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청년의 얼굴에 새하얀 머리칼을 가졌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지긋이 바라보기에 그는 아직 젊다. '왜 사냐면 웃지요'라던 어느
시인처럼 관조어린 웃음을 띠는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느끼는 건 건방지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오래된 그의 아픔 앞에 대범한 표정으로
일관하기도 어렵다.
"위암 선고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까지 암세포가 번져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들불처럼 몸에 번지는 암세포를 놓고 의사들은
항암 치료를 하면 1년, 하지 않으면 3개월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즈음
전 아직 서른 넷이었습니다."
두 아들과 아내의 처연한 눈빛.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병원에서 말한
삶의 시간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암 치료의 고통은
더 이상 살아있어야 할 이유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살아온 세월 자체를 변화시키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식이요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식이요법을 대체의학으로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얼마 남지 않는 생에 대해
더욱 불안해 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식이요법을 실행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식이요법을
실행해도 100명 중 3, 4명 정도만이 철저하게 제한된 생활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박영출 씨가 따랐던 식이요법은 막스 거슨'이라는 식이요법으로 유기농
야채즙과 곡식으로 구성된 무염 식이와 제독을 위한 커피 관장을
기본으로 한다.
항암치료를 받지않아 3개월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던 그는 식이요법으로
9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온몸에 종기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암은
다시 재발했다.
암, 그 모호함에 대하여
그가 다시 회생했던 건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힘을 억누르고 차후의 문제를
생각할 때였다. 며칠 밤을 하얗게 새고 그의 병상을 지키던 사람들조차 초췌한
모습으로 꾸벅 꾸벅 여명을 맞이할 무렵 그는 아무 일 없듯 세수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 십 수년을 암 때문에 고생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암은
참 알 수 없습니다. 다른 병처럼 증세가 점점 호전되다가 완치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병의 기세가 꺾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 그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던 하루.
한 생명이 다시 소생하고 희망을 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 몇 년의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가족들의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후에 가까운 친지와 함께 96년 캐나다에서
슈퍼를 경영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반을 잡기 위해 하루에 5시간도
못 자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암세포가 다시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재발. 그렇게 97년 재발된 암은 이제 다시 한 번 그를 사경으로
내몰았다. 삶의 끝자락을 보다
몇 년 동안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삶의 단맛을 보려는 순간에 다시 찾아온
시련은 너무 써 뱉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결국 아내와 자식들을 캐나다에 남겨두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홀로 탔습니다."한국에 돌아온 그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들을
두고 야반도주하듯 떠나 언남동의 한 지하방에 고단한 몸을 뉘였다.
" 밤마다 고통으로 벽을 북북 긁어대고, 나와 세상을 향한 미움만이
제 눈을 가리운 상태였습니다."
캐나다에서 귀국한 박영출 씨의 부인은 수소문 끝에 간신히 그를 찾아낸다.
이미 마음을 접은 상태였기 때문에 제 아내가 문밖에서 울면서 저를
설득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한 분이
마음의 문과 방문을 모두 걸어 잠근 저를 위해 몇 일 밤낮을 기도해
주시는 것에 감복을 받고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삶의 끝자락을 봤던 그때가 99년 초.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재발로
박영출 씨와 가족들은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99년 그 추운
겨울밤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등불을 들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암 환자도 마지막까지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박영출 씨는 현재 암환자 가족을 사랑하는 시민연대'(이하 암사연)의
감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통 속에서 원망과 회한의 눈물만을 흘리며
마지막 가는 길조차 불행한 암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모임. 박영출 씨와
'암사연'의 회원들은 막막하기만 한 암환자와 가족들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대체의학병원을 소개하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
" 대체 요법은 무엇보다 병의 초기에 실행하면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외국의 경우 암 발생 초기부터 양방과 대체요법을 협진하는
병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런 병원이 많이 늘어야 정확하지도 않은
효능을 믿고 돈을 쓰는 암환자 가족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가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혹, 자신의 희망을 담보로 약을 팔아보려고 하는 건 아닐까, 자신의 고통을
이용해 가족들에게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네는 건 아닐까 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 누구에게나 진실은 통하는 법입니다. 그 진실을 밑천 삼아 잘못된 정보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박영출 씨는 철 결핍성 빈혈로 많이 힘들다고 한다. 그렇지만 얼마 전
담낭 절제 수술에서 자신의 식이요법의 효과를 확인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너무 오랜 투병생활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가 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의사들도 제가 회복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정상인들도 1년 정도 걸린다는 회복을 2개월 반만에
거뜬히 달성하고 병원 문을 제 발로 걸어나왔습니다."
박영출 씨는 식이요법을 행하면 피가 맑아진다는 것에 매달렸다고 한다.
'ph7.4'. 인간의 피가 약알칼리성일 때 모든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강해지고
몸의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는 것의 입증. 그는 담낭 절제 수술을 하면서
암에 대한 마음 속 의혹도 깔끔이 걷어낼 수 있었다.
검사 결과 종양세포 제로의 수치.
" 피가 맑으면 암세포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얻은 순간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이러한 희망을 전해 주는 것이 저의 역할입니다."
박영출 씨는 이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힘들었던 99년
그때에 자신을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목사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과학도 포기한 질병, 암.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에게도 행복하게 웃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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