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좋았었나? 글쓴이 :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십자가 고통을 모를 그 때가 좋았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신자라고 자인하고 교회 열심히 다닐 때가 좋았다.
열심히 일한만큼 칭찬들을 해주니 그 때가 좋았다.
세상에서 성공한 만큼 ‘복이다’고 해주니 그 때가 좋았다.
교회에서 열심 낸 대가로 세상에서 복 받았다고 말들 하니 그 때가 좋았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한 그 때가 좋았다.
그만큼 내가 순수하고 순결한 청년이라서 좋았다.
흠은 줄여나가고 날아갈수록 완전한 존재로 변신되는 것이 즐거웠다.
도대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완벽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는 것이 즐거움이 좋았다.
이 실험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아 주는 시선들이 있어 좋았다.
그런데 십자가의 피 소식이 들려온다.
죄인들 때문에 흘린 피란다.
피 없이는 의인없단다.
그 때부터 성경이 보인다.
교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이 눈에 들어오고 십자가가 다가온다.
교회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된단다.
그 때부터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전 16:22)가 이해된다.
“은혜 주신 것을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함이라”(빌 1:29)가 이해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가 이해된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다시 사신 자를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가 이해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고후 4:11)이 이해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가 이해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전 1:15)가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가 이해된다.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함심령”(시 51:17)가 이해된다.
교인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칭찬을 받고 스스로는 완전을 향해 시동을 걸 때는 이런 말씀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때는 타인과 경쟁하기 바빴다.
죄인 인줄 몰랐다.
죄를 줄여나가면 ‘덜 죄인’되는 줄 알았다.
정말 그 때가 좋았었나?
챙길만한 근사한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제일 소중하게 여겨지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결점을 줄여나가고 장점을 키워나가던 재미로 살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요,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보장하는 증거물로 여겼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교회에서 충성한 만큼 확실히 성과급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는다고 확신했던 그 때가 정말 더 좋았었나?
예수님은 눈물은 어떻게 하고…
예수님의 고통은 내몰라라 하고…
자신의 죽음을 앞세우시는 주님은 잊어버리고…
나만 위대하고, 위대한 목회자가 되면 그만인 그 때가 정말 더 좋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