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미국 LA에 사시는 최석균께서 본 글에 대해서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의 답변 글과 이준
성도님들의 댓글을 달아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석균님의 글
얼마 전에 조엘 오스틴이 자기 책에다 “크루즈 여행객 비유”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미 지불한 티켓엔 숙박 음식 및 모든 활동에 대한 비용이 지불되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한 일부 승객들은 미리 예정된 모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마른 비스켓을 먹으며 추운 바닥에 앉아 있다 이런 내용입니다. 세상 모든
교회가 다 이단이라 말하는 분에게 조엘 오스틴을 들이 됐으니 뭐 칭찬
받기를 원하겠습니까? 만은…. 마른 비스킷에 찬 바닥이 유쾌합니까?
불유쾌합니까?
목사님을 뵙고 나니 그동안 스스로 금기했던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대체 예수의 인간 육신의 피가 뭐가 그리 소중합니까? 그 육신의 죽음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 죽음의 장소인 십자가 자체가 그리 중요합니까? 창세전 부터 말씀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 여자의 자궁에 착상되어 여자의 자손으로 오신
그 사건 성육신 사건 그 자체가 복음 아닙니까?
무한이 유한에, 선이 죄에 착상된 그것이 복음 아닙니까?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오신 성경 역시 성육신이며, 우리의 몸에 담보로 오신 성령이
드러나는 과정이 성화이며 성육신 아닙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하는데 죽상되어 난 죄인입니다 하고 주접 떠는게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외식은요,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구요. 말을 함으로써 행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그 자체를 외식이라합니다.
이근호의 답변
모든 교회가 이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체가 이단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하나님 자체가 허상입니다. 그 허상인 존재인 하나님 앞에서 무슨
고귀한 형용사를 붙여봐서 실제로 계시지도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세요. 그러면 남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고상한 자기
자신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신 거룩한 노릇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다. 악마의
얼굴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이러니 이런 사람에게 있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 니가 뭔데? 나는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성도데...네가 감히 내 앞에서 피를 흘러? 어디서 건방진 해프닝을 펼쳐!"
오늘날 이 악마의 소리가 온 인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최석균님의 글
자기부인의 길이 참 어렵습니다. 그 뜻도 잘 모르겠구요. 이제는 하나님을
부정해야하고 예수를 부정해야 솔직한 성도가 되는 이상한 논리를 접하고 나니,
이걸 존종하여 배워봐야 하는 건지 그냥 무시 할건지 고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역설도 이정도면 그 도가 지나 칠 것이라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기특한 짓을 하다가도 바로 뒤로 물러갈 사탄으로 칭해지기도
합니다.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신학 세계이군요. 목사님은 왜 예수의 피로
십자가로 우리가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걸 부인하시고
믿지 않는 거죠? 그러면서 그 사건 자체만 강조 합니까? 그 사건이 이루어낸
상태 즉 Event => state를 더 공부 하세요.
이근호의 답변
그 상태가 곧 나의 자아 때문에 우상으로 곧장 변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자기 영광에 미치고 환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서 인간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주여, 제가 개였군요"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고후 4:12) 바로 이 상태가 십자가 안의 상태입니다. 제발 자신을
주인공으로 장착한 소설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발 자기를
미워하시기 바랍니다.(요 12:25)
이준 성도님의 댓글
오스틴의 알레고리
****************************** 발췌 인용문 ****************** 오래 전에 대서양 항공편이 흔하지 않았을 때, 한 남자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여행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열심히 일한 돈을 모두 모아서 마침내 순항함
승선권을 살 수 있었다...모든 승객은 크고 화려한 식당에 모여 맛난 음식을
먹는데 그 혼자만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신이 싸온 치즈와 비스킷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는 식당에서 풍겨 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부러워해야 했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배를 쓰다듬으며서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도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밤에 자리에 누워도,
식당 안에서 배불리 먹는 상상을 하다보면 어느 샌가 잠은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항해가 끝나갈 무렵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식사 시간마다 저기에서 치즈와 비스킷을 드시던데 이유가 뭡니까?
왜 연회장에 들어와서 우리랑 같이 드시지 않습니까?" 이 말에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승선권도 겨우 샀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여유가 안됩니다."
그러자 상대편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선생님, 승선권에 음식값까지 포함된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음식값은
이미 다 지불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문득 많은 사람이 이 순진한 여행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좋은 일에 대한 값을 이미 치렀다는
사실을 몰라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들은 천국으로
향하는 순항함에 탔지만 복에 대한 값이 승선권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스스로 티끌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서지
않은 채 치즈와 비스킷을 먹고 있는 것이다...(중략)...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 치즈와 비스킷에 진절머리가 난다!...(중략)...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복으로 가득한 연회를 베풀고 우리를 초대하셨다. 값은 이미 다 치렀다.
하나님의 연회에는 기쁨과 용서, 회복, 평화, 치유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가득하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의자에 앉아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먹기만 하면 된다...(생략)"
출처 : 조엘 오스틴(2005). 긍정의 힘. 서울 : 두란노. pp.102-103. ***********************************************************************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풍유와 그에 대한 해석 방식을 잠시 살펴 보면,
(마 13:37-40, 개정)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즉, 풍유에 동원된 각종 캐릭터들에 해당하는 실존들이 제각기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굳이 다른 추가적 해석이 필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예수님의 풍유 해석 방식에 비추어 보면, 앞서 발췌, 인용한
오스틴의 풍유는 여러 가지 중대한 모순점을 시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1. 크루즈 승선권을 산 사람은 그 남자 자신인데 값을 치른 건 하나님이라는
식의 엉뚱한 해석을 들이댄다.
2. 크루즈 승선권을 어렵게 샀다고 했는데, 그 남자의 그러한 행위, 노고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 별도의 희생을 마련하신 예수님의 희생과 거리가 멀다.
3. 그 남자가 누려야 마땅했던 크루즈 안의 온갖 혜택들은 결국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룩한 바가 아니라 자신의 노고에 대한 대가였던 셈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기에 충분하다.
4. 왜 굳이 비유를 들면서 오스틴은 '방주'가 아닌 '크루즈'를 선택했을까?
(외로운) 치즈와 (차가운) 비스킷만큼이나 어둠의 공간이었던 (노아의)
방주를 기피하고 혐오했기 때문이 아닐까. 크루즈(순항함)의 용도는 분명히 유람선이지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구조선이
아니다. 오스틴은 처음부터 배를 잘못 탔다.
5. 굳이, 오스틴의 풍유의 취지가 온갖 누릴 거리들을 베풀어준 주체에
있는 게 아니라 누릴 거리들을 마음껏 누려야 함을 깨닫는 것의 여부에
있다 하더라도 크루즈 - 이 또한 굳이 방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 에 승선한
수많은 무리들의 성향을 잘못 분석해도 한참 잘못 분석한 것 같다.
6. 무슨 말인가 하면, 오스틴에 동원시킨 그 크루즈 내부의 화려한 식당에
모여 진탕 먹고 마시는 자들은 그의 풍유 취지에 의하면 분명히 "성도들"인데,
그렇다면 그 성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도들의 삶은 크루즈에 승선하여
천국에 이르러 하선후 다이어트를 해야할 정도로 온갖 영적인 복을 누렸던 삶일까. 사도는 날마다 죽는 삶을 산다고 했고, 예수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진다고
했고, 노아의 방주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공간이었으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성도 또한 그러했으며, 부자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다 천국에 이른
나사로는 그의 처참했던 물리적, 일상적 삶만큼이나 오스틴에 구사한 온갖
긍정적 표현과는 사뭇 정반대의 삶을 살다간 게 뻔한데, 그렇다면 오스틴은
자신의 풍유를 통해 사도 바울이 구사한 "예수의 죽음=>예수의 삶"이라는
역설법을 그대로 모방 구사하려는 취지였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오스틴의 풍유를 여러 번 곱씹어 보아도 어디까지나 긍정어들을
구사함으로써 복음을 물타기 하려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복음, 십자가의 피로 점철된 인생들을 표현하는 성경 구절들은 '생명'이라는
컨셉을 논하되, 그 내용물은 수많은 네거티브적 표현들로 장식, 묘사되어
있음을 우리는 군데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7. 다른 비유를 끌어와서 그 흥청거리는 크루즈 선의 연회장(화려한 식당)을
트집잡아 보면,
(마 22:10-11, 개정)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연회장에 들어왔었어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쫓겨날 판인데 연회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홀로 차가운 식사를 감내하는 자를 두고서 '최소한의'
- 영적인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 신자임을 인정해주는 것은 또 무슨
처사인가. 이러한 정황은 오스틴의 머릿속에 기독교 복음이 견지하는 구원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8. 바로 이러한 구원론적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과 아울러 그가 본문에서 말한 바
성도가 당연히 누려할 하나님의 복 가운데 언급된 "...용서, 회복, 평화..."는
그의 뚫린 입으로 분명히 말한 바,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는 발언과 더불어
비진리들과의 평화, 비진리들에 대한 용서(수용)까지 의미함을 주변인들로
하여금 충분히 연상케 한다. 오스틴의 몰몬교 관련 발언 검색 결과 ☞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where=nexearch&query=%C1%B6%BF%A4+%BF%C0%BD%BA%C6%BE+%B8%F4%B8%F3%B1%B3
그럴 듯하게 들린다고 해서 모두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치즈와 차가운 비스킷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말한 그 오스틴은 십자가로
인한 기요틴(guillotine, 길로틴)을 피하고 싶은 심정을 유감 없이 드러냈을 따름이다.
(갈 6:12, 개정)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빌 3:18, 개정)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연회장의 기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 25:6, 개정)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즉, 연회장에 동원된 골수는 예수님의 몸을 파괴시킨 결과물들이며, 맑은 포도주
는 죄의 오염에서 격리된 예수님의 선혈을 가리킨다. 굳이 방주 대신 크루즈를 선택한 그 남자와 그 승선객들과 오스틴과 그의 책에
열광한 자들과 그의 책에 추천사를 써준 국내 유수한 목사들과 신학자들, 자타가
공인한 기독교계 지도층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셈인데, 그들이 영원히 정박하여
닻을 내릴 곳은 다음과 같다.
(렘 51:39, 개정)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약속의 땅이 아닌) 바벨론의 어느 항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