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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십일조 강요로 무너지는 한국교회[옮겨 온 글]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1. 8. 23.

 

 

십일조 강요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십자가 없이는 살아도, 십일조 없이는 못 산다

 

 

입력 : 2011년 08월 18일 (목) 09:08:19 / 최종편집 : 2011년 08월 18일 (목) 17:54:24 [조회수 : 2826] 신성남canavillage@yahoo.com

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궁핍했던 시기였기에 목회의 길은

 경제적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으며, 예수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고난에 동참을 각오해야 하는 비장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달라졌습니다. 한때는 외국 원조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윳돈을 굴리기 위해 증권사를 기웃거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드디어 어떤 이들에게는 때가 찬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신사참배마저

수용하며 교권에 집착하고 기생하던 세력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자고 나면 불어나는 양들의 뽀얀 속살이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유혹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일방적으로 의무화하기에는 신학적으로 장애가 너무 크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강제적 십일조가 아닌, 자발적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른 십일조가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에 따라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분의 일을 바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일조를 바치면, '구약의 말씀에 따라 큰 복을

받는다'고 무당 굿거리 같은 소리를 단체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논리입니다. 십일조 자체가 강제적인 것인데, '자발적인

십일조'라니 이 무슨 말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국세청에 '자발적인

세금'을 추가로 내는 기업인을 보신 적이 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궤변적 논리가 순진한 신도들에게 잘 통해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한 '십일조 왕국'이 되어 수십 개의 초대형 교회들을 거느리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가히 '십일조를 위한, 십일조에 의한, 십일조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십일조를 위해 목회하고 신도들은 무리하게 바치느라

 허리가 휘고 그리고 교회는 십일조에 의해 운영됩니다. 아울러 십일조가 동력이

 되어 교회를 공룡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사업 역시 십일조 영업 실적에 따라

 새로 수립되고 추진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십자가 없이는 살아도, 십일조

없이는 못 사는 엽기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십일조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교회들이 다 이렇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상당수의 교회가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분의 비판처럼 교회 개혁의 문제는 밥그릇 속의

돌같이 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밥 속에 하얀 돌이 한두 개만 있어도 이가

부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릇 속에 돌보다 쌀이 더 많으니 괜찮다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정당한 지적에 대해 교권주의자들의

 상투적인 변명처럼 '일부의 이야기'라는 말은 가능한 피하면 좋겠습니다.

'자발적인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본래 율법의 십일조는 유대 신정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내야 하던 '종교적 세금'이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이후 초기 가나안 정착

당시,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제사직을 담당한 레위 지파만이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제사 업무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십일조는 내기 싫어도 무조건 강제적으로 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강제로 내야만 하는 재물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이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므로 율법의 십일조는 처음부터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또는

십일조를 감사 헌금이나 건축 헌금처럼 그저 여러 헌금의 한 종류로

 취급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한국교회 십일조의 근거를 '율법의 십일조'가 아닌,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한 십일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십일조는 비록

이름은 같지만, 율법에 명령된 십일조와는 크게 다른 '비정기적'이며

'자율적'인 것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실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십일조는 일시적인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수입의 1/10을 내는 '율법의

십일조'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율법의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예수님 십자가 사건으로 제사와 함께 폐지된 제도이며, 역사적으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함께 끝이 난 '구약의 제도'입니다.

율법의 강제적 십일조를 역사상 최초로 부활시킨 교회는 부패한 중세 교회입니다.

그런데 유럽의 개혁자들에 의해 폐지되어 오늘날 가톨릭교회조차도 시행하지 않는

 이 중세 십일조를 한국의 개혁 교회가 근래에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이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이 중세적 십일조의 2차 부활을 결정적으로 크게 주도한 사람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와 영적으로 야합한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이

'교회 사유화'와 '성직 매매' 등 중세 교회의 나쁜 점을 기가 막히게 잘

답습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의 십일조는 중세 교권주의의 사생아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십일조의 역기능

세계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하는 기독교인은 절대적으로 소수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유독 십일조를 강조하여 큰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교회의 재정이 풍족해졌습니다. 그래서 큰 예배당 건축이 가능해졌고 목회자에

 대한 처우가 경쟁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교회의 대형화를

초래했고 아울러 목회자의 귀족화를 부추겼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순수한

믿음과 경건보다 돈의 논리가 우선하는 물질적 세속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에서 목회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지는 자리가 아니라, 최고

경영자로 행세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목사가 교회의

삼권을 쥐고 흔드는 기형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우쭐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는 더 이상 종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의 단물을 빨며 중세 영주처럼

군림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맘몬적 서식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교회만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각 교단의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게 썩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한국교회의 대표 단체라고 자처하는 '한기총'마저 목회자들답지 못한 극심한

 부정과 타락으로 그 교회사적 악명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양들을 섬기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먹고 잘살다가 장수하고 죽은 제자가 몇이나

있었나요. 거의 대부분이 지지리 고생하다가 제명에 못 살고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의 종'이라는 많은 귀족 목사들은 '주의 자녀'들도 타기 힘든

수억 원의 고급 승용차를 태연스럽게 즐기고 있습니다. 목회가 비즈니스입니까?

 도대체 목회자가 무슨 영업을 하기에 저렇게 큰돈을 모으고, 비싼 차를 굴리고

 있는지요. "거리에서 미친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이를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이는 히틀러의 광란에 저항하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한 말입니다. 낮아지고 섬겨야 할 목사들이 억대의 승용차로 거리를 달리는 것

 역시 히틀러의 질주와 비슷한 미친 행동입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행위이고 동시에 교회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신도들은 목회자들에게 성인이나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교인들 평균 수준만큼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마 루터가

 오늘날 한국의 메가처치들을 본다면, 또다시 망치를 들고 교회 현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한국교회는 왜 못 고칠까요? 이는 목회자들

 중에 상당수가 얼굴이 두껍고 파렴치한 '종교 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정신이 나도록 제대로 맞아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언론에서 나름대로 팼는데도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 뒤에 숨어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패한 종교치고 기복으로 신도들을 기만하고 그들의 돈을

 삼키지 않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는 모든 타락한 종교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선지자적 사명과 종의 모습을 상실한 채 점차 상전의

 모습으로 변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자기들끼리 설탕만 뿌리며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의 모습 그대로

 '웃기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교회 확장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1/10을 강조하여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지만,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1/10'이라는 수치적 용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랑'이 그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형제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먼저 교회에 바치는 것을

 우선시키는 가르침은 교권주의자들의 기만적인 술책일 뿐입니다. 이들은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위장하는

자들입니다.

인천 지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각자 야채 노점을 하는

가난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행히 형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장사가 매우 잘되고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러자 형은 목사님의 설교대로

십일조를 해서 복을 많이 받았다고, 신이 나서 버는 대로 교회에 더욱

열심히 바쳤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동생의 가정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 너무

 어렵게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거액의 십일조를 하는 형은 가난한

동생의 가정을 거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사실이 온 동네에

소문날 정도가 되었을까요. 덕분에 그 형과 그가 출석하는 교회는 그 동네의

 공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에는 이런 불균형적인 바침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웃은커녕 자신의 친족들마저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인색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신자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까요. 한국교회는 1/10을 강조하여 거액의 십일조를

걷는 데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본래 정신에 따라 형제와 이웃을

 돌보는 나눔을 먼저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신자들은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바르게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한 후에 계산할 때가 되면 번번이 식당 화장실로 슬며시 도망가는 신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들이 한 번 속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속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독실한 집사인데, 사회에서는 인색한 기독교인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서 서민들이 스스로 자립해서 살기도 힘든

판에 매달 수입의 1/10을 무조건 교회에 바쳐야 옳을까요. 교회가 무슨 중세의

봉건영주라도 되는가요? 누가 신약 교회에서 빈부의 구분이 없이 의무적으로

 1/10을 내라고 하던가요. 이는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또 다른 바리새인의 누룩이며 올무일 뿐입니다.

매달 많지 않은 수입에서 무리하게 십일조를 바친 후에 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점심 한번 제대로 못 사서 인색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친척들에게는 매정한

사람으로 원망 듣고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외식도 변변히 못 해 주는 부모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삶일까요.

차라리 그 돈으로 자신의 가정을 먼저 돌보고 못 사는 형제들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그리고 생존을 걱정하는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독거노인이나

소년 가장이나 노숙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지역 내의 어려운 미자립 교회를

도와주십시오.

만일 자신은 '죽어도 십일조를 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하신 분이 있다면, 1/10이

아니라 2/10라도 좋으니 꼭 이런 곳에 먼저 바치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에 십일조를 아무리 잘 바쳐도, 한국교회는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출석하시는 중대형 교회에는 정상적인 운영에 필요한

만큼만 헌금하면 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는 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왜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었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말만 너무 잘해서, 세상이

 더 이상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행동과 실천만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고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전도의

문도 함께 열리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는 교권주의를 거세하는 일

이제 십일조가 폐지될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교회 재정 수입이

현재보다는 일단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가 부를 축적하기가 지금보다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목회직에 대한 세속적인 매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교회 살림이 빡빡해져서 교회 대형화가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기존의

대형 교회들마저 관리 운영에 부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중소형 교회는 이보다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문을 닫는 교회도

 늘어나고 심지어 목회를 떠나는 분들도 늘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분명히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는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모든 부패한 종교의 문제가 복잡해 보이나, 사실 그 원인은

단순합니다. 교회 내에 이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부패합니다. 박해 시대에

교회가 부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외적으로 성장하고

승승장구할 때에 타락했습니다. 먹을 곳이 많은 곳에 벌레가 많이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이런 이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 수입의

절대 액수가 이 십일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가 없는 외국의

교회들과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외국 목사님들이 한국교회 주보를 보면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십일조 액수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100명 교인만 모여도 보통의 외국 교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가 나옵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개혁 교회들이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의무적 십일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미국의 대형 교회들을 제외하면, 목회를

 해서 부유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대형화하기는커녕 유지하기도 바쁜

교회가 많습니다. 이런 척박한 목회 환경은 오직 소명을 받은 분들만이 바른

목회의 길로 갈 수 있는 여건을 자연스럽게 제공합니다. 적어도 화려한 목회

 성공을 꿈꾸며, 개나 소나 다 신학교로 몰리는 일은 막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현행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하여 준 제도도 아닙니다. 단지 교권주의자들이 교회의 외적 성장을 위해

수제 가공한 제도입니다. 아울러 풍부한 자금으로 교회 사유화를 실현시키는

데에 크게 악용되어 왔을 뿐입니다. 이처럼 지도자들이나 그 구성원들이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종교는 예외 없이 사이비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심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교권과 금권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하고 목회자가 검소해져야 합니다. 흩어 구제해도 모자를

 판에 교회나 목사가 무슨 돈을 쌓을 틈이 있는지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살다가 가셨는데,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요. 교인들이 자녀의

간식비와 학원비를 아끼고 장바구니를 비워서 어렵게 바친 돈으로 중세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한국교회에 과도한 부를 쌓고 있는 십일조는 이미 교권주의자들의 개인 금고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들은 교인들이 바친 돈으로 비싼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차를 사고 유학 보내고 그리고 교회 사업에 개입하여 족벌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영혼까지 팔아서라도 교회를 세습시키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가 교권주의를 거세하는 일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매년 창고를 바닥까지 털어 흩어 구제하고 스스로 가난해지면,

교권주의란 독버섯은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빨아 먹을 단물이

 없어 저절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교회가 풍족해야 한다거나 교인들이 부자가 되어 잘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교권주의자들의 달콤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또한 '교회가 돈이 있어야 잘 운영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거짓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교회나 큰 사업을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었던가요

. 오히려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큰 교회나 큰 사업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다 인간의 알량한 욕심일 뿐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큰 사업은

개교회가 아니라 교단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교회가 더 커지고 풍족해져야 선교와 구제를 더 많이 하고,

더욱 많은 다른 사역을 힘 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지난 30년 동안 보여 준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십일조로 모아진 재정으로 끝도 없이 예배당 확장에 몰두하여 교회

대형화만 추구했습니다. 선교도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컷 쓰고 남은 푼돈으로 구제를 합니다. 본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십일조가

 이렇게 거의 다 엉뚱한 곳에 사용되고 이런 행태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해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일까요. 누가 진실로

 고아와 과부를 울리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니 교회가 그토록

가난해지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해법은 있습니다. 우리는 총체적으로 교회 운영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는 돈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일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큰 부담이 되는 교역자 사례비 문제도 각 교단 중대형 교회들이

몸집 키우기를 포기하고 전력으로 합심한다면, 노회나 연회 주도하의 교역자

파송 제도로 크게 개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노회나 연회 차원에서 순환 목회

등을 통해 미자립 교회를 적극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필요하다면 자비량

 사역이나 공동 목회 등의 방법도 추가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국내외 선교 역시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급 선교사를

파송해야만 선교가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온 지구촌이 좁아지고

있고, 한국교회는 의사, 간호사, 교사, 기술자, 사업가 등 전문직을 가지고 선교

현지에서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잘 준비시켜서 필요한 곳에 파송하면 됩니다. 이미 일부 선교 단체들에서는 이를

 성공적으로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루에 5,000명이나 되는

회심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언제 큰 건물을 지어 메가처치를 이루었던가요.

오히려 바람마저 피하기 힘든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소박한 기록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세속화되기 전 교부 시대의

교회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교회는 지금처럼 고비용을 소모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몸집을 키우는 데에 몰두하지만 않는다면, 도리어

 교회 관리에 쓰고 남은 재정을 구제나 교육에 적절히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십일조 강요는 한국 개혁 교회의 무덤이 될 것

한국교회는 중세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자신들은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걷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지독한 기만입니다. 지나가던 동네 개들도

비웃을 거짓말입니다. 한국교회에 상식은 없고 외식만 난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당장 교회 내에서 믿음이 적은 자로 낙인되어 여러 가지로

 직간접적인 차별을 받는데도 이런 위선적 답변을 합니다. 더구나 장로나

권사 등 주요 직분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는 '자발적 십일조'로

 위장해 놓고, 뒤로는 이렇게 구조적인 차별을 하여 실제로는 '강요적 십일조'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차별적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과 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마음의 벽을 만들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거의 따로 어울리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사실상 전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새신자들이나 초신자들마저도 상처를 주고 교회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십일조 소리 듣기 싫어서 교회 출석을 그만두었다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사유이든 십일조를 못 내시는 분들의 그 암울한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교회 모임에서 늘 위축되고 뒷자리로 밀려야 하는

 그 서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십일조가 무슨 근거로 믿음의 척도로

 사용됩니까. 십일조 강요로 인한 이런 가증된 차별이 바른 교회가 신명을 다하여

 추구해야 할 진리라고 보십니까.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은 영적 사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관계없이 이미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나머지 무슨 복을 아끼실까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돈을 많이 바쳤다고 복을 주시고, 못 바치면 멸시하시는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부족하셔서 우리의 재물을 원하실까요. 그런 속된

 가르침은 이방 종교의 무속적 신앙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중에서 '세속적 복'을 구하라고 가르친 사도가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요. 만일 세속적 복으로 복음을 평가해야 한다면, 사도들은 물론

예수님까지도 모두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가 겉보기에는 한국교회를 세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를

안에서부터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을 돈과 사람으로

 변질시키고, 이에 낙심한 신도들을 내치고 있습니다. 결국 십일조 강요는

텅 빈 예배당 건물만 남겨 놓고 몰락한 과거 유럽의 화려한 교회들처럼,

다음 세대에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회칠한 무덤만을 남겨 줄 것입니다.

'사람의 십일조' 대신에 '사랑의 십자가'를 져야

한국교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임의로 만든

제도입니다. 이런 인위적 십일조가 교인들을 속박하고, 동시에 교회를 돈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실제 이런 강요적 십일조로 이득을 얻는 자들은 교회 내의

 사악한 종교 업자들 뿐입니다. 이들은 주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돈의 종이

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십일조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예배나 헌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구약의 십일조 대신에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겸허한

삶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될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샬롬!




(십일조 폐지 논리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다른 글에 이미 서술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문에서는 많이 생략을 하였습니다. 아래 관련기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