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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천지일보에서 보내온 16개의 질문과 답변 -이근호목사-대구 우리교회 목사-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3. 7. 19.

천지일보에서 보내온 16개의 질문과 답변 -이근호목사-대구 우리교회 목사-

 

 

 

  2013년 6월 26일 주식회사 천지일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보내어왔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성도들의 바른 믿음과 지식을 위해 참 진리를 알게 하는 질의문입니다. 이는 전국에서 성도들이 종교 담당 기자에게 보내온 내용입니다. 답은 성구(성경)에 입각하여 작성하면 됩니다.

 

① 아담 세계가 왜 노아의 전도(방주에 들어가야 구원받음)를 믿지 못했으며, 육적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전도를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도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언약을 성위하기 위한 용도로 주어집니다. 노아언약의 증거물로 주어진 방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저히 믿기지 못하는 식으로 제공되는데 이를 통해서 인간은 원래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점차 분명해집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실이 보다 명확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구원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는 배후에 수상하고 어두운 악의 세력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움의 사주를 받아서 인간들은 본성적이라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설명 드리자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면 마치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기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어 보냈다고 곡해하게 만드는 요소가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언약의 투입은 이 내막을 폭로시키면서 드러나는데 그 와중에서 '피' 곧 희생이 발생합니다. 아벨처럼 또는 방주 안에 있었던 정결한 짐승의 죽음처럼 말입니다. 정결한 짐승이 죽어서 부정한 짐승까지 물의 심판을 이겨내는 효과가 다 이 피에 있습니다. 이 언약은 장차 십자가라는 '새언약'을 통해서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노아는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이 작업에 마치 그 시대의 메시아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활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의 육적 본질 속에서는 여전히 함이라는 저주의 요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노아 자체의 훌륭함이 아니라 노아 안에 계신 주되심의 두 가지 속성인 공의와 자비가 그 속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합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② 구약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이들을 죽인 자들은 불신자인가, 타종교인인가? 어떤 자인가?

 

그냥 평범한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인 것처럼 그들도 인간이며 다같이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인 자질을 따져서 구원하시는 것이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심판해버립니다. 그래서 심판받지 않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짓는다'가 아니라 '죄를 위하여 인간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을 통원해서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더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죄가 더욱 죄로 드러나게 함이니라"(롬 7:7)

 

선지자들도 마땅히 예수님의 전도를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베드로도 또한 마찬가지요 12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식으로 예수님 면전에서 엉뚱한 논쟁을 했던 자들입니다

 

.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질로서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아담의 자손이 죄의 자손임'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나는 주께만 범죄했다"고 말입니다. (시 51:4)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고 말입니다. (시 51: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름대로 보호하고 두둔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예수님에게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마 16:21) 베드로의 인생 끝 날도 결코 자기 원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 21:18)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딤전 1장) 성령을 받는 성도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깊은 십자가 의미로 인하여 참으로 전에 미처 몰랐던 죄의 세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사도들의 편지에 나오는 지시와 명령들입니다. 이런 지시와 명령 앞에서 인간은 그동안 자신의 육신에서 나오는 죄의 위력과 위세에 대해서 더욱더 깊은 있는 체험을 하게 되고 따라서 오로지 '자기 의'를 가지려는 악마적 작태가 바로 자신의 육신을 통해서 신앙과 경건과 성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③ 예수님 재림 때 ‘믿음 가진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다(눅 18:8). 오늘날 기독교인인 영적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소유 대상에 관한 개념이 아닙니다. 성령을 인간이 소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이 그 인간을 소유할 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 집사가 설교 마치고 과감하게 죽게 되는데 이 설교할 때의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행 7:55)

 

즉 '성령 충만'이란 사태는 그 상황을 인간 본인이 조종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자기 부인을 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께서 바로 성도 자신을 책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책망하고 책망하므로서 그 사람은 성령에 붙잡혀 사는 존재가 됩니다.(요 16:8-10)

 

 

따라서 참으로 영적인 목사라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는 목회하면서 저로 하여금 천하의 몹쓸 죄인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얼마나 자기 의로움과 자기 세력화 혼이 나가있으면서 열중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이 사실 자체가 악마의 노림수임을 저는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교회나 저의 지도자를 따르지 마시고 오로지 성령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처럼 여러분들도 스스로 세력화되지 마세요. 그런 것들이 악마의 작용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목사가 되야 본인이 지옥가도 마땅함'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도입니다. 그 와중에서 예수닙께서 피 흘리신 이유를 알면 그 목사는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런 목사에게는 많은 협박과 유혹이 따릅니다. 자신을 좋아하고 교인들의 맹종이 그것이고 노회나 교단의 협박과 생계위협용 조치들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처럼 복음 전하다가 죽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아니되겠지요.

 

 

④ 재림 예수님은 언제, 어디의, 누구에게 오시며, 그 징조는 어떤 것이며, 오시는 그곳은 교단인가, 개인에게 오시는가?

 

 

'예수님 오심'이라는 개념 자체는 인간들을 휘감고 있는 시간적, 공간 개념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간들의 이성 현재 자신의 관찰하고 있는 그 세계관을 중심으로 하기에 그 세계관 밖에는 하늘 나라와 지옥이 있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용어를 사용하시면 그들이 구축한 세계관의 헛점과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세계이해는 중심 자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징조'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요한은 다른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 혹은 '성령 안'이라고 표현입니다. '예수 안'과 같은 표현이 '성령 안'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인간들이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일소에 붙이고 언약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신다'했을 때 그다음에 뒤따르는 보충 술어들이 바로 '어디에?" "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을 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여기에 관심을 갖겠다는 다음과 같은 더러운 심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들추어내는 환경이 됩니다.

 

 

 즉 "예수님, 저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있어요. 저 구원받고 싶어요. 하나님의 계시는 뭐든지 이해할 수가 있는데 저도 성령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저가 아직 모르는 게 있어도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강림은 믿지만 언제 오시는지 어디 오시는지 힌트라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그런데 이 정보를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 불쌍한 영혼들은 천국에 많이 모집하든데 보다 수월할 것 같아요. 천국에 많은 수를 여다 보내게 되면 하나님 나라도 확장되어 하나님도 좋고 우리도 좋아요 교회 부흥되니까 말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 할 겁니다.

 

 

바로 이 사고방식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사고방식으로서 예수님을 또다시 못 박아 죽이는 짓의 되풀이가 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이란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한해서 적용되기에 이미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갈 2:20)에게는 십자가 작업이 세상에 최종 그 진가로서 죄악된 세계를 상대로 보여주는 사태임을 압니다.

 

즉 이미 죄악된 세상이라는 점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종말 모드(mode)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를 종말 됨을 결정짓는 징조로 보는 겁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는 곧 재림과 강림을 새삼스럽게 기다리는 그 자체가 불신세계가 조장한 종교적 아이디어입니다.

 

 

 실은 자가 속에서 "나는 구원될 자격도 입장도 못됩니다"를 파악한 자들에게 있어 재림과 강림조치란 그동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아이디어서 만들어낸 희망사항을 그런 식으로 왜곡함과 관련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묵시적으로 대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재림, 혹은 강림의 취지는 이 세상을 좋아하고 푹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의가 무엇인가를 새삼 늘 돌아보게 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4-35)

 

사람이 세속에 푹 빠져 사는 것은 재림이나 강림의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당연히 세상 자체를 질적으로 달리 봐야 하는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림으로 바로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 강림의 진정한 취지입니다.

 

 

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은 등과 기름과 예복이라고 하셨다. 등과 기름과 예복은 각각 어떤 것인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유 가운데 특정 개념을 따로 떼내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비유가 방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접근하면서 필히 아담의 죄 가운데 필히 갖추는 사고방식이 바로 "나는 구원될 자격자다"라는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신의 행위와 사역을 말하기 위해서 주어진 비유를 마치 '자신들이 대비하고 방비하면 구원 획득이 성사된다'는 인식으로 덤벼들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처녀 비유에는, 등과 기름이란 예수님과 구원받은 자들끼리는 그들만이 아는 관계성이 수립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신부가 뭘 따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됨' 자체가 인간의 기대감으로 성사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기름 준비하고 등 준비하고 예복 입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고 신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바로 것들을 피해 가셔서 구원해내시기 때문입니다.

 

등 준비하기나 예복 준비하기란 예수님께서 마련주시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미리 알아서 숙제 준비물 챙기듯이 본인들이 챙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나름대로 구원노력에 대해서 하나님쪽으로 긍정적으로 동의해주는 재미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하심이 아니라 인간들의 선한 동기에 의한 의로운 행위의 협조와 가담으로 성사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의 취지를 무산시키려는 악마의 최후의 발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비유의 취지는 몽땅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본인이 가져가십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에서의 ‘예복’에 관한 사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복의 본질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이루어내신 모든 것입니다. 이 예복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겠다고 자신이 갖추어 입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자진해서 준비한 것들은 도리어 예복 입을 기회마저 가리게 만듭니다.

 

소를 새로 샀다든지 밭을 구입했다든지 장사하려 간다든지 본인 결혼식이 강렬한 우선 순위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일보다 자기 일이 급합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준비한 예복은 홀로 주님 되시기에 임의로 제공하시는 성령 안에서 입혀집니다.(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반대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서 주님의 원수의 면면을 다 드러내는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본인들은 어리석은 처녀가 되지 않기 위해 등과 기름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등 기름이 뭐예요?'라고 묻는 그 심보는 자기 나름대로 노력했으니 가상이 봐달라는 극히 인간들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 자체가 곧 비유 전체 덩어리라는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의 손수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성령이라고 우기는 것은, 성령을 따로 받아 챙기겠다는 구원욕심만 돋울 뿐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 금요철야기도회하면 성령 달라고 부르짖는 극히 악마적인 구원욕구에만 매달릴 뿐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면 모든 비유나 말씀의 성취는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 다 포함됨을 압니다.

 

 

⑥ 예수님 초림 때 당시 목자들이 예수께 선한 일을 인해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된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요 10:32-33).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말이 맞고 당시 목자들의 말이 맞지 않다. 지금의 목자들이 그때 있었으면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하기 전에 성령 받은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육신적으로 이단일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 오로지 강단에서 예수님만 증거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한일서 2:27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주님의 기름부음이 스스로 여러분들을 가르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성령 받은 목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교사의 은사가 있다고 하지만 이 '가르치는 은사'란 곧 이 목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위배하고 있는지를 고백해서 제발 목사의 양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고 설교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경우에가 바로 요한복음 21장,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예수님)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묻습니다. 이는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면 필히 자기 팬 관리를하게 마련인데 이는 구약 에스겔에 나오는 목자들처럼 아담의 본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모습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즉 "저기서 여기까지는 내 사람이고 저쪽 까지는 네 사람들이다"고 구분짓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교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조긱 구석구석에 퍼져있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악마가 이 세상의 권력 소유라는 방식으로 자기 안정성과 동일성을 갖추라고 부축이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지? 그렇다면 힘을 축적하라. 타인의 힘을 강탈하라. 이것은 권력의 속성이며 너는 이 속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에 그저 유감없이 발휘하라. 힘이 없거든 힘 있는 자에게 기 붙고, 여분이 힘이 남아돌거든 약한 힘을 강탈하라.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이며 여유 있는 행복이니까" 이러한 내면의 소리는 인간이란 주체성이 곧 힘의 배열로 통해 제자리 잡는 식으로 정립되는 현상들을 보이게 만듭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스스로가 전혀 '예수님의 양을 양육한 목자'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목자로 삼으십니다. 이는 결코 베드로는 자기 주체 파악을 알기에 '자기 양으로 삼지 않으려 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양을 섬기는 목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씩이나 베드로의 잘못을 확인하시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으로 주님의 양을 배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시키십니다. 베드로의 목회 방침에서 베드로는 '자기 양'을 만들 목적을 가질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⑦ 마 24장의 전쟁은 어떤 전쟁이며,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에는 사단 목자 곧 멸망자가 섰을 때 도망갈 산은 어디인가? 도망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전쟁이란 '주의 이름'을 겨냥해서 벌리는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이기에 인간은 빠져야 합니다. 인간이 나서서 해야 될 전쟁 양상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는 본인의 전쟁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참여의 방식이 곧 '자기 부인'입니다.

 

 

 전쟁 상황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소자' 곧 '작은 자' 내지는 '이름조차 알려질 필요가 없는 자'가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오늘날 이 전쟁은 특이하게 진행됩니다. 그 내막은 이러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했다는 소자는 말합니다. 의아해하면서 도리어 예수님께 반문입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양으로 간주되어 주의 오른편에서 천국에 입성할 소자가 정작 본인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전쟁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본인의 주체성으로 감지하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정답은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을 동원시켜놓고서는 모든 진행과 결실은 홀로 다 이루어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차후에 자기 백성들의 참여로 돌려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 입성하는 자들은 자신이 쓴다는 그 생명의 면류관까지 주님 발 앞에서 도로 내놓게 됩니다. (계 4장)

 

 

마태복음 24장에서 나오는 지명과 싸움은 십자가 지기 전, 그 시대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전쟁을 묘사한 겁니다. 여기에 역사적 상황이 발생되는데 이 발생된 상황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상황이기에 단회적으로 끝나버립니다.

 

영원한 전쟁의 양상은 십자가 지신 이후, 성령이 오시므로서 사도들의 편지에 나오는 양상으로 전환됩니다. 즉 특정 시간과 공간관은 그 자체가 이미 죄악된 의식으로 나온 발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천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년같이"(벧후 3:8) "땅에 있는 것처럼 사랑치 말라. 이미 너희는 그곳에서 죽은 자요 너희 생명에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골 3:3-4) 즉 '땅' 자체가 의미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지리적으로 어느 지점이냐는 바로 '보고 믿겠다'는 불신자의 일반적 대표적 해석이 됩니다. 인간의 육신 자체가 특정 공간과 시간을 의식하기에 (인간은 하루 간격을 기반으로 한 시간관으로 자기 일생과 자기 역사를 따로 갖고자 함) 이미 인간의 육신 자체가 악마의 취지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입장에서 특정 공간과 시간은 그저 사람들을 미혹하고자 하는 악마의 술책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인간은 이미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새언약적 안목에서 보는 롬 6:2) 사도 바울은 비록 고향을 떠나 그리스, 이태리나 터키 지 지방을 돌아다녔지만 결코 예루살렘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 멀어졌다는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는 ‘성령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옆에 계신 듯이 일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곳이 곧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일하시는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⑧ 예수님은 왜 밤에 도둑같이 와서 깨어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가는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일이 잘못인가? 이 밤은 어떤 밤인가? 자는 자들은 밤에 잔다(살전 5장). 자는 자와 깨어 따라가는 자 중 누가 구원받을 자인가? 따라간 적이 있는가?

 

종말이란 인간의 인식으로 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죄악된 자신이나 타인을 모델로 삼아 짐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육신과 그 사역으로 규정됩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이미 종말입니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대체 인간'의 등장 자체가 현 인간의 모든 행함은 소급해서 악마적으로 죄악된 것이라고 결정나버리는 겁니다.

 

그 등장하신 분이 바로 '인자人子'입니다. 이 '인자'라는 개념은 모든 언약을 완수한 사명이 담고 있습니다. 다니엘에서는 이 인자는 '지극히 높은 분의 보좌'에서 이 지상으로 투입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 철저하게 구약을 말씀으로 신봉한다는 유대 학자들에게 있어 메시아냐 아니냐를 '구름타고 올거야 아니냐'로 본 것입니다.(단 7:13)

 

 

자연 현상은 모든 게 말씀대로 움직이고 자기네들만큼은 이런 경지에서 말씀을 철석같이 믿기에 자연현상을 통해서 메시아됨을 파악하는데 자신감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관찰성 자체가 배후에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점을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지적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그도 자부하기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 바로 그런 해석 자체가 육에서 나왔기에 예수님을 육으로 해석한 겁니다. (고후 5:17)

 

늘 깨어있어 도둑이 오더라도 자신만큼은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의식에는 이런 바리새인적인 성경 해석이 깔려있습니다. 즉 "나만이라도 기어이 구원받고 말리라"는 정신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예수님 만의 구원'입니다. 다른 사람은 애초부터 구원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언약완성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아 '아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자기 이름,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의 행함으로만 가능하기에 속속들이 구석구석 예수님의 행함만 남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합니다.

 

 

바로 천국이란 이런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이 일체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 기쁨과 즐거움과 찬양으로 참여만 할 뿐입니다.

 

 

따라서 밤이든 도둑이든 이런 표현들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서 그 내막에 성도를 참여시키므로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찬양케 합니다. 성령님이 오심이 이로서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사람은 날마다 자기 잘남 위주의 성경해석을 파기당하고 책망받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깨어있음도 성도 본인의 능력으로서 불가능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⑨ 마 24장에 지붕 위에 있는 자와 집안의 물건은 무엇을 말한 것이며, 이때 도망갈 산은 어디인가? 이를 알고 가르치고 배우며 신앙하는가?

 

 

성경 본문을 보고서 '무엇이냐'라는 질의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것 알아서 뭘한건데요? 알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에게 있어 ‘안다’의 의미는 곧 반성과 수정이 자기 쪽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발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곧 행위와 창조로 작렬합니다.

 

말씀이 스스로 활동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 전 2:13)

 

 

인간의 이해도는 자신의 인식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기에 백날 수정과 반성을 해봤자 자신이 익히 아는 범위 안에서 진리처럼 간택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들의 움직임을 보고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해가시는 식으로 작용하십니다. 그래야지만 구원에 있어 일체 인간의 공로나 성과가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말씀 스스로의 작용으로 진행됩니다. 즉 집안의 물건과 지붕 위에 있는 자가 누군지를 인간들은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고 좋아들 하겠지만(그것도 그 시점에서만 일방적으로) 곧장 그러한 규정이 새로운 사태와 상황 속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해체되고 맙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은 자기 역사, 자기 구원을 위한 논리사슬을 따로 챙겨놓고서는 화물칸 빈칸에 화물 채워 넣듯이 거기에다 성경 지식들을 마구 퍼붓는 식으로 자기 구원을 성사시키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은 되지 않고 오로지 예수라는 존재를 구원의 모델로 삼아 모방과 흉내와 스스로 교육받기를 통해서 구원에 달성하려고 시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은 가지고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흘시게 된 주변 상황이 이런 상태로 되게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하신 것입니다. 이런 조치들도 모두 언약적으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내용입니다.

 

 

역사적 상황에서 일단 일어난 사건은 새언약 완성인 십자가로 의미가 집결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에서 '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언약완성개념)으로 성령을 타고 성도에게만 알려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인간의 구원시도가 모두 육적이고 악마적이다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한때 혼란스러운 유대역사 전쟁 상태는 하나님의 언약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들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형편없이 나약하고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지경으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⑩ 예수님과 천사가 와서 추수할 밭은 어디이며, 알곡과 가라지는 어떤 자인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비유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내용이 감추어져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초반에(15절) 이사야 6장의 말씀을 거론하신 것은 그 예언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필히 적용시키시겠답니다. 즉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도록" 그 다음, 비유로 천국을 말하겠다는 겁니다. 이 '깨닫지 못함'에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포함됩니다. 당연히 알곡과 가라지의 구별성도 인간의 지혜로는 파악해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모두다 가라지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알곡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그 어느 인간도 자신을 당연히 알곡으로 간주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은 언약 성취로서만 진행되고 그 주인공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언약관성에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 편에 가담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이는 겁니다. 바로 이런 속성을 지닌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했으니 자연적으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할 수밖에 없는 증거를 나타내게 됩니다. "천국이 너희에게는 알려졌으나 저희에게는 알려지지 아니한다"할 때에(마 13:11) 제자들이 얼마나 큰 자부심과 뿌듯함을 갖게 될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각자 자기 살 궁리를 찾아 도망칠 때, 진정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너희에게만 복이 있어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겠다"는 그 말씀은 제자들이 눈치 챌 수 있다는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자신들을 옹호할 수 알았지 설마 자신마저 무지한 상태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혹은 자칭 성도가 되고 싶은 자들이 일방적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적용시킬 줄을 미리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즉 "너희 인간들아. 알곡과 가라지 구분기준에 대해서 자신들을이 우선적으로 자신을은 일단 천국행에다 집어넣고 시작하는지 그 본심을 마음껏 발휘해보라는 겁니다. 가라지냐 아니냐 라는 것은 둘 다 일방적으로 심어주신 분이 어떤 기준으로 심었는가로 판정납니다. 사람들의 행세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가라지로 하여금 가라지 되게 하고 알곡은 알곡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 '일방성'을 시작하는 그 원천 출처를 주목하는 자만이 알곡된 자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나옵니다.(19-23) 그리고 구원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다름박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롬 9:16) 인간 구원에서 인간은 배제되고 인간의 열심과 행함도 배제되고 오로지 주님의 긍휼에 입각한 결정으로서 알곡은 알곡답게 예수님의 일방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피만 최종 고백하도록 인도는 자들만 알곡입니다. 그것이 결정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⑪ 예수님은 첫 열매였고, 그 다음은 예수 재림 때 주께 붙은 자가 두 번째 구원받을 열매라 하셨다. 주께 붙은 자는 누구인지 성경으로 답을 바란다.

 

 

부활의 능력은 언약에 의해서 적용되게 되는 바, 그 근거는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죽음은 언약적 의한 죽음이기에 구약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모든 구원의 개념들, 즉 '아들', '의로움', 생명', '심판', '악마', '택한 백성', '율법' 같은 용어들이 십자가 사건에 준해서 새롭게 완성체로 보이게 됩니다. 이 원칙에 따라서 기존의 모든 인간들의 육체는 일체 거부당합니다.

 

그것은 흙에 속한 형상인 동시에 육신의 죄에서 나온 발상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에 붙은 자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죄 씻음과 언약 완성상태 안에 같이 참여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시던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죽은 자'로서 합류된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이제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으로 살 때에 기대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하는 것에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로서 합류되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어 내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이 능력은 오직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고후 4:7)

 

 이 성령님의 능력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나온 효력으로서 몸의 부활까지 결국 제공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그 모든 것들이 성도와 더불어 같이 적용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도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강림하십니다.(살전 4:14-17) 특히 데살로니가 4:18에 그 취지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런 상태를 지켜주고 성사시키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보혜사되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처소를 친히 마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3에 보면, "그(성령님)이 오시면 우리가 저에게로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을 근거로 만들어내시는데(고후 5:17) 이는 이 새로운 피조물이 독자적으로 생활하기 위함이 아니라 평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신 그 상황을 그대로 자기 백성에게도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독자적인 자신의 기대는 십자가의 무턱을 넘어서 소원 달성으로 이어질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심판받을 발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해서만 아들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성도도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부활이 보장됩니다. 왜냐하면 그 코스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코스인 것이 예수님 부활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 14:20)

 

 

따라서 독자적인 행복을 염두에 두고 부활에 희망을 두는 생각들은 전혀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고 이단적입니다. 땅에서 겪은 괴로움을 부활을 통해서 만회하고 보상받으려는 의도 자체가 죄악된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홀로 갖는 행복이 곧 죄임을 자백하고 예수님의 용서 속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것만 축복이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성사는 본인들의 여망과는 상관없이 성령님의 찾아오심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 성령님이 곧 부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몸을 떠나게 되기 전부터 '예수 안'에 자이고 죽으면 '예수 안'에서서 잠자는 자, 혹은 편히 안식을 누리는 자들이 됩니다. 이 '잠자는 자'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고후 5:8/ 빌 1:23)

 

 

⑫ 유다서와 벧후 2장에 지위와 처소를 떠나 당을 짓고 옛 곳에 가서 다시 그곳에 처하며 옛것을 다시 먹는 자는 마 12장에 말한바 일곱 귀신이 들어감으로 7배나 더 악하다고 하셨다. 지금 이 자는 누구이며, 이 자도 이단인가? 마귀인가?

 

 

악마가 개인적인 몸에 대한 작용은 종말에 이미 정체가 예수님에 활동으로 인해 폭로당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몸은 악마에 의해서 마음대로 유린당하는데 악마의 인간 몸 다룸은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을 의식에서 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점차 악마의 노리는 바를 최종 들추어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병들린 자,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면서 귀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관여하신 몸에서 추방되게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이 노리는 바는 곧, 악마를 아비로 두고 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났으니"(요 8:44)

 

 

악마는 자신의 인간의 주인인 것을 감추기 위해 예수님에 대해서 극단적인 비난과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 형편을 두고 표현하십니다. “지금 인간은 악마의 집에 세간처럼 갇혀 있는 형편이다. 내가 가서 성령의 힘으로 집 주인인 악마를 묶어놓고 그 다음 세간들을 바깥으로 탈출시키는 도둑의 활동처럼 구원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곧 ‘하나님 나라’고 하십니다.(마 12:29)

 

 

따라서 예수님의 활동은 악마의 궁극적으로 인간 세상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있는지 그 원리와 원칙을 폭로하는 일을 발췌하시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은 사람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집어넣어서 여전히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게 만듭니다.

 

즉 “나는 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를 받았기에 이제는 악마를 이겨서 기어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에 이 성령 충만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더 이상 악마를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나는 나의 믿음에 준해서 그동안 지키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 영광도 될뿐더러 거룩한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주위에 보여주어 빛과 소금을 역할을 다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구약 때부터 주시겠다고 약속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과 병행해서 무사히 천국나라에 도착할 것이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곧 “나는 절대로 악마에게 패배해서 다시 나쁜 짓해서는 아니될 존재이다. 이 시험과 테스트를 통과해서 나에게 신앙이 탄탄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리라”로 이어지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갔던 그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이미 십자가로 의롭게 된 그 ‘의로움’을 인간의 행함의 의로움을 전환시키고서 보여주고자 하므로서 다시금 자의식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곧 악마가 노리는 바이기에 이것이 바로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짓이요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는 행위가 됩니다.

 

 

인간이 살아생전에 갖고 있는 신체란 외부에서 벌어진 사태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 신체의 허약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에 노출됨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인 죄’는 곧 신약에서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 도로 눕는 양상’이 되어 한 번 은혜를 받고 다시 타락해버린 자의 전형적인 배도자를 연상해주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라고 보기 십상인데 (벧전 2:22/히 6:6) 이런 왜곡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되었음’에 관한 증빙자료를 소지하고픈 유혹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선지자나 신앙의 모델이 되는 위인들의 긍정적인 자의식을 본인들이 재현하므로서 그 시대에서 선지자와 같은 위상을 갖추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반복적인 죄가 아닐까요? 참으로 ‘반복적인 죄’에서 벗어난 자들은, 반복적으로 작용하시는 말씀의 위력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죄악이 반복적으로 지적받는 양상으로 진행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기능 앞에서 ‘인간의 이름’이 지닌 기능이 실체가 죽을 때까지 더 깊게 파헤치는 반복입니다. 그래서 승리는 ‘말씀의 승리’가 됩니다.(요일 2:14)

 

 

 

⑬ 목자들 모인 장소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 안 한다.’는 논란까지 일고 있다(들은 성도의 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안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는가? 성경(성구)에 입각한 답을 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회개의 영이 함께 있을 경우에만 국한 합니다. ‘주의 이름’이 임재한 곳에는 모든 인간의 이름들은 무의미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름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이는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에는 항상 인간들이 평소에 의지하고 싶었던 힘과 병거나 애굽의 말이나 영웅들의 능력으로 거부당합니다.

 

 

정작 인간들이 의지하고 싶고 믿고 싶은 그런 힘의 집결체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않음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십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것은 반복적으로 주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의식은 항상 반복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갖추려는 본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나는 과거에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고 그들을 천국으로 이끌어서 그들의 모범이 되었고 내가 받은 은사로 많은 자들이 혜택을 입혔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다”는 발언이나 생각을 지금 자신이 현재 시점을 하게 된다면 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의 능력으로 낫게 한 것으로 오인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의 경건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십니까?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난 본인의 믿음입니다.”라고 증언합니다.(행 3:16) 즉 사도는 그냥 목격자, 증언자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자체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증언자에 불과합니다. (비록 교인들이 능력자를 흠모하더라도)

 

 

구원자는 십자가 죽으신 분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13)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주체적 동질성을 거부할 자가 없기에 모일 때마다 자기 자랑질 하는 죄를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능력이 나타난다면 그곳만이 바로 주의 이름이 함께 한 곳입니다. 

 

 

⑭ 마 24장과 계시록의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누구와 누구와의 전쟁인가? 이를 몰라도 되는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을 가르치면 마귀 신을 받은 자가 된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의 모든 것은 ‘주의 이름’과 ‘아담의 전쟁’입니다. 곧 인간과 하나님과의 전쟁입니다. 악마의 배후에 숨어있기에 주의 이름 되시는 분도 숨어계십니다. 단지 대리전쟁으로 진행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갈등과 다툼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모세를 상대로 따지고 원망하기 일 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은 모르고 단지 ‘살고보자’ 의지 자체에는 근본적으로 문제성이 없는 당연한 본성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물이 없어 원망했고 양식이 없어 지도자보고 원망했던데 그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살아있다면 적어도 기본적인 생존 요소는 챙겨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우선 살고 봐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지 혹은 감사하든지 할 것이 아니냐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신명기 전부를 통해서 보면, 인간은 결코 인간의 이름, 곧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곧 ‘우상숭배’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우상숭배 앞에서 필히 ‘자기를 위해서’가 붙습니다. (출 32:8/출 20:4/호 13:2/레 26:1/겔 14:7-8/왕하 17:7) 이는 곧 자기 교단을 위하여, 자기 교회를 위하여, 자기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하여,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비는 것은 모조리 다 우상숭배라는 말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미워하면서 (요 12:25)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상을 회복하는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 근거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업이 어차피 숨어있는 영적 배후 세력을 대변하는 대리전쟁 양상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효력에 대한 공격과 방어로 진행됩니다. 이 전개과정은 구약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능력’간의 싸움으로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이방민족의 우상과 여호와의 언약궤하고의 싸움이지만(삼상 4:22-5:4) 점차 이스라엘 내부 싸움으로 번지고 더 나아가서는 성신 받은 선지자와 왕과의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을 양의 탈을 쓴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되어 있고 갈라디아서 6: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8에서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⑮ 약 2천 년 전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언제, 무엇에 필요하며, 하나님이 예수의 피를 흘리게 한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피는 어디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래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죄 속에 갇혀 있기에(갈 3:22)) 자기에게 필요한 것과 자기에게 필요없는 것을 나름대로 규정하고 가려내는 작업을 수행하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의 피는 '필요없는 것'으로 분류되게 되는데 만약에 '예수님의 피'가 인간에게 필요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오해를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관점(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해 주의 주되심의 기능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 정죄는 바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할 지상의 피조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과 악마는 스스로 주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본질은 십자가 사건 유발자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배치된 그 시대의 인간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회적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배후의 어두움 세력들과 더불어 오고 오는 세대에 지속적으로 되풀이됩니다.(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되는 그 사상적 분위가가 오늘날 복음 전파 현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적인 그 의식,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 의식에 준해서 십자가에 반대하는 악마적 환경에 반복적으로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환경에서 속에서 돌아가신 목적인 예수님의 주되심이 이런 절차를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를 밟을 유일한 주님은(시 110:1-3) 오직 십자가 죽으심으로만 그 본질을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하고는 영원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흘리심 사건 말고는 악마는 인간의 지혜로부터 숨겨진 존재로 활약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은 십자가를 어리석게 됩니다.(고전 1:18, 23)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지혜는 성령님이 오는 자에게만 알려지게 됩니다.(고전 2:8-10) 따라서 심판할 때 오직 십자가 피흘리심에 근거해서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과 인류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는 마땅히 구원될 자입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로서 모든 이름들은 주의 이름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데 (빌 2:11) 이것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길입니다.

 

 

⑯ 예수님 재림 때는 노아 때와 같다고 예언되어 있다(마 24:37-39, 눅 17:26-30). 노아 때는 이전 아담의 세계가 끝났고 모세(이스라엘) 때는 노아의 세계 가나안이 끝이 났으며, 예수님 초림 때는 육적 이스라엘 시대가 끝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을 다 이루셨다고 요한복음 19:30에 말씀하셨다. 예수님 재림 때는 어떤 세계가 끝나며, 이룰 것은 무엇인가? 성구와 함께 설명을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

 

 

지금은 종말의 시대인데 이 언약적 종말은 기존의 시간상 끝부분을 말하는 종말이 아닙니다. 시간상 끝부분은 앞의 대목을 다치지 않고 연결이 가능하지만 언약적으로 말씀하는 종말은 앞에 있는 역사의 흐름과 곱게 연결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역사를 이해하는 인간의 역사적 인식이 곧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악마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당시까지 끌어오던 역사적 인식, 그 자체에 대한 고발과 정죄와 거부의 힘이 언약적으로 완성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종말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잘못이었다"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10에 보면, 이미 예수님 오시기 이전부터 '예수님의 영'이 선지자들 속에서 활약하여 그 시대에 이 종말성을 보여주었다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특정 인물에 대한 묘사가 각 시대마다 있어서 더 이상 '역사 진척'이란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무의미함을 제공해 적이 있습니다.

 

 

남은 일은 장차 메시아가 대신 죽으시는 그 피 사건 앞에서 취한 '회개'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욥은 이미 사적으로 종말의 기운을 받아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인물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일어난 종말의 힘이 구원되기로 작정된 사람에게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형식으로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도 마찬가지취지입니다. 비록 아브라함 예수님 때의 인물이 아니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 마땅히 저주받아 죽을 죄인인 것을 그런 식으로 자기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는데 보고 기뻐했다고(요한복음 8:56)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역사인식과 연결이 되지 않는 종말의 때요 심판의 때요 회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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