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신화] 에른스트 캇시러 저 최명관 역 서광사(서울:1988)
저자 : 에른스트 캇시러 Ernst Cassirer, (1874년~1945년) 독일
본 책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 즉 나치즘, 파시즘 등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엉뚱한 신화적인 사상이 어떻게 발생해서 횡포를 부리게 되었는지를 파헤쳐 그 사상의 본질을 밝히려는 책이다.
신화란 자기의 생명을 공동체의 생명과 또 재연의 생명에 일치시키려는 열렬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 욕망은 종교 제의(祭儀)들에 의하여 만족을 얻는다. 이 제의들 속에서 개인들은 융합하여 한 형상을 이루어 분별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가 된다. 이러한 유대는 인과(因果)적 유대가 아니라 정동(情動)적 유대이다. 즉 원인과 결과의 경험적 관계가 아니라 여러 인간들이 공통적인 감정으로 엮어진 깊이다.
예를 들면 출생은 언제나 일종의 환생으로 여겨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룬타 족은 그들의 토템(특정 짐승 표시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상징물)에 속했던 그들의 토템에 속했던 죽은 자들의 영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그들의 재출생을 기다리다가 그곳을 지나가는 부인들의 몸에 들어간다고 억측한다. 그래서 늘 ‘하나 됨’을 추구한다. 첫 번째로 인간은 그의 인간 조상 혹은 동물 조상과의 근본적 통일을 주장하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의 생명을 자연의 생명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생명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등장된 의식이 바로 성인식이다. 그는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탄생하려면 신체적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는 젊은이들은 가장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떠나야 한다. 그가 이 모든 시련을 이겼을 때 사람들의 친교와 또 사회의 커다란 신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는 위대한 순간이 온다.
이처럼 신화적 사고의 상상에서는 개인적 고백을 볼 수 없다. 신화는 인간의 사회적 경험의 객관화이지 그 개인적 경험의 객관화는 아니다. 이는 언어의 기능에 있어 낱말의 어의적 사용과 마법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마법어가 지배적이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물 혹은 사물의 관계를 기술(記述)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효과를 산출하려 하며 또 자연의 진로를 변경시키려 한다. 이것은 기묘한 마법의 술수 이다. 마법사 혹은 요술쟁이만이 마법어를 지배할 수 있다. 그의 수중에서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아무 것도 그 힘에 항거할 수 없다. 신화는 죽음이 인간의 생명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형태의 변화를 의미할 따름이라고 가르친다.
신화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연은 결국 신화적 세계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이 중심이 아니라 신화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의 머리에서 ‘원초’, 혹은 ‘시초’라는 말이 나온다는 말은 자연 세계를 신화세계로 이미 전환시켜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철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된다. 호메로스(기원 전 8세기 경 )와 헤시오도스(기원 전 7세기 경)라는 그리스의 시인은 인간들 간의 부끄러움과 망신이 되는 일들, 즉 도둑질과 간음과 서로 속이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돌렸다.
여기에 대해서 크세노파네스((기원전 570년 - 기원전 480년)라는 철학자는 ‘일자(一者)’를 제창하고 나선다. 즉 시인과 신화 작자들은 자신들의 형상을 따라 그들의 신들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크세노파네스는 말한다. “만일 소나 말 혹은 사자가 손을 가지고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말은 신들의 모양을 말처럼 그릴 것이요, 소는 소처럼 그릴 것이다”
즉 신화적 및 의인적 사상의 모든 제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란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은 형상과 사상에 있어 인간들과는 같지 않는 오직 한 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듣는 존재이며 그리고 그는 아무 수고 없는 모든 사물을 자기 마음의 생각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맞다 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이러한 인간들의 이성적 생각에 자신감을 불어넣게 되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살피는 판단은 모두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소피스트(궤변론자들 기원적 6세기- 기원 전 7세기 경)들이 펼치게 된다.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개개의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른바 ‘보편적인 인간’을 한갓 허구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생각이 달랐다. 더욱 더 궁극적 하나를 지향한다.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만큼 많은 덕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남자의 덕이 있는가 하면 여자의 덕이 있고, 아이들의 덕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의 덕이 있으며, 자유인의 덕이 있는 반면 노예의 덕도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배격하였다. 만일 이런 주장이 옳다면 인간성은 그 자체로 모순된 것이 된다고 보았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서로 어울리는 데가 없으며 공통되는 것이 없이 되고 말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진정한 하나의 인간 공동체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입, 코, 눈, 귀가 사람의 얼굴의 부분들인 것처럼 덕에도 과연 부분들이 있는가 반문한다. 인간은 전체의 덕을 가지지 않고 어떤 한 가지 덕, 즉 용기, 정의, 절제, 거룩함을 소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혜와 덕에는 부분이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조각조각 깨뜨림으로써 그 진정한 본질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지혜란 하나의 나뉠 수 없는 전체로 정의해야만 옳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기원전 424/423 – 기원전 348/347)에 와서 그의 사상 속에는 모든 경험적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오직 하나의 이상(理想)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이 경험적 세계에서의 정치적 질서는 우주적 질서의 상징으로 보았다. 신의 세계의 특징을 선함과 단일성에 두었다.
따라서 신화적으로 보이는 시와 예술에 대해서는 배척하고 철두철미하게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국가론을 펼친다. 이성(logos)과 법과 질서, 이 세 가지는 물리적 세계와 윤리적 세계 모두에서 제 1원리다. 땅의 질서가 곧 하늘에서의 질서를 반영한다. 정의란 곧 질서 잡는 일이다.
중세 그리스교 지배 시대에서 플라톤이 말한 신의 형상 분유(分有)의 범주는 창조와 성육신의 교리로 바뀌었다. 즉 그리스(헬라)의 로고스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로고스의 전환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는 말한다. “너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지 말고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진리는 인간 속에 있느니라”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의 고전적 전통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및 스토아 철학(기원전 5 세기 경)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25년? ~ 1274년 3월 7일)에 와서는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활동에 대한 장애물이 아니라 참된 사고가 인간 세계에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다. 고급한 것이나 저급한 것이나 한데 연결되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 도덕적 질서는 오직 인간의 자유로운 협동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인간적 질서이다. 그것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우리에게 덮어씌워지지는 않고 우리들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존한다. 국가는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서 비롯한다.
이 본능의 처음에는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여기서 차츰 발전하여 보다 높은 다른 모든 형태의 공동체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기원을 그 어떤 초자연적 사건과 결부시키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사회적 본능은 인간과 동물에 공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자연적 산물일뿐더러 또한 이성적 산물로서, 자유롭고 의지적인 활동에 의거한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원이다. 그러나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다만 먼 원인 혹은 추진시키는 원으로서만 일하신다. 이 본원적 동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근본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정의와 공정의 질서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의 영역과 은혜의 영역 사이의 틈은 완전한 통일로 한데 융합된다. 은혜의 힘은 약화되지 않는다.
단테(1265년 3월 1일경 ~ 1321년 9월 13일 또는 9월 14일)의 [군주 정치론]에에서 국가는 가장 높은 위치로 높여졌던 국가는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찬양되고 영광이 돌려졌다. 그것은 세계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마키아벨리(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는 그의 저서 [군주론]을 통해서 그의 정치적 경험을 말하는데 그의 경험은 권력, 즉 현실의 그리고 사실상의 정치적 권력이 신적인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군주들의 권력이 하나님께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엉뚱한 일일뿐더러 또한 불경스럽기도 한 일이다. 정치적 현실주의자인 마키아벨리는 중세적 정치 체계의 모든 기초를 단연코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왕권의 신적 기원이란 그에게는 전혀 공상적인 것으로 보였다.
통치자에게 있어 온갖 사기, 배신 및 잔인한 짓이 있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못마땅한 일이라도 다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통치자는 이 공공의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투쟁을 마치 체스 놀이인 양 여긴다. 이 놀이의 규칙들을 철저히 연구하였다.
그의 정치적 경험은 정치 놀이가 사기, 기만, 변절, 중죄 없이 연출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들은 애국자들이다. 철학자와 애국자는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논리다. 그런데 결국은 이 공공의 이익을 판정하는 자는 군주 자신뿐이기에 ‘내가 곧 국가’라는 격률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17세기 사상가들은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해서 무한정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성은 자신과 또 자신에게 반대되는 것을 모두 발견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여겼다. 17세기 정치적 합리주의는 스토아학파의 관념들의 소생이었다. 즉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지어졌으며 남에게 넘겨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그들의 창조자로부터 나면서부터 받았으며, 또 이 권리 가운데서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믿었다.
이 권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여러 정부가 세워져 있으며 그 정부들은 피통지자의 동의하에 적당한 권력을 얻는다고 했다. 이점은 따질 필요도 없는 근본적 공리로 여겼다.
문제는 어떻게 약속을 하며 사회적 계약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자신의 인격적 권리 추구가 최우선이면서 어떻게 동일한 본인이 스스로 자유로운 행위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노예화할 수 있는 복종계약에 서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포기 행위가 그의 본성과 본질을 이루는 성격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되며 그 인간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18세기, 즉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이성이 인간을 인도하는 힘이 없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무질서이 이를 확실히 증명해준다. 즉 역사는 순진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만있기만 해도 아름다운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시 신화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낭만주의 새로운 종교적 세계주의를 꿈꾸게 된다. 보편적 종교는 온갖 신앙과 예배를 모두 포용하듯이(이단 규정 없이) 현실 정치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정치질서가 노골화된 것이다.
토마스 칼라일(1795년 - 1881년)은 1840년 5월 22일에, “영웅, 영웅 숭배 및 역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일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저명인사들이 움집한 가운데 행했다. 영웅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칼라일의 명령은 “생산하라, 생산하라. 오늘이라도 불리어지고 있는 동안 일하라.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을 것인즉“이다. 자연의 위대성보다 인간 자신의 위대성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이다. 영웅 숭배는 언제나 그에게 있어 도덕적인 힘에 대한 숭배를 대변한다.
비슷한 시기에 고비노(1816. 7. 14-1882. 10. 13) 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인종 불평등론을 주창한다. 고비노의 인종 불평등론의 특징은 칼라일의 영웅숭배론과 다르다. 고비노는 다른 모든 가치를 파괴하려는 기도다. 신은 곧 시기하는 신이기에 자기 이외의 숭배될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듯이 국가란 필히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영웅숭배론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통일하여 하며 결합시키려는 반면에, 인종 불평등론은 분할하고 분리시키려 한다.
헤겔(1770년 8월 27일-1831년 11월 14일)은 역사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를 결합시켜 그 결과로 등장하는 것을 국가로 보았다. 플라톤과 칸트(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는 감각세계와 예지세계(초월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그 특징으로 여겼다. 감각 세계와 예지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성육신(수육修肉)의 근본 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수육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시간 속이 한 사건이요 확연히 한 시기를 구분 짓는 일이요 인류의 생활과 운명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그리므로 시간은 더 이상 한갓 우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 세운 감각 세계와 초감각 세계, 현상 세계와 본체 세계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플라톤 및 다른 모든 고대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새로운 한 면을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신국론에서 하나의 역사 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영원한 질서와 일시적 내지 세속적 질서 사이의 관계를 확정하였다, 그는 지상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의 나라에 대립시켰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도 이 두 질서를 가르는 심연은 여전히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간과 영원 사이에는 그 어떤 절충도 있을 수 없었다.
헤겔은 이 신비를 드러낼 것을 시도했다. 그가 그의 역사 철학에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그는 ‘멸시된 현실’을 변호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헤겔은 이데아(이상理想세계)를 천체를 초월한 공간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사회생활과 정치적 투쟁들의 현실 속에서 발견한다. 신은 자연이 아니라 곧 역사라는 공식으로 바뀌었다.
신이 역사를 갖는 게 아니라 역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역사만을 꾸며 나간다.
(저자의 평)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세계 창조를 기술하고 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최고의 신 마르두크는 그의 일을 시작할 수 있기 전에 무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는 뱀 티아마트와 이 밖의 암흑의 용들을 정복하고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질서가 우주의 태초의 혼돈에서 솟아나왔고 그것은 영원토록 보존할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서사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놓고 있다. “마르투크의 말은 영원하다. 그의 명령은 불변하고, 어떤 신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변경할 수 없다.”
인간의 문화의 세계는 바빌로니아의 전설의 말로 기술될 수 있다. 그것은 신화의 흑암을 싸워내고 극복하기까지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신화적 괴물들은 완전히 파멸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새 우주의 창조에 사용되었고 또 아직도 완전히 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새 우주의 창조에 사용되었고 또 아직도 이 우주 속에 살아남아 있다.
(복음적 평)
국가는 ‘인격화된 집단적 욕망’이다. 곧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은 예수님의 나라에 대드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를 장악하는 내부의 세력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으로 표현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막 5:7) 귀신의 집단은 이렇게 외친다.
이러한 심성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은 국가를 인식한다. 국가의 영광에서 곧 자신의 영광의 궁극적 현실을 만끽한다. 인간은 누구나 애국자이다. 자기 욕망의 가현체이기에 곧 국가는 우상이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다른 나라로 데려가신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단 7:27)
이 과정에서 성도는 현실 적용원리를 눈치 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인간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을 미리 천국이나 좁은 길에 집어넣는 식으로 상정하기에 ‘천국’과 ‘좁은 길’ 자체가 환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국가라는 이름의 짐승의 나라에서 성도로 하여금 평생 살면서 그 한계 안에서 매일같이 ‘한풀이용’ 혹은 ‘사적복수용’의 헛된 환상을 구성하게 하신다.
참된 천국의 질성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비-소유적으로 우연적으로 침투한다. 그 우연 안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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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국가의 신화.hwp (42.0K), Down:4 |
금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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