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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국민학교 1학년 때 가출 한 적있다.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9. 3. 3.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 내가 어릴 때는 국민학교 였었다.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나는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려 밤늦도록 놀았었다. 그 시절에는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것들이 아예 없어서 아이들은 밥만 먹으면 동네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입이 째져라 웃고 떠들며 소리치고 놀았고, 그렇게 놀면서 몸과 마음은 쑥쑥 커가면서 강인한 육체로 성장해 나갔다.

 

그런 나에게 땅거미가 지는 저녁은 구슬픈 시간이였다. 저녁놀이 어둠에 사라져 갈 쯤이면, 밥을 먹으라고 외쳐대는 엄마들의 목소리에 친구들은 화답하면서 하나둘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이는 없었다 동그러니 나만 홀로 남겨진 동네 한가운데는 가슴이 져리도록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술만 드시면 뭇매를 가하시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밤이 무서운 때문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나 혼자만 남겨진 것이 아니라 동네 중학교 형들 몇명이 함께 남아 있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동네 형들과 밤늦도록 놀기 시작하였다. 은밀하고 기이한 놀이를 하기도 하였고, 농사지은 것들을 서리를 일삼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인가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리며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몰래 숨쳐 먹기도 하였었다. 그 시절 국민학교 1-2학년이때였던 나는 형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맹종하는 꼬붕이였다. 형들은 너무 말을 잘듣는 나를 언제나 데리고 다녔었다.

 

그런데 어느날 인가 형들과 나는 너나 할 것 없이 폭력적인 가정형편을 원망하기 시작 하였다. 날마다 술을 드시기만 하면 푹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서로 경쟁하듯이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았었다.

 

그리고 일심동체로 더 이상 지옥풍경인 집에서 탈출하자고 입을 모았다. 세탁소를 하던 형이 집에서 몰래 얼마간의 돈을 훔쳐 오고 나머지는 조금씩 돈을 가져 오기로 하였다 그 돈을 가지고 영원히 집을 탈출하여 폭력이 없는 곳으로 자유를 찾아 가자고 결의를 한 것이다.

 

그렇게 모의를 하고 난 후 다음날 모두 모였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가서 어디로 갈까 회의를 하였다. 나는 나의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수원으로 가자고 하였고 형들중에 한명은 대전으로 가자고 하였다. 결국 대전으로 가기로 작정을 하고, 대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대전에 도착하자 마자  역전에서 집나온 아이들을 노리고 있던 청년에게 붙잡혔다. 자신은 경찰의 끄나플이라면서 자신이 묻는 말에 무조건 답을 하고 자신이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사람에게 끌려 갈 때에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울면서 소리쳤다. 저 사람이 나를 잡아 간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무섭게 생긴 사람이 우리들을 끌고 가는데 누가 선듯 나서지를 못했던 것이다.결국 역전건물에 맞붙어 있던  좁디 좁은 허름한 여인숙으로 끌려간 우리들은  그 사람에게 가출할 때 집에서 훔쳐 가지고 온 돈을 몽땅 배았겼다. 그 사람은 새벽에 우리들에게 와서 집에 보내 준다고 하면서 기차표도 끊지 않고 몰래 첫기차를 태워 주었다.

 

기차에 올라탄 형들과 나는 이대로 집에 가면 맞아 죽을 것이란 공포심과 표도 끊지 않고 탄 것이 발각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다시 내려와  무작정 걸었다.  돈도 한 푼 없는데 허기는 지고 모두가 지쳐  가던중 나의 눈에 백원짜리 종이돈 두장이 눈에 들어 왔고, 그 돈으로 라면땅과 자야를 사서 먹음으로 허기진 배를 어느정도 채울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이 되어서야 논산역에 도착 할 수 있었고,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자, 우리들은 논산역의 매표소 직원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 역무원은 어느 아저씨에게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아저씨는 나를 등에 엎고 까배기를 한개 사주면서 이것 저것을 물어 보셨다. 집에 도착하니 아주머니는 찐고구마를 내오셨고,녹초가 된 우리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아저씨는 소달구지에 우리들을 태우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한 짐 하신 후 장문의 편지를 써서 우리들에게 주시며 꼭 부모님께 보여 주라고 당부를 하시면서 서울행 열차에 태워 주셨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기전 우리들은 서로 옥신각신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자고 하는 사람과 나처럼 절데 집에 가지 말자고 하는 사람으로 의견이 갈라졌다. 집에서 많은 돈을 훔쳐 가지고 온  형은 나와 같이 절대 집에 가지 말자고 하는 쪽이였다.

 

그러나 대세는 집으로 가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집에 도착 하였다. 집앞에 도착하자 나의 어머님이 마구 달려 오셔서 나를 끌어 안고 울었다.그 때는 그토록 무관심하던 자식앞에서 우는 이유조차 잘 몰랐었다. 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죽으면 죽었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곳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출을 할 정도로  아버지의 폭력은 네게 너무도 큰 마음의 상처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였다. 그런 아버지를 피해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수도없이 가출을 하였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를 쳐다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아직도 여젼 하시다. 술만 드시면 본인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 지 조차 모르고 폭력적으로 변하신다. 그 시절에는 왜그리 술만 드시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들이 많았는지...어쩌면 암울한 우리민족의 역사가 그런 아버지를 양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우리들을 먹여 주시고 서울까지 갈 수 있도록 해주신 고마우신 분에게 제대로 인사 한번 못한 것이 아직도 죄송한 마음으로 남는다. 아저씨 그 때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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