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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그 때가 좋았었나?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1. 11. 20.

   

 

 

그 때가 좋았었나?                                    글쓴이 :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십자가 고통을 모를 그 때가 좋았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신자라고 자인하고 교회 열심히 다닐 때가 좋았다.

열심히 일한만큼 칭찬들을 해주니 그 때가 좋았다.


세상에서 성공한 만큼 ‘복이다’고 해주니 그 때가 좋았다.

교회에서 열심 낸 대가로 세상에서 복 받았다고 말들 하니 그 때가 좋았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한 그 때가 좋았다.


그만큼 내가 순수하고 순결한 청년이라서 좋았다.

흠은 줄여나가고 날아갈수록 완전한 존재로 변신되는 것이 즐거웠다.

도대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완벽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는 것이 즐거움이 좋았다.

이 실험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아 주는 시선들이 있어 좋았다.


그런데 십자가의 피 소식이 들려온다.

죄인들 때문에 흘린 피란다.

피 없이는 의인없단다.


그 때부터 성경이 보인다.

교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이 눈에 들어오고 십자가가 다가온다.


교회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된단다.

그 때부터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전 16:22)가 이해된다.

“은혜 주신 것을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함이라”(빌 1:29)가 이해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가 이해된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다시 사신 자를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가 이해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고후 4:11)이 이해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가 이해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다”(딤전 1:15)가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가 이해된다.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함심령”(시 51:17)가 이해된다.


교인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칭찬을 받고 스스로는 완전을 향해 시동을 걸 때는 이런 말씀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때는 타인과 경쟁하기 바빴다.

 

죄인 인줄 몰랐다.

죄를 줄여나가면 ‘덜 죄인’되는 줄 알았다.


정말 그 때가 좋았었나?

챙길만한 근사한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제일 소중하게 여겨지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결점을 줄여나가고 장점을 키워나가던 재미로 살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요,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보장하는 증거물로 여겼던 그 때가 정말 좋았었나?


교회에서 충성한 만큼 확실히 성과급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는다고 확신했던 그 때가 정말 더 좋았었나? 


예수님은 눈물은 어떻게 하고…

예수님의 고통은 내몰라라 하고…

자신의 죽음을 앞세우시는 주님은 잊어버리고…


나만 위대하고, 위대한 목회자가 되면 그만인 그 때가 정말 더 좋았었나?

 

 한진영 (IP:218.♡.118.124) 07-09-09 02:45 
저도 그 때를 기억합니다.

칠흑 같은 밤을 피해 찾아 들었던
'광명한' 어두움은,
모양새가 노루를 피하다 범을 만난 꼴이지만,
잊혀 지지 않는 달콤한 경험입니다.

환각에 취해 노닐던 날들 중
어느 날 어느 순간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가만히 들려옵니다.
달갑지 않던 그 소리가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합니다.

종당에는 이 마당이 무도회요
한바탕 궂거리 판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멋지게 휘날리던 옷자락이,
넝마 조각에 닳아빠진 고무신짝이었음에 화들짝 놀랍니다.

그토록 찬란하던 밝음이 실은 농도 짙은 어두움이었음에 휘청합니다.
잔치는 계속되지만, 흥은 이제 깨졌습니다.
여흥의 끝자락이나마 붙들고 싶은데, 이미 깬 꿈일 다름입니다.

신기루처럼 너울거리던,
관객도, 갈채도, 내리 쬐던 조명도 사라지고
색 색깔의 무대 장치도 점차 희미해집니다.

황량한 광야,
어리둥절한 자아의 홀로 섬 앞에,
세미하던 그 소리가 비로소 우렁찬 외침으로 울려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능력'주시는 자를 구하던 자가
이제 오히려 ‘주여 뉘시오니까‘(행9:5) 묻습니다.
오히려 ‘나를 떠나소서’(눅5:8) 설토합니다.

피 냄새에 흥건히 취한 그 때 이후,
그러나 사단은 아직도
공교히 꾸민 말로 ‘정말 그러하냐?“(창3:1) 합니다만,
'옳다 옳다’(마5:37)
죽이심의 능력으로만 증거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