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것’과 ‘죄악된 것’과의 차이
성경의 모든 중심이 예수님에게 쏠리는 것도 이상하고 특히 예수님의 숱한 말씀과 사역과 기적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성경에는 엘리야도 나오고 모세도 나오고 예레미야도 나오고 노아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나온다. 왜 그들의 업적을 인간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왜 최종 믿음의 내용으로 차지할 수 없단 말인가? 야곱이 아버지에게 별미 만들어 바쳐 축복받은 행함이 왜 믿음의 내용으로 궁극적으로 차지 할 수 없단 말인가? 별미 갖다 바치는 풍조가 교회 내에 정착하면 그 교회의 경제적 여건이 훨씬 수월질 것이 뻔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쏟아내신 각자지 명령과 지시와, 예수님에 의해서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 수많은 행함에 관한 지시와 명령에서 불구하고 왜 믿음의 궁극적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살아나심에 한정되는가? 즉 아무리 명령대로 시키고 선하게 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분의 살아나심을 이해 못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자기 행동을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준을 자꾸만 자기 판단에서 결정짓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면, “나는 복음을 전했다”고 우기지만 과연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 전하기”하고 일치된 가치를 지닌 행함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무슨 근거가 마련되어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복음 전하기’, ‘예수 믿기’와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복음 전한다’고 우기는 것과 과연 같을까?
더 쉬운 예로, “내가 다니는 교회를 티 잡지 말라. 진짜 성경에 나오는 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 내에서 찾을 수가 있느냐 말이다. 대구 지묘동에 있는 ‘우리교회’라는 것이 성경 내에서 명단이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유일한 계시인 성경에도 등장하지도 않는 교회를 그래도 참된 교회라고 우기는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막돼먹은 사고방식인가? 그것은 바로 본인이 그 교회 다니고, 본인이 그 교회에 돈을 내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이라면 터무니없는 억지요, 진리를 도용한 짓이요 막무가내 떼를 쓰는 행패에 해당된다.
왜 성경에 숱하게 많이 나오는 명령과 지시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알기를 원했을까?(갈 3:1/고전 2:2) 그것은 유일하게 인간의 모든 판단과 기준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보다 더 나아보이 쪽은 선정하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이 아니라 인간 외부에 자리 잡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져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자나 사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려도 그들의 순교의 피가 진리를 규정할 기준이 되지를 못한다.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죽을 수뿐이다. 사도나 제자들이나 선지자들이 구원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이다. 유일하게 언약의 완성자 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피만이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복음 전하는 것도 죄가 되고,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되고, 어째서 은혜 가운데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반발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사야나 성령 받은 선지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 그리스도 자신이 죄인을 통해서 긍휼을 쏟아내기 때문이다.(벧전 1:10-11)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왜 그리 반발이 많은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에게 나타난 현상을 ‘자기 행함’ 기준을 입각해서 자꾸만 재해석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사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자기 행함’에 입각해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만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그 기준을 권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 축하받는 즐거움을 같겠다는 것이다.
이런 짓을 마지막 시대에 필히 등장하는 적-그리스도 발상에서 필히 시행되는 도발적 행위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10) 이들 적-그리스도들은 자기 행위가 결코 완전하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요 인간이다. 인간은 모든 면에 있어 완전치 않고 무지하다. 부분만 알고 전체 다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같은 유한성을 지닌 인간들 끼리 상호 이점을 존중할 줄 안다. 즉 ‘우리는 신이 아니고 인간들이기에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는 사랑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성령 받은 복음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한다. “십자가 관점에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인을 통해서 나오기에 뭐든지 죄가 나올 뿐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언약 완성차원에서 주님께서 일 벌리시는 방식이다”고!
즉 ‘인간은 무지하냐 ’아니면 ‘죄악된 존재냐’ 라는 놓고 기준을 어디서 동원시켰냐의 차이다. 인간들이 인간들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보면 ‘인간은 무지하다’가 맞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주관들에 다 차이가 나고 하나로 통일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피는 그런 인식조차 죄로 규정지어 버린다. 왜냐하면 ‘무지’하다는 말은 ‘앞으로 그 무지성을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면 얼마든지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다’는 인식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십자가, 저리 비켜라. 우리 인간들이 나아가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된 기존 기준점을 밀쳐서 짓밟는 도발을 행하는 것이 된다. 왜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십자가 기준점을 밀쳐버릴까? 그것은 소위 하나님의 은혜로 챙긴 것들이 자기들에게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일까?
‘은혜롭게 예배드리기’, ‘은혜롭게 교회 세우기’, ‘성령으로 전도하고 복음 전하고 예수 믿기’, ‘성령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늘 회개하면서 의로움이 쏟아내는 의(義)의 종 되기’ 등등이 있다. 하여튼 ‘은혜’라는 말만 안 빠트리지 아니하면 마치 성령에서 나오는 행함인 줄 안다. 이런 것들을 어디가 모아놓았을까? 그곳은 ‘자기’라는 그릇에다 수북이 모아놓았다. 열심히 쓸어 담은 것이다. 스스로 말한다. “내 영혼아 이만하면 천국 하는데 지장 없다 그지?”(눅 12:18-20) 자기 구원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어디선가 충격적인 평가가 날아든다. “그것도 십자가 앞에서 죄입니다”고. 그들은 격렬하게 반발한다. 발악하듯이 반발한다. 마치 지옥 불에서 작은 벌레들이 소금 침을 당하면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충격은 본인이 죽어 지옥 불에 들어갈 순간에 비하면 충격도 아니다!
제발 “너는 이미 죽었느니라”고 단정 짓는 십자가 기준만 성령으로 받아드려 그것만 외부로 증거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