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의사가 밝히는 병원치료 충격보고서*하얀정글*
그는 의사다. 하지만 그는 청진기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의사로서 그동안 하지 못한 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고 한다. 의료계 내부, 그리고 의료 민영화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이 탄생한 계기였다.
'하얀 정글'은 의료계 안에서 본 의료계를 빗대는 말이다. 병원은 기업과 다를 바 없이 돌아가고, 의료인들은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를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병원은 건강보험이 지원하는 싼 검사보다는 환자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비싼 비급여 검사를 권한다. 의사들에게 매일 문자로 병원을 방문한 외래 환자 수를 알리고, 의사들의 수익 실적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발표한다. 실적이 좋은 의사에게는 인센티브를 준다. '수익'을 향한 병원의 조치들은 의료진에게 무언의 압력이 된다.
<하얀 정글>의 송윤희 감독은 "병원과 의료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다면 이 다큐멘터리를 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난 소감을 묻자 그는 다시는 '고발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힘없는 개인이 고발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편집자>
▲ 송윤희 감독. ⓒ프레시안(김윤나영) |
프레시안 : 의사이면서 감독이라는 이력이 독특하다. 영상 다큐멘터리에는 어떻게 관심을 뒀나?
송윤희 : 원래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 학생 때 휴학하고 독립영화협회 워크숍에서 독립극영화를 6개월간 만들었다. 그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복학하고도 영화에 대한 생각은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다.
의사가 하는 일은 대학병원에서 연구하거나, 희귀 수술을 해서 기술을 연마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단조로운 일이다.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다. 나도 영화 만들기 전에는 검진을 했다. 쉬는 날이 꼬박꼬박 있어도 못 하겠더라.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었고,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먹고사는 문제는 많이 해결된다. 하지만 내가 발전하기란 쉽지 않다. 의사에 따라 다르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싼 약 쓰자는 말에 대답 없던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
프레시안 : 굳이 의료 민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계기가 궁금하다.
송윤희 : 내과병동에서 일했을 때 쓴 글이 있다. 거기에 "내가 떠나보낸 환자"라는 표현이 있다. 죽인 게 아니다. 내과에 있으면 환자들이 죽어나간다. 내가 있던 곳은 적십자병원이었기 때문에 환자들이 대부분 가난했다.
실제로 한 할아버지가 <하얀 정글>에 나온다. 오랫동안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앓아 계셨다. 뇌졸중을 앓으면 주기적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아무리 의료급여 환자라고 해도 입·퇴원을 반복하면 돈이 많이 든다. 할머니가 열이 잘 안 가라앉았다. 할아버지한테 비싸더라도 센 항생제를 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사정이 안 좋았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주말 지나고 하루 만에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아들이 조금만 형편이 나았어도 열심히 살리려고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많이 경험했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봤다.
"한국판 <식코>를 찍자"
처음에는 소외 계층의 의료접근성 문제를 다루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만 다뤄서는 <인간극장> 수준의, 텔레비전에서 항상 봤던 병원비 못 내서 치료 포기한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밖에 안 된다. 해결책도 안 되고 너무 뻔하고, 대중이 봐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없다고 봤다.
▲ <하얀 정글>에 나오는 의료 소외 계층. ⓒ송윤희 |
의료 제도를 공부하면서 해결책이 뭘까 고민했다. 대중적인 영향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는 대중적인 콘텐츠가 없었다. 미국 다큐멘터리인 <식코>밖에 없었다. 한국에는 왜 없을까 고민하다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식코>의 현실 말고 한국도 이렇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두 가지를 담으려 했다. 첫째, 의료 상업화의 현실. 둘째, 의료 민영화가 어떻게 추진될 것인지를 담았다.
"그들은 환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윤희 : 사전 조사를 할 때 어느 병원에 다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걔네(의료기 관련 회사들)는 환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물건 팔 생각밖에 안 한다고. 기업이 돌아가는 형식으로 그들의 사업 아이템을 실현한다고 했다. 비슷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인터뷰하다가 취재원들을 소개받았다. 다뤄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더라.
"위암 수술에 코디네이터가 로봇 수술을 추천한다. 파일에 수술한 부위를 비교해 놓았다. 위암 수술 후 꿰맨 자국을 보여준다. 끔찍하다. 환자 측은 (그 사진을 보고 아무리 비싸더라도) 로봇 수술한다고 한다. 자동차 파일 보여주듯이 비교한다. 로봇을 처음 들였을 때 1년에 30건밖에 못 했다. 그 뒤로 갑자기 늘었다. 의사들도 예전엔 안 권하다가 이젠 마구 권한다."(<하얀 정글> 내용 일부)
▲ 로봇 수술 광고. ⓒ송윤희 |
"오늘 환자 ○○명입니다"…의사 실적, 일등부터 꼴찌까지 등수 매겨 공개돼
프레시안 : 취재하면서 어떤 내용이 새로웠나?
송윤희 : 나는 '30초 진료'가 진짜 있는 줄 몰랐다(<하얀 정글>에는 대형병원이 환자 한 명을 보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시간을 재는 장면이 있다. 결과는 평균 31초였다<편집자>).
의사도 놀라는 장면이 꽤 있다. 의사 인센티브는 대부분의 병원에서 시행되니까 안 놀란다. 그런데 의사 휴대전화로 "오늘 진료 환자 ○○명입니다"라고 일일이 문자 오는 장면에서는 의사들도 놀라더라.
일반인들이 놀라는 부분은 과별로 의사 실적 가지고 등수를 매기는 장면이었다. 거의 모든 병원이 다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병원들끼리도 경쟁한다. 이를테면 "A 병원은 외래진료 성과가 얼마인데 우리도 이 정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서로 실적을) 비교한다. 내시경 검사를 할 때마다 의사에게 인센티브를 주기도 한다.
▲ 한 대형병원 의사는 매일 외래 진료 환자수를 문자로 받는다. ⓒ송윤희 |
"우리 의료계가 너무 '돈돈'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감독이 의사라서 의료계 내부 사정을 더 잘 알 것 같다.
송윤희 : 우리 사회에 그런(비판적인) 사람이 있다. 90%는 조직에 안 좋은 측면이 있어도 숨기고 싶어 한다. "여기서 밥 먹고 사는데 이 정도쯤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10% 미만의 사람들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걸 기꺼이 말해 준다. 어떤 분들은 더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우리 의료계가 너무 '돈돈'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레지던트가 MRI를 지시하면 월급에서 얼마 더 준다. 어느 순간부터 MRI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
"개원가에서도 지나친 검사가 막장으로 간다. 싼 위내시경 수가를 보완하려고 조직검사를 한다. 조직검사가 필요하지 않아도 하는 경우가 있다."
"성과를 자꾸 내야 하니 교수가 10시까지 진료를 본다. 자꾸 비교해서 돈 벌려고 한다.슈퍼마켓이 대형화되는 것처럼 병원도 똑같다. 큰 자본들이 잡아먹는 느낌이다. 교수회의 때 파워포인트로 일등부터 순위 나오고, 얼마 벌었는지 월별 실적 등수를 다 얘기한다. 교수들도 스트레스받는다." (<하얀 정글>)
"다시는 고발영화 안 만들겠다"
프레시안 : 다큐멘터리에 한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힘들지 않았나?
송윤희 : 다시는 고발영화는 안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대중들은 고발장면이 쇼킹하겠지만, 고발 이야기를 할 때는 전날 잠을 못 잔다. 긴장한다. 카메라를 들고 가면 자신만만해야 하는데 속으로는 두근두근 떨린다.
병원 안에 카메라가 허용이 안 된다. 찍는 것 자체가 금기다. 몰래 카메라였다. 평범한 사람은 몰래 카메라를 찍을 일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다루려고 하는데 안 떨릴 수가 있겠나. 물론 내가 마이클 무어(미국의 의료시스템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식코>의 감독. <편집자>)였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나는 <PD 수첩>제작진이 아니다. 파워가 없다. 한 개인이 고발영화를 만들기란 힘들다는 것을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
"진료비 확인 요청을 했더니 비급여로 3400만 원이 나왔다. 병원이 불법 비급여 청구를 했다. 1990만 원이 부당 진료비로 확인됐다. 민원을 걸자 병원은 민원을 취소하라고 설득했다. 어떤 의사는 "기껏 살려줬더니 뒤통수친다"고 했고 다른 의사는 "다시 재발해서 입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돌려서 얘기하더라. 의사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 문제다. 보험이 되는 진료를 보험 안 되게 바꾼 거니까. 의사도 직원이다. 직원이 월급 받는데 회사(병원) 방침을 따르지 않기란 힘들다. 의사만의 탓은 아닐 수 있다." (<하얀 정글>)
"의료 민영화는 내 이야기"
프레시안 :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과 영화를 만들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레시안(김윤나영) |
송윤희 :
영화에 '밥가'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밥은 하늘입니다. 밥은 서로서로 나눠 먹습니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 장면이 좋다. 사회는 자본화되고, 자본화되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이웃이 있다. 영리의료법인이 생기거나 의료 민영화가 되면 나라고 소외되지 않을까. 의료 민영화는 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밥은 하늘이고 서로서로 나눠 먹는 것처럼 국가가 모든 국민이 건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어줬으면 한다.
아쉬운 점은 중산층을 취재하고 싶었다는 점이다. <식코>는 맨 앞에 몰락한 중산층을 보여준다. 그런 사례가 한국에도 있을 거다. 차 한 대 있고, 40평 아파트에 살고, 애들 대학 보내고, 아버지 퇴직하고 연금받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외국에 가는 중산층. 병원에 가면 그분들조차도 어려운 점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섭외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영화의 취지에 동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환자 블랙리스트가 있다. 환자를 진료하려고 하면 (예전에 내지 않은 진료비가) 뜬다. 지난 진료비를 정산 안 하면 진료 자체를 안 한다. 심지어 응급실로도 십몇 년 전 데이터가 뜬다. 밀린 돈을 내야만 진료를 해준다. (돈 안 낸 상태에서) 진료해주면 윗사람에게 시말서감이다. '몇 년 전 진료비 누락된 거 처리해야 합니다.' (응급 환자일지라도 돈 안 내면) 다른 병원 가라고 해야 한다." (<하얀 정글>)
"건강은 상품이 아니다? 1980년대엔 물도 그랬다"
프레시안 : 영화에 한국 의료계의 문제점이 많이 나온다. 영리병원 문제도 있고, 과잉 진료 문제도 있다. 환자들은 돈이 없어서 죽어간다. 한국 의료 시스템에서 딱 하나만 꼽아본다면 뭐가 제일 문제일까?
송윤희 : 막장 자본주의다. 자본의 속성상 시장을 넓혀야 한다. 망하거나 넓히거나 둘 중 하나지 유지가 안 된다. 의료마저도 시장으로 편입하려고 한다.
<하얀 정글>에서 "이제 한국이 먹고 살 게 없다. 성장 동력은 의료밖에 안 남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건 이 세계에서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 같다. 할 수 있는 건 다 상품화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걸 상상도 못했지만 지금은 물 사 먹는 게 당연하다. 1980년대에 물이 상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품인 것처럼, 건강 역시 지금은 덜 하지만 앞으로는 사고파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프레시안 : 영화 상영 계획을 들려 달라. 더 나아가 앞으로의 다른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송윤희 : 편집 작업 중이고 곧 완성본이 나온다. 아직은 한 사람이 보기는 어렵고 공동체 상영 신청을 해야 한다. 공동체 상영 신청은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하면 된다. 어떤 감독이든 자기 영화는 개봉되는 게 목표다. 아직 그 단계는 힘들다. 자본도 부족하다.
여건이 되면 영화를 또 찍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탈진 상태다. 아이를 낳고 추슬러야 하는 상황이면, 아기를 더 낳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딱 그 느낌이다.
건보사각지대 놓인 환자 외면… 배보다 배꼽이 큰 각종 검사비 추한 현실 까발리고 싶었다
돈독 오른 한국 병원들
수입순위 공개해 의사 닦달, 30초 진료·부당 청구 사례 만연… 불만 토로하면 되레 으름장도
참말로 결기 충만한 올곧은 사람이다. 불의와 부조리에 주눅들지 않고 정면으로 화끈하게 승부를 걸었으니 말이다. 지극히 필요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의사(산업의학과 전문의)로서 한국 의료계의 민낯을 깡그리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하얀 정글'을 만든 감독 송윤희(32)씨 얘기다. 사실 환자는 한국에서 객체가 돼 버린 지 오래다. 누구도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이윤을 위한 대상으로 볼 뿐이다. 그러니 환자의 권리 같은 것은 외계인의 넋두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이 한심한 상황을 입바르게 까발린 것이 이 영화다. 물론 이런 현실을 물고늘어졌던 언론이나 시민운동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료계 자신은 굳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인 송씨가 직접 자아비판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부의 역적이 될 수 있는 싹을 스스로 키워 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수호하기 위해 산업의학과를 전공한 그의 과거 내력과 개업의나 큰 병원 의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건강과대안이라는 대안 연구 단체에서 상임연구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그의 지금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 실한 젊은이를 만나 '하얀 정글'과 그의 인생에 대해 살짝 들춰 봤다.
어떤 계기로 이 시원한 영화를 만들었나.
"남편(이선웅ㆍ39 )을 통해 이길도씨의 팍팍한 사연을 듣고 나서였다. 남편은 안산의료생협 의사인데 하루는 걱정 그득한 얼굴로 이씨 얘기를 했다. 당뇨병인데 국가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의료급여는 작은 집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의료급여라는 게 완전히 쫄딱 망한 사람 아니면 해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건강보험이라도 돼야 하는데 당뇨병으로 오랜 기간 돈을 못 벌면서 건보료를 내지 못해 이 역시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결국 몇 만원 치료비가 없어 병을 키우는 상황이었다. 남편도 이 사람 집에 몇 번이나 찾아갈 정도로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얘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의료급여도, 건보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의료 사각지대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업의학과 전문의고 현재 연구 단체에서 일하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험은 없지 않았나.
"지금은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으로 있어 임상진료와 거리가 있지만 산업의학과 레지턴트 할 때인 2006~2007년 임상파견으로 적십자병원에서 내과 주치의를 했었다. 당시에도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깊이 느꼈는데 남편에게 이씨 얘기를 듣고 난 뒤 귀가 번쩍 뜨였던 것이다."
영화엔 이거 말고 다른 내용도 많던데.
"이 사람만 다루면 가난한 사람의 불쌍한 얘기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형적인 '인간극장'식 스토리 말이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는 근본 문제를 파고들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의료 체계 전반으로 시각을 넓혔다."
장삿속이 된 한국 병원의 의료 현실에 대한 고발도 충격적이다.
"한 병원이 교수회의 때 의사들의 한달 수입 순위와 환자 수를 파워포인트로 보여 주면서 경쟁을 부추긴다는 부분인데 영화에는 의사들의 증언과 이들이 제공한 자료가 나온다. 이 장면을 직접 찍었으면 엄청났겠지만 증언과 자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의사들이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늘 검사 몇 건 했나, 그러면 월급을 얼마 더 받겠네 하고 세어 보게 된다'고 털어놓은 부분은 의사인 나 자신도 쇼킹했다."
병원이 이렇게 무작정 실적 위주로 가도 돼나.
"경영을 생각하면 병원도 의사들의 환자 수가 얼마인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의사도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환자 수와 더불어 논문 등 다른 요소도 함께 평가됐는데 이제는 막가파식으로 가는 것이다."
병원들의 편의주의를 지적하는 장면도 있다.
"우리 할머니가 백내장으로 한 대형 병원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병원은 국소마취는 안 한하고 전신만취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협심증이 있어 전신마취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심장 상태를 알기 위해 검사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100만원에 가까운 신장관류검사. 저렴한 신장초음파검사가 있는데도 이걸 했다. 이렇게 되니 백내장 수술비(수술받진 않았지만)보다 훨씬 비싼 검사를 받게 된 셈이다. 그리고 황당 시리즈의 절정은 병원의 결론. '전신마취는 안 좋겠네요. 그런데 우리 병원은 국소마취는 안 하니 안녕히 가세요.' 큰 병원들은 대개 이렇게 정해진 공정이 있고 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30초 진료를 고발한 부분 역시 공감이 간다.
"몰래 카메라로 진찰받고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들의 불만 가득한 모습을 찍었다. 사실 환자들 병원 한번 가려면 오가는 시간, 대기 시간 포함해 2시간은 걸린다. 그런데 의사가 보는 것은 달랑 몇 십 초. 그렇다고 의사들 붙잡고 오래 질문할 분위기도 아니다. 뒤에 환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니."
백혈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박진석씨의 사연은 정말 병원에 혀를 차게 하던데.
"병원은 원래 박씨에게 백혈병 치료를 위해 골수이식을 권했다. 7,000만원에서 1억원 든다고 했다. 하지만 하면 집안 완전히 거덜나고, 그렇다고 100% 산다는 보장도 없어 항암치료를 했는데 운 좋게 낳았다. 그런데 항암치료 진료비 청구서를 보니 비슷한 치료를 받은 옆 환자와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일일이 대조해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 병원에 따졌다. 그러자 병원은 '치료해 줬더니 뒤통수 친다' '다음에 재발하면 치료 안 해 준다'며 협박했다. 결국 박씨는 한국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진료비 확인 신청을 내 치료비의 절반이 훌쩍 넘는 1,900만원을 돌려받았다. 병원의 일상적 부당 청구와 문제가 생겼을 때의 무성의한 대응 방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박씨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한국 의료 체계는 민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재정은 공공에서 맡는 이중구조인데 이게 문제다. 물론 병원이나 의사들 대부분 양심적으로 할 것이다. 그러나 박씨의 사례를 보면 안 그런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공공이 민간에 명확하게 선을 그어 줘야 한다. 이건 '하얀 전쟁'에 주제이기도 하다. 보다 공공 통제와 참여를 강화해 국민의 의료비 개인 부담을 삭감하고,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며, 병원이 이윤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정부에서 의료 선진화 정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 영리의료법인 허용 문제도 다뤘다.
"앞서 말했듯 한국 의료 체계에서 공급은 민간이 하지만 재정은 공공의 영역이다. 돈을 공적으로 조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은 공공 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민영화는 그나마 남아 있는 55%의 공공 의료마저 완전히 허물겠다는 얘기다."
공공 의료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의사를 공무원으로 하자, 뭐 이런 식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선진국 좋아하니까 얘긴데 대개 70%가 공공 의료다."
처음과 끝이 수미일관인데.
"영화 시작할 때 천장 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두 손으로 모아 받는 모습을 보여 주고, 영화 막바지에는 그 손이 천장을 뚫어 물이 콸콸 쏟아지도록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경제가 성장하면 넘쳐 흐른 물방울이 퍼져나갈 것이라는 트리클다운 이펙트의 허상을 깨라는 의미다. 물방울 몇 방울에 집착하지 말고 천장을 뚫어 물이 확 쏟아지게 하자는 말이다."
편집돼 빠진 것 중 아까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선택진료비 부분이다. 이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보여 주려 했다. 시퀀스까지 만들었는데 통째로 잘라 내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큰 흐름에서는 결국 같은 맥락이어서 빼는 게 나았다."
_제목은 왜 '하얀 정글'인가.
"'하얀'은 의사 가운을 의미한다. '정글'은 전쟁터쯤. 의료계가 정글 같다는 얘기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다뤄진 얘기를 굳이 영화화한 이유는.
"언론은 과잉 진료, 상술화한 진료 같은 주제를 파편화해 다뤘다. 나는 이것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고 싶었다."
의사라는 점이 이 영화를 만든 모티브인가.
"검사였다면 뭔 일 땜에 검찰을 나와 아마 검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사다 보니 이런 게 나왔다."
미국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정조준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와 비교되던데.
"'식코'가 대중의 언어로 의료 체계의 모순을 정확하기 집어내고 있어 모티브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만큼 대중적 언어를 쓰진 못했다. 보장성 강화 같은 말은 내가 봐도 좀 그렇다."
영화는 공부한 적이 있나.
"아주대 의대 다닐 때 영화에 미쳤다. 2001년 본과 2학년을 마친 뒤에는 반년 정도 독립 영화 워크숍에 참여해 단편 영화 두 편을 찍었다. 제목은'방안의 둘' '특별한 시간'인데 휴먼 드라마다. 사실 좀 끼가 있다. 글 쓰는 것 좋아하고, 고교 땐 연극도 했다."
촬영 스태프 2명을 빼면 기획 구성 내레이션 편집까지 맡아 무척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완전 노가다였다."
건강과대안에 나가면서 짬을 내 찍는 점도 어려웠을 텐데.
"그쪽에 민폐를 세게 끼쳤다. 8월에 기획을 하고. 9월 중순부터 10개월 정도 찍었는데 마지막 3개월은 못나갔다. 그땐 거의 매일 밤샜으니까."
굉장히 빨리 찍은 편이다.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는 3년 촬영에 2년 편집이었다. 나는 이런 휴먼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주제를 파는 것이어서 좀 적게 걸렸다. 성질 급해 밤도 많이 샜고."
처음엔 공동체 상영을 했다는데 어떻게 하는 건가.
"독립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극장에 안 걸린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10~50명씩 모여서 보는 것이다. '하얀 전쟁'은 주로 의료생협들과 노조 같은 진보 공동체들이 많이 봤다. 물론 일반 시민들도 봤다. 지금까지 64회를 했는데 보통 카페에 스크린 걸고 한다. 좀 상황이 좋은 덴 소극장 빌려서 하고."
1일부터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는데 독립 영화로는 이례적이다.
"영화사 진진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 영화에 관심 있는데 극장 상영 어떠냐.' 당연히 좋다고 했다."
왜 극장 상영하자고 했을까.
"지금까지 보면 다큐멘터리도 편중이다. 용산 참사는 4편이나 제작됐다. 반면 내 영화는 주제가 독특하다. 또 일반인들이 접근 불가능한 내용을 의사가 카메라 들고 찍었다는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
극장에서 성공하려면 이 문제에 관심 없는 일반 관객이 많이 와야 한다.
"병원 다니면서 가슴 답답했던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이 찾을 것이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900만원인데 남편이 줬다. 우리 집에서 젤 부자니까."
수익금은 어디 쓸 작정인가.
"비용 제외하고 전액 사회 환원하려 한다. 독립 영화계와 환자를 위해 쓰고 싶다."
사람들의 응원이 벌써 쇄도한다고 들었다.
"내게 좀 과분한 칭찬인데 '당신 같은 의사가 필요하다'란 응원 글을 이메일이나 블로그 등을 통해 많이 보내 준다. 그런데 이게 '소영웅주의에 불과하다'는 욕도 부른다. 어쨋든 감사하다."
의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한 의사와 인터넷으로 서로 리플을 달며 얘기를 이어간 적이 있다. 그 의사가 주장한 요지는 지나친 일반화에 대한 걱정이었다. 몇 개의 사례로 전체 의사한테 돌팔매를 보내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목적은 아닌데 그럴 소지가 있다면 죄송하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다큐멘터리에 질렸다. 너무 힘들다. 인간이 할 짓이 못 된다. 나이 든 다음 내공이 쌓인 후 해야겠다. 당장은 극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가득 담긴 그런 드라마."
1971년 2월 닉슨부통령과 민간보험회사 카이저는 의료보험제도를 민간회사가 운영하도록 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국민들에게 새로운 의료헤택을 가져다 줄 거라는 의료민영화였다. 의료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진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국가보험이 아닌, 민영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민영보험에 가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 전 국민의 17%인 오천만 명이었다. 미국 의료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국가가 의료정책을 포기하면, 국민들이 생존을 위협받는다는 점과 한번 바뀐 제도는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공공병상비율은 30%로 우리나라의 18%보다 높으며, 의료비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한국과 비슷하다. 다만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미국에는 없다. 중산층이라도 큰 병이 나면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 박진석씨는 백혈병에 걸렸다. MB정부는 영리의료법인 설립을 서두른다. 현재 의료법인은 비영리목적이다. 병원에서 벌어들인 돈은 병원에 투자되어야 한다. 영리의료법인이 되면, 번 돈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래서 투자자를 모집하고, 병원 수익에 따라 배당금을 지급한다. 주식회사의 출현이다. 그렇게 되면 내원하는 환자들은 견적서의 숫자로 평가될 것이다. <하얀 정글>이 더욱 더 무성해지는 미래. 송윤희 감독은 산업의학과 의사로서 의사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담아내려 했다. 쉽지 않은 인터뷰에 응해준 동료의사들. 모두가 문제에 대해 같은 인식을 하고 있지만, 제도적인 장벽에 부딪혀 관성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얀정글 예고편
마이클 무어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는 의료보험이 없는 릭이라는 남자에게 어떤 일이 닥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두 손가락이 잘렸다. 중지를 붙이는 데는 6만 달러, 약지를 붙이는 데는 1만2천 달러. 돈이 없는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포기했다. 보험에 들어놓으면 안심이라고? 감독은 또 다른 영상을 내민다. 갖가지 명목을 들어 보험급 지급을 거절하는 거대 보험사들의 횡포.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지급 불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는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영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대통령의 포토타임 때나 볼 수 있는 허수아비 역할을 거부했다. 대신 그동안 왜곡돼 왔던 의료현실을 바꾸기 위해 해결사를 자처했다. 전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대통령 산하 의료개혁 위원회의 장을 맡은 것이다.
미 의회에서 의료의 공공성 강화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고, 힐러리는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며 반대파를 설득해 나갔다. 딕 알미(Dick Armey) 공화당 의원의 반격에 '잭 케보키언 박사'(130명을 안락사시켜 유명해진 죽음의 의사)를 언급하며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험사들의 로비가 시작되자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보험회사는 의원의 수보다 4배나 많은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의원들을 매수하였다. 국가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은 좌초했고, 현재 힐러리는 상원의원 중 두 번째로 많은 돈을 보험회사에서 받는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있으면, 혜택은 없다
송윤희 감독의 <하얀 정글>은 의료영역에서마저 미국을 벤치마킹하려는, 아니 청출어람하려는 한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했다는 한 환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시작한 촬영이었다.
"거의 그 말기 암 환자 같은 그런 모습이셨는데, 배에 덩어리가 언제부터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는 뭔지 모른다... 몇 년 동안 병원을 안 가서... 놀랐던 게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못 갔다고 해서 놀랐지. 한 달에 몇 만원 하는 거가 힘들어서."
당뇨병으로 몇 년을 고생한 이길동씨는 몇 만 원의 경제적 부담도 버거운 사람이다.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병원문을 나서자 돈이 없어서 못 가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급여 제도가 있지만, 최저 2%에 들지 못하고 어설프게 가난하면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자기 집이 있으면 안 된다. 생계 수단으로 어쩔수 없이 쓰는 낡은 경차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다리 이렇게 내려오는데… 요기를 수술을 해야 돼요, 그러더라고. 근데 내가 안 한다고 그랬지 그때는. 의사 선생님이 왜 안 하냐고 그래서 무서워서 안 할래요 하고… 그래도 자존심은 살아서 허허... 그럼 하지 마세요. 평생 그렇게 사실래요? 그러대. 그래서 안 할래요.. 안 할래요...(눈물)"
이옥 할머니에겐 낳는 과정에서 뇌손상이 와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한 아들이 있다. 그 아들도 돈이 있었다면 수술을 받고 정상인처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노부부는 근근이 종이 박스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의료급여 헤택을 받을 수 없다. 집이 있기 때문이다. 타워팰리스든 월셋방이든 집은 집인 것이다.
멕시코와 미국 다음으로 꼴찌에서 세 번째인 한국
"이식 수술하는데 7000만 원에서 1억을 갖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생각해봤죠, 1억이라는 돈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인가. 이식했다고 100% 사는 것도 아니고.. 고민 끝에 치료 거부 선언을 햇어요. 나 혼자 죽으면 그거 다 없애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 거죠. 남아있는 가족들한테 그나마 사망 보험금이라도 나오니까…."
돈은 있지만 가족을 생각한다면 쓸 수 없다. 결국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저렴한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것도 3500~40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다행히 진석씨의 케이스는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의 완치율이 비슷했기에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을 바랄 수 없는 환자들은 지금도 높은 병원문턱에서 좌절하고 있다.
병 한 번 나면 가족 전체가 패가망신이라는 비극은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병이 났을 때 나라에서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의 공공성은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하는데, 의료제공체계의 공공성과 의료재정체계의 공공성이다. 의료제공체계의 공공성 지표는 해당 국가의 전체 병원 수에서 공공병원 수의 비율 또는 전체 병상 수에서 공공병상 수의 비율을 따져 계산하는데, 우리나라는 병상수 기준 18%로 미국의 30%보다도 낮다. 의료재정체계의 공공성 정도는 국민의료비 중 공공지출의 비율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의료비 공공부담률이 55%로 멕시코와 미국 다음으로 꼴찌에서 세 번째이다. 참고로 전체 OECD 국가 평균은 73%이다.
현 정부에서는 그 해결 방안으로 의료선진화를 내세운다.
"의료 산업발전, 의료서비스 질의 향상, 경제 구조의 변화. 의료 산업의 선진화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이다. 그 과실은 모두 환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한다. 사십년전 닉슨이 했던 말이 한국에서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 하지만 의료시장은 경쟁에 의한 가격인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문화생활, 의복, 전자제품 등은 소득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구입을 미룰 수 있지만 건강을 찾기 위한 의료서비스는 매진되기 전에 사야 한다.
가격이 싼 제품은 할인마트에서 묶음제품으로 사지만, 의료시장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소재한 3차 병원의 진료를 받으러 간다. 미어터지는 대기실에서 2~3시간 기다리며, 고작 30초 진료를 받지만 아무 불평이 없다.
돈이 없는 환자는 환자가 아닌 것이다. 돈이 안 되는 환자는 쫓겨나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더 추가되는 옵션이 있다. 바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의 완화다. 지금 전국민이 가입해 있는 건강보험을 가진 환자를 병원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 당연지정제가 풀리면, 병원은 돈 많은 민간보험 가입자만을 가려받을 수 있게 된다.
한미FTA가 국회를 통과해서 발효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 포함된 ISD(투자자 국가 소송 제도)제도가 시행되면 국가의 공공정책에 대해 미국 투자자가 소송을 걸 수 있다. 공공정책의 합리성에 상관없이, 그 조치로 인해 투자자가 피해를 봤는지가 국제중재기구의 판단 근거다. 캐나다 정부는 2001년 담뱃갑에 '순한 맛(mild)'이라고 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도입을 검토했다. 이를 안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이것이 자사의 수익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간접 수용에 해당한다는 항의서를 보냈다.
캐나다 정부는 ISD 소송을 우려해 담뱃갑 규제안을 철회했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의 NAFTA보다 더욱 강력한 한미FTA에서는 공공정책의 위축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원래 취약했던 공공의료 분야는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자체가 민영보험사들에게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국방과 의료 만큼은 정부의 책임이다
"교수 회의 때 강당으로 갔는데 파워 포인트로 1등부터 순위가 쫙 나오면서 얼마 벌었고, 얼마 벌었고 이런 걸... 쭉 등수를 다 얘기 했다고 해요. 교수들이 그렇게 실적을 내야 되고 돈을 벌어야 되고 순위가 매겨지니까 과잉진료를 하게 되고... 돈으로 성적이 나오니까 교수님들도 다 스트레스 받아 하고..."
문제는 시스템이다. 의료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리는 현실. 그리고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제도적 방관. 한국판 <식코>라는 <하얀 정글>은 신자유주의가 의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미국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마이클 무어 감독처럼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키지는 못 했지만 비장함만큼은 여실히 묻어난다.
지금도 계속되는 차가운 현실. 이옥 할머니는 척추관 협착증을 그대로 지닌 채 파지를 주우러 다닌다. 박진석씨는 부당한 의료비를 청구하는 병원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길동씨는 병원 밖에서 서성거린다. 의료급여 수급권자인 박금례 할머니는 의료급여 보장범위에 들어있지 않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다.
"국방과 의료 만큼은 정부의 책임이다." 영국의 공공영역을 크게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도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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