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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어느 철학자(플로티누스)의 구원론과 성화론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5. 6. 24.

 

어느 철학자(플로티누스)의 구원론과 성화론

 

 

1. 플로티누스의 구원론

 

플로티누스(204-270)은 인간을 감각적인 몸과 자율적인 영혼으로 나눈다. 영혼은 신체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본다. 영혼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다. 영혼이 만약에 자기 존속을 위해 몸에 의존적이라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존속의 기반을 잃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사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을 육체의 상태나 속성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영혼은 불멸과 불사의 성질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야말로 신성하고 축복받은 존재라고 본다. 영혼이 자신의 정신을 통해 영원한 신성, 즉 정신적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그것에 동화되어 마침내 스스로 하나의 신으로 승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혼은 이 세상의 ‘신성한 원리‘을 통해서 더 높은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다.

영혼은 원래 신성한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영혼의 신격과는 영혼의 자기 회복을 의미한다. 세상의 매몰된 대다수의 영혼은 자신의 신성을 잊고 산다. 이러한 영혼에서 플로티누스는 호소하기를 ‘자기 자신을 상승시킬 것’을 촉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내려두고 안으로 눈길을 돌릴 것을 권한다. “네 안으로 들어가라”

 

그는 인간의 영혼을 ‘자아’라고 부른다. 부단히 변화하고 종국적으로는 소멸하는 인간의 몸과 달리 영혼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의 동일성과 안정성을 보장해준다. 플로티누스는 육체적 활동이나 육체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활동을 ‘짐승’ 곧 영혼과 몸의 결합체로 보고(하위 영혼) 육체가 필요 없는 활동을 이성적 영혼(상위 영혼)의 고유한 활동으로 간주한다. 그는 육체와 거리두기를 통해 감정과 욕망의 지배에서 자유로우며 정신적 활동에서 덕을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이 바로 ‘참된 인간’이라고 선언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영혼과 몸의 분리되는 필수적 절차를 겪어야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죽음이라고 선언한다.(물론 생리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 통해 연습되는 이 죽음은 육체적 영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 죽음은 육체적 욕망의 지배와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감각의 현혹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죽음은 영혼을 감정과 욕망과 감각에 의해 생긴 병으로부터 치유한다.

 

이 철학적 정화는 이성적 영혼을 살아있는 몸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감각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만든다. 철학적 정화는 내적 인간이 잡념에 시달리지 않도록 홀로 내버려두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반면 정화된 영혼은 고요히 정신적 인식 또는 이론적 관조에 집중한다. 자신의 존재를 개선하기 위해 완전한 존재인 신을 모범으로 삼는다.

 

 

신을 닮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것을 권고한다. 그런데 그의 권고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둔자의 길을 가라는 말이 아니라 악을 피해 덕으로 도피하라는 말이다. 그는 신을 닮기 위해서는 실천적 덕에서 불발하는 이론적 덕에 이르는 ‘덕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이론적 덕을 통해 영혼은 신을 인식한다. 닮은 것이 닮을 것을 인식한다는 논리에 의해, 신을 닮은 영혼이야말로 비로소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신은 신적 정신을 가리킨다. 영혼은 신적 정신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것을 닮아야 한다. 영혼이 신 자체를 관조한다는 것이 최고 경지에 이른 ‘신과 합일’이다.

-[마음과 철학] 중에서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서울: 2015)

 

2.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성화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역시 소멸되는 몸과 ‘신의 형상’에 해당되는 인간 요소인 ‘영혼’으로 둘로 나눈다. 그 이후에는 ‘신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도 된다고 여기기에 영혼 수련에 집중한다. 즉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필요한 실천 항목들로 가득 제공되었다고 주장한다. 듣기만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실천 수련은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거룩한 형상 회복작업이 불가능했지만 성령을 받고 부터는 성령의 능력으로 본격적으로 거룩한 신의 형상 갖추기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먹기 따라 사적인 거룩 성취가 가능하다고 본다. 순종과 열심과 강한 실천의지로서 성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서 성령의 열매인 거룩한 영적 열매를 개인적으로 주렁주렁 많이 확보하면 천국 가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보상(상급)을 챙길 수 있는데 이 경지의 최소 수위를 철학자의 구원관처럼 ‘신과의 합일’이라고 본다.

 

 

개혁주의 성화론은 철학적 구원론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용어와 성경 구절을 마구 동원했다고 해서 철학적 구원관과 다른 노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은 동원은 철학자가 발굴해낸 인간의 바닥 본심을 기독교 문화로 채색한 것에 불과하다. ‘자아 완성’, ‘자아 실현’, 혹은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했던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신학의 되풀이다.

 

 

“뱀의 새끼들아, 너희 아비는 악마니라”(마 23:33/요 8:44)

 

 

3.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거룩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9-10)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거룩의 담당자는 따로 계시는 데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거룩됨을 펼치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자신의 언약 안에서 이끌어 들이셨다. 이로 인하여 모든 인간의 거룩과 의로움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할 죄인 것으로 폭로당하고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저지당하고 질책 받는다. 그래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모든 의미는 주님 십자가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성도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며 산다’(갈 3:1) 그것은 주님만이 거룩 작업의 주인이 되는 그 현장에 놓여 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나로 인해 거룩’이 아니라 ‘주님 홀로 해내신’ 그 거룩의 유일한 성격만을 고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