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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담임선생님이 함께 죽어버리자고 했었다.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9. 3. 14.

 

 

모든 동물은 환경에 의하여 변하기도 하고, 적응해 나가기도 한다. 인간도 예외가 될 수없기에 저마다 주어진 환경속에서 살아 가면서 인격형성이나 가치관 또는 성격이 좌우되기도 할 것이다. 점점 더 파괴되어 가는 자연 속에서 오염된 식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수많은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나 이기주의적으로 변하는 것도  환경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릿고개 시절의 영향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시지 못한 나의 아버님 또한 무지와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많은 세월 동안 술로 고통을 이겨 내시려고 하였던 것 같다. 다른 어떤 분들보다 술주정이  심하셨던 아버님은  나에게 심한 폭력과 폭언을 자주 하셨다. 이런 환경속에서 나 또한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탓에  국민학교 시절부터 심한 반항아적 기질이 다분 했었다.

 

단 칸 셋방에 살면서 국민학교를 여기저기 수도없이 전학을 다니고 휴학을 하고 다시 다니고 그런 하루하루가 죄불안석처럼 불안한 시절을 살아 가면서 가해지는 아버지의 뭇매와 폭력은 나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었다. 수도없이 가출을 하고, 도망을 다니기도 하였지만,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그런 불안한 정서 속에서 살아온 나는 한번 분노가 일면 내 스스로가 조절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부터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  선생님들에게 강력하게 반항하기 시작했으며, 6학년이 되어서는 분노의 기질이 극에 달하여 같은 반 아이들의 책상을 다 엎어버리는 것이 일 쑤였고, 나를 혼내키는 선생님을 향하여 심한 욕설을 하고 뛰쳐 나가기도 하였다.

 

같은반 아이들 신발을 다 학교밖으로 던져 버리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폭력도 일삼았다. 거기에다가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해서 물건을 잃어 버린 주인들이 담임선생님을 찾아 와서 교육을 잘 시키라고 항의까지 하였었다.

 

하루라도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치는 듯이 내 스스로 감정조절을 할 수조차 없었다. 학교 기물을 마구 부수고 미친 듯이 날뛰고 학교결석을 밥먹듯이 하는 나는 간신히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한 분의 고귀하신 선생님 덕분에 국민학교를 졸업 할 수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손중찬 선생님이셨다. 이분이 아니였으면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집을 뛰쳐 나가 몇날 몇칠이고 볏단속과 비닐  하우스또는 폐가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하던 때에 나를 찾으러 손중찬 선생님이 찾아 오셨다.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산으로 도망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반 아이들의 책상을 둘러 없고 교과서와 노트를 마구 찟어 버리고 고성을 지르며 광기를 부리는 것을 보신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끝나고 나서  자리에 남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아주 강한 어조로 나를 혼내키셨다. 그러면서 너같은 학생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사물함에 있는 줄넘기를 가져 오라고 하셨다. 그것을 들고 오자 선생님은 줄넘기를 받아 들고 이것으로 함께 죽자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살만 큼 사셨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다 하시면서, 너 같이 정신 못차리는 학생은 차라리 죽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 나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함께 죽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죽음이 무서워 서가 아니라, 선생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면 제자에게 이런 말을 다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죽어도 잘 못을 빌지 않던 나는 그 때 선생님께 엉엉 울면서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하고 말이다. 선생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혔고 나 또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국민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내 마음의 분노를 최대한 억제 하였고, 선생님 덕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자 마자 다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광기는 재발 하였지만 말이다. 

 

25년 정도의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선생님을 찾아 뵈니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어 계셨다. 올곧은 대나무처럼 바른 행동만 하셨던 선생님은 내가 존경하고 본받기를 원했던 분이셨다. 학교 다닐 때 그토록 속을 썩여 드렸건만 나를 보자 마자 너무도 반가워 하셨고, 한눈에 나를 알아 보시고는 힘차게 끌어 안아 주셨다. 그런 선생님께 나는 염치 불구 하고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시기를 부탁 드렸는데, 선생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시고 주례를 서 주셨다.

 

결혼식이 끝난 후 단 한번 만나 뵙고 이제껏 찾아 뵙지를 못하고 있다. 선생님께 드릴 약초와 약초즙을 만들어 놓고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이다. 한 치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인 것을... 이렇게 미루다 보면  또다른 후회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조만간에 찾아 뵙도록 해야 겠다.

 

내가 그나마 이렇게 내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글로 표현 할 수 있게 자긍심을 심어준 분이 바로 손중찬 선생님이셨다. 내가 쓴 반성문을 보시고는 너무너무 잘 썻다고 하시면서 많은 학생들 앞에서 읽도록 해주셨고, 그 때의 영향으로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손중찬 선생님은 내 인생의 평생의 은인이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미워 해서는 안된다. 죄가 미울 뿐이다.잘못된 환경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 뿐이다.

 

 

나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주셨던 손중찬  담임선생님.  속박과 형식을 따르는 것을 싫어 하는 나는 그냥 천안 삼거리 공원에서 의자 몇개와 단상 한개를  가져가 놓고  친구와 친척들만 손님으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드레스를 빌리고 카메라는 그냥 집에서 쓰던 것으로 하고, 간단하게 올리니 돈몇푼 없어도 결혼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자유란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손중찬 선생님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교단을  떠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