후 진술에서 느껴지는 진실성 때문인 듯하다.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4심, 즉 역사의 재판'이 시작되어야 할 이유다.

"스스로 나를 변호하라고 하면 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할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이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10·26 혁명은 의미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김재규 평전)ㅣ문영심 지음ㅣ시사IN북

 

 

10.26 34주년을 앞두고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가 나왔다. 그동안 10.26과 관련한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김재규와 10?26에 대해 철저하게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강신옥·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경기대학교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들의 토대 위에 있다.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26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타리를 써왔으며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 문영심은 그녀의 이력에 걸맞게 이 책에서 다큐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해냈다. 그녀의 책 속에서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은 인간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그동안 밥을 벌려고 방송작가로서 일하는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유신 말기에 청춘을 보낸 작가는 이 책을 쓰는 1년여 동안 매일처럼 유신의 악몽에 가위 눌려야 했다.
김재규. 1976년 12월4일부터 1979년 10월26일까지 34개월 동안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사람. 그는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해 살해하고 1980년 5월2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심장을 쏴버린 박정희의 오른팔. 유신을 허물어 버린 유신의 핵심.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 일을 저지른 사람. 모순으로 가득한 그의 행동 탓에 그동안 그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구구한 억측과 오해가 뒤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이처럼 혼란스런 그의 언행을 따라가면서 떠올린 핵심 단어는 ‘역설’이다.
대한민국 권부에 총성이 울린 것은 세 번이었다. 박정희가 나라를 지키라는 군대를 이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쳐들어와 초병을 죽이고 5·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 맨 처음이다. 그 박정희를 김재규가 총으로 쏘아 살해한 사건이 10·26이다. 그 뒤 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일파가 다시 군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12·12 쿠데타이다.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내란죄다. 그러나 김재규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인 흔적도 없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거사를 했는데 내가 집권하면 역시 군사독재가 되기 때문에 나는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노태우는 나중에 내란죄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과 12년형을 받았지만 사면됐다. 박정희는 기소조차 되지 않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내란죄를 저지르지 않은 김재규만 사형당했다. 김재규는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도 못 되고 내란죄로 처형된 셈이다. 김재규 사건 자체가 우리 역사의 모순이며 역설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전두환의 합수부가 주도한 군사법정이 의도한 대로 김재규가 단순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받아들이게 된 데서 우리 현대사가 일그러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세력이나 정치인조차 김재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폄하했다. 혹시라도 그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할까 두려워해 탄원서에 서명하는 것조차 꺼렸다. 당시 모두가 그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방치하고 말아 신군부가 다시 등장할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저자는 의심한다. 김재규가 민간법정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면, 김재규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을 자유로운 언론이 국민에게 알렸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피를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여기게 되지 않았을까. 저자가 새삼스럽게 10·26을 끄집어내 햇빛 아래 말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김재규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으로 전쟁터처럼 변한 부산 시내를 암행했을 때 우연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던 사람이다. 그는 작가에게 그 날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중에 신문을 보고 자기가 만난 사람이 김재규란 걸 알고 언젠가 시간을 내 고인에게 인사나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뒤늦게나마 고인의 빈소를 찾게 됐다고 작가에게 털어놓았다. 30여 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도 당시 김재규의 절박함과 고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각인됐던 것이다.
김재규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김재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도 당연히 처음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식하며 당혹스러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마치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연인을 그리듯 고인의 묘를 찾는다. 거사 30분 전에야 겨우 김재규의 뜻을 전해들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군부의 갖은 유혹과 협박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김재규를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단순히 김재규의 인품이 고결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작가는 당시 그들은 박정희가 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밖에 없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채홍사로 삼아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대생들을 강제로 끌어다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며 부마사태를 “야당의 사주를 받은 ‘뽀이’들이 저지르는 난동”쯤으로 받아들였던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 이 책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야수이자 괴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준다. 저자는 김재규를 둘러싼 이 같은 역설과 모순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는 한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 4심, 즉 정당한 문민의 재판은 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근혜 시대, 다시 김재규를 읽는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항쟁의 동지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김재규 장군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유신의 괴물이 되살아나는 이 어두운 현실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이 깊은 사색과 용기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재규 장군의 10·26의거를 역사적으로 함께 확인하는 그날이 바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름답게 꽃피는 날입니다. -함세웅 신부

군부 정권은 물론이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에도 김재규 장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금 김재규 장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삼문 같은 사육신도 250년이 지난 후에야 충신으로 인정받은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면 김재규 장군도 반드시 역사의 재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 책은 그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강신옥 변호사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문영심 지음.시사IN북. 368쪽. 1만5천원) [연합뉴스] 2013.10.18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김재규에 대한 평전이다. 10·26 사건 34주년을 앞두고 출간됐다. 이 책은 강신옥, 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부하가 남긴 이야기, 김재홍 경기대 교수가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을 토대로 했다. 27년간 TV 다큐멘터리를 써왔으며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유신체제의 막을 내린 김재규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시킨 것 자체가 우리 역사의 모순이며 역설이라고 말한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사IN] 2013.10.21

 

 

김재규와 10ㆍ26에 대한 제4심 역사의 평가는 이제 시작이다10ㆍ26 34주년을 앞두고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가 나왔다. 그동안 10ㆍ26과 관련한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김재규와 10ㆍ26에 대해 철저하게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강신옥ㆍ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 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ㆍ박선 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경기대학교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들의 토대 위에 있다.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ㆍ26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써왔으며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 문영심은 그녀의 이력에 걸맞게 이 책에서 다큐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해냈다. 그녀의 책 속에서 김재규와 그 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 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그동안 밥을 벌려고 방송작가로서 일하는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유신 말기 에 청춘을 보낸 작가는 이 책을 쓰는 1년여 동안 매일처럼 유신의 악몽에 가위 눌려야 했다.

김재규. 1976년 12월4일부터 1979년 10월26일까지 34개월 동안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었 던 사람. 그는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해 살해하고 1980년 5월24일 교수형으 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심장을 쏴버린 박정희의 오른팔. 유신을 허물어 버린 유신의 핵 심.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 일을 저지 른 사람. 모순으로 가득한 그의 행동 탓에 그동안 그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구구한 억측과 오 해가 뒤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이처럼 혼란스런 그의 언행을 따라가면서 떠올린 핵심 단어는 '역설'이다.

 

대한민국 권부에 총성이 울린 것은 세 번이었다. 박정희가 나라를 지키라는 군대를 이끌고 한 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쳐들어와 초병을 죽이고 5ㆍ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 맨 처음이다. 그 박정희를 김재규가 총으로 쏘아 살해한 사건이 10ㆍ26이다. 그 뒤 전두환ㆍ노 태우 일파가 다시 군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12ㆍ12 쿠데타이다.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 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쿠 데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내란죄다. 그러나 김재규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 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인 흔적도 없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거 사를 했는데 내가 집권하면 역시 군사독재가 되기 때문에 나는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 했다. 전두환ㆍ노태우는 나중에 내란죄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과 12년형을 받았지만 사면됐다. 박정희는 기소조차 되지 않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내란죄를 저지르지 않은 김재규만 사형 당했다. 김재규는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도 못 되고 내란죄로 처형된 셈이다. 김재규 사건 자체가 우리 역사의 모순이며 역설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전두환의 합수부가 주도한 군사법정이 의도한 대로 김재규가 단순히 민주 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받아들이게 된 데서 우리 현대사가 일 그러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세력이나 정치인조차 김재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폄하했다. 혹시라도 그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할까 두 려워해 탄원서에 서명하는 것조차 꺼렸다. 당시 모두가 그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방치해 신군부가 다시 등장할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저자는 의심한다. 김재 규가 민간법정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면, 김재규가 말하고 싶었던 진 실을 자유로운 언론이 국민에게 알렸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권 력을 움켜쥐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피를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여기게 되지 않았을까. 저자가 새삼스럽게 10ㆍ26을 끄집어내 햇빛 아래 말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김재규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으로 전 쟁터처럼 변한 부산 시내를 암행했을 때 우연히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는 작가 에게 그 날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얼마나 발 을 동동 굴렀는지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중에 신문을 보고 자기가 만난 사람이 김재규 란 사실을 알고 고인에게 인사나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뒤늦게나마 고인의 빈소를 찾게 됐다고 작가에게 털어놓았다. 30여 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도 당시 김재규의 절박함과 고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각인됐던 것이다.

 

김재규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김재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도 당연히 처음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 시큰 둥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식하며 당혹스러 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마치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연인을 그리듯 고인의 묘를 찾는다. 거사 30분 전에야 겨우 김재규의 뜻을 전해들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군부의 갖 은 유혹과 협박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김재규를 비난하지 않고 묵묵 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단순히 김재규의 인품이 고결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작가는 당시 그들은 박정희가 왜 제 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밖에 없었음을 이해했기 때 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채홍사로 삼아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대생들을 강제로 끌어다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며 부마사태를 "야당의 사주를 받은 '뽀이'들이 저지르는 난동"쯤으로 받아들였던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 이 책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야수이자 괴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준다. 저자는 김재규를 둘러싼 이 같 은 역설과 모순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는 한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 4심, 즉 정당한 문민 의 재판이 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근혜 시대, 다시 김재규를 읽는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항쟁의 동지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김재규 장군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유신의 괴물이 되살아나는 이 어두운 현실 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이 깊은 사색과 용기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 다. 김재규 장군의 10ㆍ26 의거를 역사적으로 함께 확인하는 그날이 바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름답게 꽃피는 날입니다.- 함세웅 신부 추천사 중에서

 

군부 정권은 물론이고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 정권 때에도 김재규 장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 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금 김재규 장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삼문 같은 사육신도 250년이 지난 후에야 충신으 로 인정받은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면 김재규 장군도 반드시 역사의 재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강신옥 변호사 추천사 중에서

 

 우리에게는 햇빛 아래 끌어내야 할 역사가 많습니다. 10ㆍ26 사건과 김재규를 이야기하는 것 도 그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왜곡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유신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신독재를 끝장낸 김재규 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습니다. 지금 김재규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이유는 유신의 악몽이 우리 머리 위에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영심 작가

 

 

 

 

정당한 문민 재판을 희망하는,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민중의소리] 2013.10.23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10.26사건 34주년을 앞두고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가 출간됐다.

이 책의 저자 문영심은 김재규와 10.26사건에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했다. 강신옥·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26사건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면 저자는 김재규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으로 전쟁터처럼 변한 부산 시내를 암행했을 때 우연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던 사람이다. 그는 작가에게 그 날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는 나중에 신문을 보고 자기가 만난 사람이 김재규란 걸 알고 언젠가 시간을 내 고인에게 인사나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뒤늦게나마 고인의 빈소를 찾게 됐다고 작가에게 털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김재규를 직접 만나본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김재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도 그렇다. 처음 그는 김재규를 변호하는 데 시큰둥했다. 하지만 김재규를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식하며 당혹스러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마치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연인을 그리듯 고인의 묘를 찾는다. 거사 30분 전에야 겨우 김재규의 뜻을 전해들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군부의 갖은 유혹과 협박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김재규를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저자는 당시 그들은 박정희가 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채홍사로 삼아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대생들을 강제로 끌어다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면서 부마사태를 '야당의 사주를 받은 뽀이들이 저지르는 난동'쯤으로 받아들였던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 이 책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야수이자 괴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준다.

저자는 김재규의 흔적을 따라다니면서 떠올린 핵심 단어는 역설이다. 이 책에 따르면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성립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내란죄다. 그러나 박정희는 국립묘지에 묻혔고, 전두환·노태우는 사면됐다. 하지만 김재규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인 흔적도 없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자신이 집권하면 다시 군사독재가 되기 때문에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김재규는 내란죄로 처형됐다. 대통령이 되지 않아서다. 저자는 이런 점을 들어 김재규 사건은 우리 역사의 모순이자 역설이라고 말한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한겨레] 2013.10.27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나? 27년간 다큐멘터리를 쓴 방송작가 문영심이 다큐멘터리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시킨 김재규 평전. 변호사들의 자료와 기억,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최초의 10·26 정사. /시사IN북·1만5000원.

 

 

그해 10월의 총성 '그것이 알고 싶었다' [시사IN] 2013.10.31

 

 

시작이 독특하다. 어쩌면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남자에게 적합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다큐멘터리 작가 문영심씨는 김재규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 평전을 썼다. 그가 부산의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위험에 빠진 아이를 도운 일화나 건설교통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려고 했던 장면들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빨리 읽힌다. '김재규란 이런 남자였구나' 하면서 따라 읽다 보면 어느덧 그의 총구가 박정희를 겨냥하는 부분을 읽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법정 공방에서는 집중하며 천천히 읽게 되는데 그의 인간적 고뇌와 함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사이사이 박선호ㆍ박흥주 등 그를 따랐던 부관들의 인간됨도 꼼꼼히 짚어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김재규 평전을 쓰기에는 가장 좋지 않은 시기에 평전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인데 그 '동기'와 '결과'에 대한 해석이 납득이 안 되었다. 나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분석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저격 후의 행동인데 그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라고 말했다.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치밀한'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를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박정희가 죽어야 했던 이유에 주목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박정희가 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 했던 박정희를 김재규가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이 필연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집필 위해 법정 기록 등 방대한 자료 살펴

평전 집필을 위해 방대한 자료를 살폈던 작가는 "재판 당시 변호인들의 인터뷰를 비롯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는데 잘못된 정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떤 자료를 배제할지를 더 고민했다"라고 토로했다. 작가는 배제한 자료로 세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당시 언론 보도다. 그 다음은 전두환의 기록이다. 마지막은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기록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김재규에 대한 정보를 왜곡했다고 보이는 기록은 과감히 무시했다.

저자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그가 남긴 업적으로 △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한 일 △기구를 축소한 일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한 일 △부장 판공비를 직원들 퇴직기금으로 만든 일 등을 꼽았다. 낯익다. 야당과 시민단체가 남재준 현 국정원장에게 요구하는 것들과 비슷하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김재규가 평소 자주 인용하던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을 언급하며 힌트를 준다. '이치에 어긋난 것은 이치를 이기지 못하고, 이치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권세는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권세와 법에 의지하는 정치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불교신문] 2013.11.06

 

 

김재규와 10.26에 대한 제4심을 그린 책. 10.26 34주년을 앞두고 나온 김재규 평전은 강신옥.안동일 등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이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경기대 김재홍 교수의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등 방대한 자료들이 책의 토대이다.

 

텔레비전 다큐멘타리 작가인 저자는 책에서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에 대해 인간의 체취를 풍기도록 생생하게 그려냈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방송작가로서 일한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어 책을 썼다”면서 “책을 통해 유신의 악몽과 다시 맞서왔다”고 밝혔다.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폴리뉴스] 2013.11.20

 


그동안 10ㆍ26과 관련한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김재규와 10ㆍ26에 대해 철저하게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강신옥·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경기대학교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들의 토대 위에 있다.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26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타리를 써왔으며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 문영심은 그녀의 이력에 걸맞게 이 책에서 다큐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해냈다. 그녀의 책 속에서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은 인간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그동안 밥을 벌려고방송작가로서 일하는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죽기 전날, 박근혜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시사IN] 2013.12.23

 

 

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뒤 가장 바빴던 인물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다. 박정희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그는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을 소집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법적 수사권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 상황임을 앞세워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찬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무주공산이 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는 착착 진행됐다. 다시 법을 무시하고 민간인인 김재규를 군사법정에 세운 합수부는 막후에서 10ㆍ26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패한 측근이 저지른 사적 범죄'로 몰아갔다. 누가 김재규 재판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결정된다고 정치군인들은 판단한 듯하다.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10ㆍ26이 절대로 박정희의 반민주 폭정에 대한 응징이어서는 안 되었다. 합수부는 집요하게 가족을 협박해 12ㆍ12 군사반란 전날 사선변호인단을 물리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펴낸 작가 문영심에게 최근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 부부(김정숙ㆍ김양환씨)가 연락을 해왔다. 이제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다고 했다. 김재규 유족이 입을 연 것은 10ㆍ26 이후 처음이다.

문영심(문):1979년 12월11일 김재규 장군(당시 변호인단과 문 작가는 김재규를 '장군'이라 불렀다. 김재규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이 사선변호인단을 물리쳤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

김양환(양):10ㆍ26 직후 합수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정권이 무주공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재규의 친동생인 항규씨가 합수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항규씨를 내보내면서 가족이 변호사를 전부 사퇴시키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최종적으로 형님(김재규)을 면회했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문:사선변호인단을 물리친 다음 날 12ㆍ12 사태가 일어났다.

양:전두환 같은 사람들이 청와대 언저리 군인이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빨리 알아채고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그 전부터 계획을 세운 건 아닌 듯하다.

문:김 장군은 군 경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정치군인에 대한 우려를 들은 적 있나?

양:평소 자기가 죽으면 군복을 입혀 입관해달라고 했을 정도로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컸다. 국회의원도, 장관도 했지만 그걸 본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다. 전두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 전두환은 당시 계급이 낮았다. 그땐 상대가 아니었다.

"최태민 목사 문제가 갈등 부추겨"

문:가족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들었다.

양:봉건사회나 왕정도 아닌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김영희 여사(김재규 부인)는 합수부에 끌려가서 오랜 시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겪어 심신이 쇠약해졌다. 상당 기간 사회생활을 못했다. 지금도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입을 다물고 있다. 동생 항규씨는 집과 회사를 몰수당했다.

문:김재규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

양:밖에서는 차지철과의 문제를 많이 거론하는데, 최태민 사건도 컸다. 여러 곳에서 최 목사에 대한 정보가 올라와 이걸 종합해서 보고하면 그 자리에서 딸 박근혜를 불러와 대질신문하듯이 물어봤다고 한다. 이때 매번 딸의 말을 믿었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쪽(김재규)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

문:김재규 장군 추모비 비문 가운데 '장군'과 '의사' 글씨가 훼손됐던데.

양:광주ㆍ전남 송죽회에서 직접 만들어서 세웠다. 송죽회 멤버 중에 시인이신 분이 추모사를 썼고, 석공이신 분이 밤마다 담요 뒤집어쓰고 돌을 쪼개 만들었다. 어느 날 묘비에 가보니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에서 '의사'와 '장군' 글씨가 파여 있더라. 송죽회 총무가 "(훼손된) 그 자체가 기념이고 역사다. 고칠 필요가 없다. 훗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

문:2004년 5월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장군에 대한 명예 회복이 될 거라 기대했다가 결국 결정이 유보되었다고 들었다.

양:당시에 나는 몰랐는데, 함세웅 신부가 쓴 <껍데기는 가라>를 읽고 나중에 알았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함 신부가 가족에게 말해서 서둘러 신청을 취하했다. 한 번 기각당하면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다시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게 함 신부의 얘기였다.

문:전태일 열사 같은 경우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전 열사 몫까지 사회활동을 하셨다. 그런데 김재규 장군 댁은 우리 사회에서 상류층이라 잃을 게 많아서 그동안 나서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양:그런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합수부에서 그만큼 모질게 당했다는 얘기도 된다. 이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문:김정숙 여사는 언제 김재규 장군을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김정숙(숙):사형 전날. 5월23일이었다. 합수부에서 오전 오후로 나눠 가족들을 불렀다. 그다음 날 사형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문:대법원 판결이 난 지 불과 사흘 만이었다.

숙:그때 오빠가 "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대통령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라"라고 말했다. 다음 날 수행비서가 "가셨습니다"라고 전화를 했다. 내가 우니까 어머니께서 "울지 마라. 효자는 불충이 없다. 네 오빠는 충신으로 죽었다"라고 하셨다.

양:처음에는 유가족끼리 상의해 함께 사형당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다. (김재규) 본인이 자신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머지 사람들을 묻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유가족들이 얘기하는 걸 옆에서 듣고 있던 수사관들이 바로 보고하자 위에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결국 경기도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문:김 장군과 관련해 생각나는 일이 있나?

양:어느 날 나한테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더라. 나는 "이 정권에 핵심 멤버로 참여하셨으니 발을 뺄 수 없다면 형님도 언젠가 책임을 지셔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심각하게 '김 서방 니도 그리 생각하나'라고 되물었다. 처음부터 유신에 문제가 있다는 걸 분명히 얘기했던 분이다.

문:여동생을 많이 챙겼다고 하는데, 그날도 박 전 대통령이 여자들 불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오빠가 힘들었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숙:그런 고민을 많이 하셨다. 어떤 때 "오빠, 그런 소문이 있던데"라면서 슬며시 물으면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 있는 사람이 그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라고 하셨다.

"살려준다 해도 자결할 작정"이라고 했다

문:김재규 장군도 대법원 판사 중에 소수 의견이 있었다는 얘길 듣고 위안 삼으셨다던데.

양:그렇다. 대법관으로서 소수 의견을 냈을 때 다가올 일을 예측 못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라고 얘기한 걸 보면 그분들도 대단하다. 당시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같은 분들도 역사에 기억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제로 옷을 벗어야 했던 분도 있다고 들었다.

문:지금도 10ㆍ26에 관한 많은 억측이 떠돈다. 가족 입장에서 정리해보신 적 있나?

양:처음부터 세력화ㆍ조직화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조직을 안 갖추고, 중앙정보부로 방향을 틀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하는 건 맞지 않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자기가 정리해놓으면 반드시 국민과 야당이 복원할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 문 작가가 쓰신 책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러 연락을 드렸다.

문:왜 오빠가 평소 가까웠던 박 대통령을 총으로 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나?

숙:측근인 자기가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끝까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마라. 나는 가는 게 마땅하다. 만약에 나를 살려준다 하더라도 일이 해결되면 자결할 작정이다"라고 하셨다.

박근혜 시대, 다시 김재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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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여인들'을 성역으로 만든 재판부

[주장] 칼럼 사진 올린 시민들, 유죄 ... 직접 허위 여부입증하라니 / 정은균 2014.02.11

 

 

지난 18대 대선 전인 2012년, 두 사람이 칼럼 한 편을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한 사람은 인터넷 트위터의 '트윗픽'을, 다른 한 사람은 포털 다음 아고라의 '아고라 즐보드 직찍·제보'란을 활용했다. 칼럼은 그들이 직접 쓴 게 아니었다. 전직 기자 출신의 재미교포 언론인이 현지 언론(<한겨레저널>)에 올린 글이었다.

두 사람은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인 고창규씨와 박정규씨였다. 그들이 인터넷에 올린 칼럼은 재미 언론인 김현철씨가 썼다. 그는 현대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유명한 김영랑 시인의 아들이라고 한다.

어떤 칼럼이었을까. 충격적이게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생활(?) 중 부도덕한 여자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 상대이자 칼럼의 주인공인 사람은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였다.

구체적으로는 예의 여배우가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갖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던 중, "청와대의 채홍사(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침)"를 통해 궁정동 안가로 불려가 박 전 대통령의 '성노예'가 됐다가 한 달여 후쯤 권력의 강압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당한 뒤 미국으로 보내져 현지의 육십 넘은 노인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칼럼 내용과 마찬가지로 제목도 놀랍기만 하다. 바로 <박정희 승은 입은 200여 여인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칼럼의 필자는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 상대인 그 여배우와 직접 인터뷰를 하는 등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박정희 승은 입은 200여 명의 여인들

박 전 대통령의 '승은(承恩)'의 주인공인 200여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나온 게 아니다. <물은 생명이다>로 유명한 다큐 작가 문영심의 최근작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을 총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중정부장)의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아래 <바람 없는>)가 그것이다. 이 책 52쪽에는 박 전 대통령이 궁정동 밀실에서 여인들을 만나는 '행사' 이야기가 무미건조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 행사라는 것이 사실은 술자리와 '대통령의 사적인 유희'를 가리킨다. 대통령의 '행사'는 소행사와 대행사로 나뉜다. 소행사는 대통령과 젊은 여성이 간단한 만찬 겸 술자리를 갖고 나서 잠자리를 갖는 것이고, 대행사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해서 두어 명의 여성을 데리고 술과 여흥을 즐기고, 여흥이 끝나면 대통령이 점찍은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걸로 마무리된다. 이런 행사가 사흘에 한 번, 한 달이면 열 번 가까이 있었다. (<바람 없는>, 52쪽)

박 전 대통령의 '행사'를 위한 '채홍사'는 청와대 의전과장 박선호가 맡았다. 박 전 과장은 10·26 관련 재판 중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박 전 과장의 말을 빌려 박정희가 건드린 여자들이 상당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박 전 과장은 재직 당시만도 100여 명의 여자들을 섭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들까지 합치면 2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행사'는 1주일에 한두 번씩 열렸다. 100명이니 200명이니 하는 말이 단지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김현철씨가 쓴 문제의 칼럼은 바로 그 200여 명의 여자들 중 '한 명'(칼럼에는 실명이 밝혀져 있지 않다)으로 보이는 영화배우를 중심으로 쓰였다. 2013년 8월 27일 자 <주간경향>(1040호)에 실린 기사(<'허위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한 재판>)에 따르면, 김씨는 칼럼 내용의 사실 여부를 물는 <주간경향> 기자에게 이메일을 통해 "내가 칼럼에 쓴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정황을 뒷받침할 자료도 갖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의 칼럼을 인터넷에 올린 예의 시민들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검찰의 기소 근거는 공직선거법 250조였다. 낙선을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박씨가 2012년 9월 26일 포털 사이트 다음에 올린 글의 제목은 '박정희 대통령의 성노예가 된 슬픈 사연'이었다. 제목은 그랬지만, 재미언론인 김현철씨의 칼럼을 그대로 올린 것이었다.

고씨와 박씨를 기소한 검찰의 논리는 간단했다. 허위 내용의 칼럼을 인터넷에 올렸으니, 그것을 올린 사람도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를 저질렀다는 식이다. 고씨는 지난달 17일 있었던 2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5일 검찰로부터 징역 8월 구형을 받은 박씨는, 두 차례나 되는 연기(각각 1월 16일과 28일 양 일에 연기되었다) 끝에 현재 1심 선고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 못 봤지만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나"

고씨의 1심과 2심 재판부는 어떤 근거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을까. 판결문에 따르면, 고씨의 2심 재판부는 칼럼에 기술된 박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재판부는 범행에 대한 고씨의 '고의 여부'와 관련하여, 범행 당시 고씨가 게시글의 내용이 허위임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인터넷에 게재된 문제의 칼럼이 국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는 바, 칼럼이 제기한 의혹이 진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점, 칼럼 내용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품을 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점 등이 재판부 판단의 근거들이었다.

법 문외한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점들이 있다. 우선 어떤 칼럼의 내용이 '의혹'처럼 보일 경우 독자가 그 의혹의 '사실'이나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다.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독자들은 앞으로 칼럼과 같은 주장글이 제시하는 내용의 '사실'이나 '진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는 의문을 품을 만한 상황에서 의문을 품지 않은 점을 지적한 대목이다. 재판부가 고씨를 "의문을 품을 만한 상황"에 있다고 본 근거는 과거 공직선거법 위반죄(허위사실 공표)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전력이었다. 글을 읽고 의문을 품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는 그때그때의 독자의 자유 선택에 따르는 게 아닐까.

2심에서마저도 50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고씨는, "재판부는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연산군의 폭정을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왜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항변에 수긍이 간다. 고씨의 2심 재판부는 고씨에게 허위사실공표죄를 물었지만 정작 판결문에서 '허위사실은 이것이다'는 내용은 없다. 또 재판부는 칼럼의 허위 여부를 기소를 한 검찰이 아닌 고씨에게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소위 '입증전환'을 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단지 칼럼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임을 소명하기 위해 고씨 쪽에서 제출한 자료의 구체성이나 신뢰성 여부 등만을 판단하여 그 '의혹' 내용이 '허위'라고 보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현재 상태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로 써서는 안 될 것 같다.

'박정희의 여인들', 금기어 될 수도

예의 <주간경향> 기사 들머리에는 2013년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식 자리의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칼럼 필자인 김씨가 칼럼을 기고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MBC 기자 출신인 김현철씨는 1970년대 미국에 건너가 언론인 생활을 했다. ··· 그는 1960년대 유명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씨(여·작고) '사연'을 취재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당부로 취재 내용은 그동안 꽁꽁 가슴에 숨겨 왔다. 그러다 지난해 3월, 자신이 편집발행인으로 있는 미주지역 언론의 기명 칼럼으로 그 내용을 공개했다. 한 살배기 아들을 둔 유부녀였던 김씨와 관계를 맺고 강제 이혼케 한 장본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주장이었다. 김씨가 칼럼을 게재한 당시 기자도 그에게 사실 여부를 메일로 문의했다. 김씨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가 칼럼에 쓴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정황을 뒷받침할 자료도 갖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칼럼이 어떻게 공직선거법상의 '낙선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허위사실공표죄)'에 걸렸는가 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씨 등이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미필적 고의 의도가 있었다고 봤다.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씨가 박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렇더라도 세상 물정 어두운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왕위가 세습되는 봉건 왕조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궁금증이 인다. <바람 없는>에서 박 대통령의 '대·소행사'와, 박 전 과장의 '여자 200여 명' 증언 관련 내용을 서술한 문영심 작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영심 작가의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오마이뉴스>에 쓰면서 '대·소행사'와 '여자 200여 명'을 언급한 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아무 죄가 없을까.

앞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의 '여자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글로 쓰지 못하게 될지 모르겠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박정희의 여인 200명'이 완전한 금기어가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법과 법률가들이 무섭기만 하다.

 

 

 

 

김재규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 장정일 (소설가)  [시사IN] 2014.02.14

 

 

문영심이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시사IN북)는 1979년 10월26일에 벌어진 박정희 암살 사건을 재조명한다. 지은이의 10ㆍ26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단호하다. 10ㆍ26은 유신의 심장이자 종신 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를 제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되살리고자 했던 김재규의 의거다.

박정희는 육사 2기 동기생이자 고향 후배나 다름없는 김재규를 아껴서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역임하게 하고, 유정회 국회의원을 거쳐 마지막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중정)를 맡겼다. 개인의 정리로 보자면 김재규는 이처럼 자신의 출세가도를 이끌어준 박정희를 저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의거를 실행했을 때는 이미 2년10개월째 중앙정보부 부장 직분을 수행할 때다. 유신의 일부인 그가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니 일종의 자기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고 우발적이지도 않았다. 김재규가 3년8개월 동안의 보안사령관직을 마치고 제3군단장을 하던 1972년 10월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을 두세 번 자세히 읽어본 김재규는 그것이 민주헌법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내 목숨과 유신 독재를 바꿔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1974년 9월14일 중정 차장을 하다가 건설부 장관이 되었을 때, 임명장을 받으러 가면서 총을 숨겨 가지고 갔으나 차마 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장이 된 1976년 12월부터는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한국에 비판적인 외신을 번역해 넣거나 직언하는 방법으로 정국 유화책을 건의했으나 박정희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란도 혁명도 아닌…

10ㆍ26 직후 계엄사령부의 중핵인 합동수사본부를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사건에 조선왕조 시대에나 가능한 '시해'니 '대역죄'니 하는 죄명을 뒤집어씌우면서 내란음모죄를 적용했다. 이에 김재규는 자신의 의거를 혁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는데, 김재규의 거사를 내란이라고 하기에는 일반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는 점이 많다. 김재규로부터 대통령을 처치하겠으니 대통령 경호원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부하 다섯 명은 사건 당일 그것도 저격 30분 전에 명령을 전달받았으며, 사태 수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대통령이 주흥을 즐기고 있는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자 부장의 명령에 따라 경호원을 제압하고 나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이래서는 내란이 될 리 없다.

혁명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0ㆍ26은 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까지 두루 지낸 전직 장성이 일으켰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허술했다. 사건 직후 그의 동선이나 수습 처리를 보면, 이건 대체 오랫동안 유신을 끝장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해온 사람의 거사가 아니다. 최근에 나온 한홍구의 <유신>(한겨레출판)은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다"라고 진술한 김재규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인용하면서, 오랜 기간 정보기관을 거느리며 보안의 중요성과 첩보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혼자 구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핵심은 김재규가 유신 체제와 박정희를 동일시했으며, 박정희는 자국민을 300만명이나 희생시킨 폴 포트가 되면 되었지 결코 자의로건 타의로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는 데 있다. 박정희 사후 어느 국민이나 정치인도 유신 체제를 수호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 체제가 급격히 허물어져간 것을 보면 유신과 박정희가 한 몸이라는 김재규의 인식은 한 치도 틀림이 없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박정희를 제거하기만 하면 18년 동안 박정희 1인 통치에 신음해온 국민이 모두 호응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조직을 만든다거나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성가신 내란음모를 꾸미거나 혁명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역사는 그의 믿음과 다르게 흘러갔다. 거사 직후 전두환과 신군부는 '5ㆍ16 교본'이라는 연구 사례까지 급조해 회람하면서 대통령 유고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고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헌법과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나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하게 되어 있으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거사 직후 무리한 계엄령을 이용해 정권 찬탈의 시나리오를 짰다. 계엄 상황에서는 정보부ㆍ검찰ㆍ경찰 같은 정보 수사기관이 모두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의 통제를 받아야 했기에 신군부는 계엄령을 유지하면서 정국이 요동치기를 기다렸다.

김재규의 총과 안중근의 총

내란죄가 아닌 일반 살인죄로 재판을 했다고 하더라도 김재규의 운명은 당시의 시국으로 보아 사형을 면하기 힘들었다. 다만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개 재판이 이루어졌다면 김재규의 뜻대로 유신 체제의 허구가 밝혀지고 거사 동기도 명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의 허구성이 법정에서 논의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 재판이 얼마나 위법투성이이며 졸속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 자세히 담겨 있는데, 지은이가 이만한 수준의 평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신군부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사법 정의를 위해 싸웠던 강신옥ㆍ안동일ㆍ고 태윤기 같은 변호사가 많은 재판 기록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10ㆍ26 직후 양 김(김영삼ㆍ김대중)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공치사를 앞세우기 위해 김재규의 거사를 폄하했고, 이후에는 어느 정치인도 선거 때 표가 달아날까 봐 김재규의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오늘도 말깨나 하고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푸념을 하며 김재규를 원망한다. 하지만 한홍구의 우려처럼 유신 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지금 대중에게 자신이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를 이야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의 재평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유신 독재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흘러온 결과라면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과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 날이 같은 날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연일 수만 있겠는가?"(강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