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온 세상이 지옥이다]-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동충하초사진-
도가니 글쓴이: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목사
금속마저 녹이는 무서운 불을 담는 ‘도가니’ 이야기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이루어진다. (무진시霧津市-실제로는 광주시) 귀머거리나 정신 박야한 아이들을 자애학원(실제로는 인화학원) 교육 책임자들이 정기적으로 강간해 온 실화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왜 공지영 작가는 제목을 ‘도가니’라고 했을까?
그곳은 외부의 그 어떤 구조의 손길과 관심도 닿지 않은 블랙홀과 같은 폐쇄된 환경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옥의 불길처럼 악이 마음껏 분출되었고 피해 아동들은 그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이 가두어진 처지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악을 불꽃으로 표현하자면 그곳은 분명 ‘벌건 도가니’다.
소설의 내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애학원에 취직하려면 교사는 ‘학교발전기금’을 5000만원∼1억을 내고 들어와야 했다. 학교에서 일하는 말단 관리직원까지 학교재단측에 약점 잡혀 있다.
학교측은 무진시 경찰서 담당 형사에게 정기적으로 뇌물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강간 주범인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은 나란히 무진시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의 장로들이다.
뿐만 아니라 피해 입은 가족들은 학교 측으로부터 거액의 합의금을 받고 ‘없던 일’로 쳐준다. 이로 인해 강간범들은 얼마 안 있어 풀려나와 학교에 복직이 된다. 고소해야 될 검사나 판결해야 될 판사는 모두 피고 측 변호사의 제의를 받아들어 재판 후 서울로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난다. 끝까지 피해 아이들 편에서 서서 학교 재단 측과 싸우던 미술 선생님도 학교 측 변호사로부터 회유 내지는 협박을 당하게 된다.
주인공 미술 교사를 학교에 취직되도록 힘써 준 대학 은사님은 노골적으로 주인공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한다. 주인공은 미칠 지경이다. 모두들 악에게 사정없이 굴복당하기 때문이다. 도가니 속에서 누가 악을 다스릴 수 있을까? 영화의 끝은 여전히 안개 낀 무진시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가치 사수’다. 인간이 짐승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방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서로의 시선들이 견제가 되어 인간성을 잃지 않고 있지만, 안개 낀 것처럼 어둡고 은밀한 공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인간들이 짐승 짓을 하게 된다.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는 외부로 퍼지지 않는다. 지옥에 갇혀 신음하는 가련한 이들의 인간성을 구출하고 짐승을 짐승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사회라야 아직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작가의 호소다.
과연 그곳만이 지옥이겠는가? 세상 전체가 지옥이 아닐까?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성경은 세상이 곧 어두움이고 묘사하고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악이 충만한 지옥의 도가니는 영화 속에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강간이 자행되었던 여자 화장실이나 아니면 교장실? 말 안 듣는 아이를 세탁기 속에 넣어 돌려버리는 잔인한 재단 측 인사로서 기숙사 사감? 아니면 자신의 성폭행 비리를 인권단체에 고발했다고 골프채가 아이를 때리는 교사?
아니면 천사 같은 장로님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받고 있다고 법원 앞에서 기도하고 시위하고 있는 무진교회 목사와 교인들? 법정에 증인으로서 나선 산부인과 의사로서 강단당한 아이의 몸 상태를 제대로 증언해야 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일의 처신을 고려하여 위증하는 여의사? 판사와 검사를 좋은 조건으로 구어 삶아 기어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하는 법원 관행? 이 중의 어디가 지옥의 도가니일까?
진정한 지옥은 십자가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의로움과 인간적인 가치를 지켜내려는 그 몸짓이다. 교사로서의 가치, 교회로의 가치, 경찰관으로서의 가치, 교사로서의 가치 판사로서의 가치,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가치, 검사로서의 가치, 학생으로서의 가치, 인권단체로서의 가치, 부모로서의 가치, 이 가치, 저 가치, 내 가치, 네 가치, 각종 가치, 가치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 그곳이 지옥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원인과 결과 사슬로 이어지게 된다. 악한 결과는 필히 악한 원인이 있기에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한 원인만 처벌하면 악한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인간들은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보다 키가 작은 것(삭개오)은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 때문인가?
젊은 나이에 암이 발생된 것은 무슨 저주받을 짓을 많이 해서 생긴 결과인가? 교회 헌금이 안 들어오고 교인수가 적은 것은 그 개척 교회하는 목사가 무슨 저주받을 짓을 해서 그런 저주스러운 결과를 낳았는가? 망대가 무너져 18명 죽은 것은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생긴 결과인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자신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 어느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쪄서 대접한 것이 무슨 저주받을 짓이기에 하나 밖에 아들이 죽는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평소에 예수님 사랑한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오빠 나사로가 일찍 죽어야 하는 저주받을 짓을 했는가?
욥이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10자녀를 하루 만에 다 잃고 그 많던 재산을 몽땅 사라져야 했던가?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은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사라의 시기를 받아 애기 아빠 아브라함으로부터 버림받아 애가와 함께 정처 없이 유리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는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무슨 저주받을 짓을 했기에 한꺼번에 다 천사에 의해서 송장이 되어야 했던가? (왕하 19:35)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사고파는 것이 무슨 저주받을 짓이기에 노아 홍수 심판에 몰살되어야 했던가?
가족끼리 화목하고, 친구에 대해서 의리 지키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제 할 일 잘하는 자가 무슨 저주받을 짓이기에 ‘예수 사랑’ 안 했다고 저주받아야 하는가?(고전 16:22)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뿐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은 마땅히 하늘의 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말해주신 단독 사건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참된 하나님께서 참되게 하신 일을 가지고 인간들의 자기 인간성과 그 가치성를 근거로 대들면 그것이 곧 저주받을 짓이 된다.
야곱은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에서는 일방적으로 미워했다.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는 무슨 일을 하던지 상관없이! 따라서 구원과 저주는 순전히 하나님 소관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다. 모든 인간은 실은 이미 죽은 자들이다. 이것만이 도가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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