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도적질 하는 한국의 중대형교회-당당뉴스-옮긴글-이단교회-
십일조 떼어먹는 교회 | ||||
겉모습은 정통이나 속은 사이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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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였고 누구도 감히 교권에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온 백성이 모두 신도이었으니 교세 역시 막강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연보도 잘하였습니다. 아마 겉모습으로만 본다면, 당시 유대교는 정통성을 매우 잘 갖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극언을 퍼부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욕을 따르며 도리어 백성을 수탈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는 표현이 이들의 배도한 행위를 구체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역시 당시 유대교 부패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열심이던 교회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중세 교회입니다. 특히 162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무려 120년이 걸린 성베드로대성당의 증축은 교회사적인 사건입니다. 엄청난 헌금과 수고가 이 건물에 소모되었습니다.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지는 순간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친족의 영혼까지도 지옥에서 구제받아 천국으로 간다"는 거짓말을 하여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통해 이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화한 많은 교회에서는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이 모두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 '성전 건축'이니 '정당한 세습'이니 하며 불의한 거짓을 교묘히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 자폐적 증상이 시작되고, '건물 신앙'으로 그 타락의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건물을 '성전'이라고 오도하거나 그 부지를 '땅 밟기'하며 신성시하는 행위가 교세 확장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지, 성인, 그리고 성물을 따로 구분하고 신성시하는 행위는 중세 교회의 미신적 악습일 뿐입니다. 바른 교회는 진리의 전파에 힘을 쏟는 반면에, 사이비나 이단은 언제나 기만적 잔수를 부리며 외형적 교세 확장에 애를 씁니다.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교세가 확장된 것이 바로 진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유대교는 오히려 불과 한 세대 만에 로마군에 의해 그들이 자랑하던 헤롯성전과 함께 처참하게 멸망했습니다. 왜곡되고 직분자들은 부패했습니다. 신도들의 맹신과 무지 속에서 일부 사제들이 처자식까지 두고 교회 재산을 횡령하고 사유화하였습니다. 많은 수도원의 지하에서 유아들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수녀원의 화장실에 아이들이 버려지고 갓난아기의 시체가 벽 속에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독선적 교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였습니다. 타락하면 사단이 되는 것이고, 정통이 타락하면 바로 사이비나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그 가르침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공의를 지키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잘해 그 결과 세속적 복을 듬뿍 받으라는 그런 수준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신자들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지엽적인 것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귀한 삶이 어찌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정도에서 충족될 수 있을까요. 진실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잘사는 나라들을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또한 , 많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는 저주를 받은 것인가요 .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요.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바른 모습입니다. 단순히 외형적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 선교사나 목회자가 부족하여 전도가 잘 안 되고 교회 성장이 둔화하였다고 보십니까. 요즘 길에서 행인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번 말해 보십시오. 아마 욕을 안 먹으면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신도들이 신자답지 못한데 누가 예수를 믿으려 하겠습니까. 느껴지십니까. 또한, 한국의 수백억 또는 수천억짜리 대형 교회당에서 병든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시던 가난한 목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분수에 맞지 않는 제사장적 가운을 걸치고 화려한 대형 교회 높은 강단에 선 자들이 정말 종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는 다소 풍자적인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전심으로 계속 도우면 결코 부자가 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한국 중대형 교회들이 부동산 부자가 된 것은 결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경시하고 열심히 돕지 않았다는 강한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절박해하면서 사람은 경시하는 교회, 이는 병든 교회입니다. 이웃 작은 교회들이 셋방살이 좁은 예배당조차 다 채우지 못해 노심초사하건만,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확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미자립 교회들을 돕는 것 자체가 매우 좋은 선교이건만, 그들이 죽든 말든 자신만 키우겠다는 그 심보가 매우 비신앙적입니다. 하여튼 대형 교회 하나가 증축되면 근처의 작은 교회 수십 개 또는 수백 개가 줄줄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첫날부터 헌금 채를 내밀거나, 십일조를 제대로 못 하면 차별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거둔 돈이 과연 어디에 쓰이고 있습니까. 성경대로 한다고 호들갑 떨면서 막상 쓸 때는 성경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본래 가난한 이들의 몫인 십일조를 도대체 어떤 종놈이 감히 함부로 가로채는 것입니까. 목사들 연봉은 제때에 꼬박꼬박 잘 챙겨 가면서, 왜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즉시 나누어 주지 않습니까. 호통치는 목사들이 있는데, 이런 말은 먼저 목사나 장로들에게 해야 적합하지 않습니까. 구약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도적질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합심하여' 가난한 이들의 것을 도적질하는 교회가 하늘 아래 또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피처럼 소중할 엄청난 액수의 십일조를 거의 통째로 다 떼어먹고 이처럼 땅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사실은 십일조 뿐만이 아니라 연보 역시 본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매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건물도 필요하고 건강한 성장도 소중합니다. 다만 교회가 내면적 본질과 우선적 사역을 잃고 지나치게 겉을 치장하는 오류를 깊이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 오직 '기복'과 '확장'이라는 맘몬적 물레방아만을 열심히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헌금을 많이 거두어 교회당을 증축하고, 신도들을 더 모으고, 선교사를 더 많이 보내고, 신학교를 지원하여 목회자를 양산하고, 그리하여 교세가 확장되면 결국 다시 더 많은 헌금을 걷을 수 있게 될 것이라 는 극히 기업적 성장 논리가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를 확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정통과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그것과 전혀 다르거나 아닌 것을 말합니다. 예배, 잘 조직된 성직자들, 그리고 구름같이 많은 신도 등 거의 모든 것을 정통처럼 잘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성경 진리에 따른 바른 신학, 바른 목회, 그리고 바른 생활이 결여된 교회이었습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교단 상층부까지 매우 폭넓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부정한 뇌물을 주고받고, 공금을 횡령하고, 성추행을 감추고, 그리고 교회를 세습하며 사유화하는 일을 아주 당당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맹신화 또는 어용화한 장로와 집사들이 이를 방관하거나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교리는 비교적 정통인데 목회와 생활은 내부로부터 매우 지능적으로 사이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분의 신랄한 지적처럼 무슨 대단한 신학적 경륜이나 특별한 계시 또는 학문적 통찰력이 별로 없어도 단지 파산한 '양심의 찌꺼기'만이라도 조금 남아 있다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는 정통이니 보수니 하며 허세 부리지 말고, 진정으로 속 모습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바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정통이라는 틀에 가두고, 기득권을 포장하여 보수라고 주장하는 억지를 더는 부리지 말기 바랍니다. 부패한 영혼까지 팔아 사욕을 채워 속이 시꺼먼 정치 목사들이나 귀족 목사들이 정통이니 보수니 하며 썩은 무덤에 알량한 회칠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구토가 납니다. 자제하자는 안일한 주장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 진정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비리이지 비판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극심한 비리로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품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숨기고 덮는다고 그 상처가 아물거나 없어질까요. 이제는 그 상처를 공개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 비리에 대해 침묵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적하는 일임을 엄중히 경고하고 싶습니다. 생수로 마셔서는 안 되는 욕망의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대형 콘크리트 덩어리를 우상으로 모시고 저리 삽질만 하고 있으니 기복과 맹신으로 기만당하는 양들은 언제쯤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십니다. 서구의 많은 교회당이 술집이나 카지노 또는 모텔로 나갔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던 성소피아대성당이 오히려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고 관광객의 눈요깃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의 교회당도 타 종교에 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공룡처럼 커진 대형 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포식한 결과입니다. 본질은 외면하고 껍데기만 치장하여 순진한 교인들마저 교권주의자들의 배를 채우는 종교 업에 이용한 결과가 아닐까요. 만 명 교회를, 그리고 만 명 교회는 다시 십만 명 교회를 지으려 한다면 도대체 일은 언제 제대로 할 예정인가요. 해마다 무리하게 증축을 위한 재정을 모으다 세월 다 보내고, 과도한 은행 이자까지 갚으며 남은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 교육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데에 생색을 내려 하니 세계 개신교 역사에 보기 어려운 이런 기형적인 교회가 된 것이 아닌가요. 모여 정통이라고 자부하며 분주하건만 도리어 목회 비리가 진동하고 담임목사의 시녀가 된 장로들은 교회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과연 정상이고 그게 자랑거리입니까. 차라리 복부비만을 자랑하십시오. 많습니다. 그래서 건물과 시설은 크게 좋아졌는데도 참된 주의 종은 오히려 보기 어렵습니다. 집요하게 십일조를 강요하여 재정은 풍부해졌지만 이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교회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겉치장하는 데에 소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망국적인 기복 설교로 기독교 신자가 아닌 '기독교 환자'를 더욱 양산하고 있습니다. 것은 헌금을 바르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반듯한 교육관도 없는 허름한 예배당이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한 일꾼들이 많이 성장했습니다.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좁고 불편했던 건물이었건만, 요즘 그런 소박한 옛 모습과 옛 신앙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한국의 대형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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