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암 완치사례

위암말기 완치시키다[말기암치료법]* 말기위암 치료법 항암치료 포기*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9. 10. 24.

 

 

 

 

자연산 장생도라지----   100년정도 된 것입니다.

 

말기 위암 극복기

 

 

1. 33살에 위암 3기라니

 

2. 6개월 내에 죽을 수도 있다.

 

3. 아! 항암제

 

4. 병원에서의 생활

 

5. 털이란 털은 다 빠지고

 

6. 나에게 맞는 치병 프로그램

 

7. 2차 항암제 투여

 

8. 다시 단양에서의 생활

 

9. 3차 항암제 투여

 

10. 내 방식대로 치료하겠다.


 

 

 

내가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은 5년전인 1995년 5월 27일이었다. 일반적인 분류로 위암3기말쯤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암종이 이미 6, 7년 정도 진행됐으며 수술을 하고 1년간 항암제를 투여해야 된다고 했다. 그래도 살아날 가능성(5년생존)은 10%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항암제는 3차례만 맞고 그만뒀다.

 

10% 밖에 안되는 확률에 생명을 걸기엔 현대의학이 너무 못미더웠다.

혼자 치유프로그램을 마련해 투병했다.

 

그리고 만 5년이 지난 2000년 5월 10일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암의 완치 여부는 5년 생존여부로 따진다.사실 수술받기 전보다 건강 상태가 훨씬 좋다. 지금부터 5년동안 내가 암과 싸워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1부에선 암 선고를 받은 이후의 투병기를 시간대별로 정리한다.

 

2부에선 투병과정에서 체험하고 보고 들은, 암 투병을 위한 도움의 글들을 싣는다.

 

3부에선 암과 관련된 새로운 소식이나 기사 등을 스크랩한 것들을 정리했다.


 

이 글은 순전히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나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나의 치병 사례가 암에 걸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돼 나와 같이 하면 누구나

나처럼 치유될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나의 투병방법이 유효하다고 의학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다. 나는 의사도 아니고 단지 한 때 암 환자였다가 치유된 사람일 뿐이다. 이 글을 단지 참고로 하라는 뜻이다. 이 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암 환자와 가족들에게 조그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글에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 내 소개를 하면 1963년 충북 제천생이고 중앙대 정외과(82학번)를 나와 <무역일보>(옛 일간무역)에서 13년간 기자로 일했다. 뜻한 바 있어 지난 8월1일부터 흰 손이 됐다.

 


1. 33살에 위암3기라니.

 

 

  1995년 5월 27일 영동세브란스병원 건강검진센터 상담실.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며 의사가 물었다.

보름 전 받았던 종합검진결과를 통보받는 자리였다.

 

"평소 위가 많이 아프지 않았습니까."

"속이 자주 쓰리고 아팠습니다."

나는 대답을 하며 의사가 들고 있는 검진기록을 넘겨다 보았다.

CANCER 라는 단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 단어가 우리말로 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내가 암에 걸렸다는 건지 걸릴 수도 있다는 건지, 암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의사는 명확히 암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감이라는 게 있다. 암이구나 싶었다.

 


"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니까 입원부터 하세요."

난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험한 말을 들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도망치듯 회사로 돌아와 "위가 안좋아 수술을 하게 됐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니까 병가를 내달라."고 요청하고 회사(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지하에 있던 서울문고에 들렀다. 그 곳에서 암과 관련된 책 몇 권을 샀다.

 


사실 암이 무서운 병이라는 것 외에 암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내 나이 서른 세 살 때였다. 결혼한지 만 6년 가까이 된 아내와 6살, 4살난 딸들이 있었다.

불과 1년전에 홀로 되신, 아직 환갑도 못넘긴 어머님도 계셨다.

 

 


2. 6개월내에 죽을 수도 있다

 

 

  건강검진 당시 위내시경 검사에서 암이 확실시됐던 모양이다.

이미 그 때 조직검사를 했다고 들었다.

 

검진결과가 나온 사흘 후 병원에 입원을 했고 6월10일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받기 전에 맛있는 것 실컷 먹으라는 의사의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내와 함께 경기도 성남의 남한산성까지 가 '최후의 만찬'으로

먹었던 닭도리탕이다. 오랜동안 기억에 남을 만치 맛이 있어서 지금도 가끔 즐긴다.

 


수술을 기다리는 며칠동안 암과 관련된 서적들을 구해지는대로 몇권 사서 읽었다.

 

암이 무서운 병이라는 것만 알았지 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정보라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와 수술 후에 틈 나는 대로 읽었던 암 또는 건강관련 서적들은 후일 치병을 하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됐다.

 

암 또는 건강관련 서적들만 집안 서가의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할 정도로 많이 구해 읽었다.

수술이라곤 난생 처음 받는 터였으나 마음은 비교적 평온했다.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 수술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 얼굴을 한 번 찬찬히 뜯어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마취제로 인해 까무러지는 의식 속에서도 아이들의 얼굴이 선명했다.

 


아내와 어머님의 눈물바다 속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의사가 수술로 적출해 아내에게 보여준 암덩어리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타원형이었다고 후일 들었다. 의사는 내 위장의 75%가량을 잘라냈다고 말했다.

 


참고로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수술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수술에 따른 부작용은 전혀 없었고 5년이 지난 지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수술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당시 수술해주신 선생님 함자는 죄송스럽게도 잊었다.

 


내장을 다 꺼내 그중 일부를 잘라내고 다시 집어 넣어 꿰맸을 테니 수술자리와 뱃속의 통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이틀동안 마약성분이 포함됐다는 진통제 주사를 맞고 견뎌야 했다.

 

다행이 수술 후 경과가 좋아 닷새째 무렵 가스(방귀)를 내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음과 죽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위를 잘라내 대여섯 숟가락만 먹으면 음식물이

목구멍까지 그득한 느낌이었다. 수술자리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어쨌든 일단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 건지, 수술로 치료가 끝난 건지 등등.

 

초기암 정도쯤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의 최대 관심사는 8월 중순경으로

예정됐던 중국연수(당시 회사에서 1년간 북경에 있는 대학에 연수를 보내주기로 돼 있었다)

를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런 질문에 언제나 말을 돌려버리거나 어물거렸다. 내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 아는데도 의사들은 수술 후에도 암이란 말조차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환자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까봐 숨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아내에게 내 암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등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알아오라고 부탁했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아내는 봉투에 얼마간의 촌지를 넣어 담당

레지던트에게 전해주고 나서야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레지던트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암종의 상태로 보아 발암(암에 처음 걸린) 시기는 6, 7년전쯤으로 추정된다.

 

임상학적인 분류를 하면 위암 3기말쯤에 해당된다.

수술을 하면서 임파절에 전이가 됐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임파절을 상당부분 적출해냈다.

 

암이 임파절을 통해 전이되므로 다른 곳에도 이미 전이됐을 가능성을 배제 못한다.

의학적으로 위암3기말의 5년생존률은 10%쯤 된다.

그러나 전이가 됐다면 나쁜 경우 6개월 이내에 죽을 수도 있다."

 


아내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 말들을 전해줬다. 그러나 난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좀 묘한 기분이었다. 6개월 이내에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다소 의외였고 충격이었으나 설마 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또 생존률 10%에 내가 틀림없이 포함될 것이란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암이란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암 환자들의 경우 자칫하면 정신적 충격이 삶에 대한 포기 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생존율이 10% 이하라는 예기를 들었을 때까지 난 의도적으로 충격을 받지 않으려고, 태연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10%의 생존율은 낮은 게 아니다. 난 당연히 그 10%에 든다고 믿어 버렸다.

 

 


3. 아! 항암제

 

 

  수술 한 지 3주가 지나자 항암제를 주사한다고 했다.

나중에 항암제를 더 맞든 말든 항암제만 맞고 나면 퇴원할 수 있다니 정말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항암제는 점적주사(링거를 꽂아 약을 한 방울씩 투여하는 것)로 투여됐다.

일주일 동안 계속 링거를 꽂고 한 방울씩 약을 투여하는 일은 정말 끔찍했다.

투약 3일째 되던 날부터 심한 구역질과 함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링거 함암제 이외에 빨간 주사와 파란주사(약 이름은 모른다)를 맞고 나서는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됐다. 심한 구토증세로 그나마 죽도 먹을 수 없게 됐다.

 

항암제가 하도 독해 하루에도 수 차례 설사를 해야 했다.

항암제가 독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독할 줄 몰랐다.

얼마나 몸서리쳐지는 고통이었는지 암세포 때문이 아니라 항암제 때문에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술 전 내 몸무게는 67∼68kg 가량됐다. 수술 후 항암제를 한 번 맞고 난 다음 몸무게는

 52kg정도로 줄었다. 항암제 투여가 끝나자 곧바로 퇴원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항암제의 독에 대한 체험을 적어볼까 한다.

모든 암에 같은 항암제를 쓰지는 않는다. 나의 경우 위암3기말인데다 전이가 된 상태여서

독한 약을 썼는지, 아니면 체질적으로 나에게 안맞는 약인지 모르겠으나 얼마나 지독했는지

"항암제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굳건히 가지고 있다.

 

항암제를 가지고 인체 독 저항력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서 얘기한 대로 나의 경우 항암제 투약은 1주일간에 걸친 점적주사였다.

 

1주일 내내 링거주사기를 꽂고 사는 것도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불유쾌했지만

사람을 완전히 그로기상태로 만드는 지독한 독성 때문에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우선 항암제 투여 하루쯤 지나면 밥맛이 완전히 사라진다. 식욕은 없어졌지만

주변의 성화와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억지로 입에 얼마 안되는 음식을

구겨 넣게 되는데 사흘쯤 지나면서부터는 금새 토하고 만다.

 

그리고 먹은 것도 없는데 수시로 설사를 한다.

하도 설사를 해서 탈항(치질의 일종)이 생겼다.

 

아주 조금씩, 예를 들어 포도 한송이를 오래 씹거나 삻은 감자를 오물거려 삼켜도 보지만

그것도 구역질 때문에 못먹는다. 입안과 입술은 모두 헐어버렸다.

 

 

칫솔질도 못할 상태가 돼 버린다. 이런 상태가 10일 내지 2주일가량 지속된다.

항암제를 맞은 지 3주째 접어들면서부터는 다소나마 회복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4주째에는 다시 항암제를 맞아야 하기 때문에 더 심한 그로기 상태가 반복적으로

지속된다. 항암제를 투여하고 독이 지속되는 기간에는 손톱 발톱도 자라지 않는다.

 

견디다 못해 12차례를 맞으라는 항암제를 모두 3차례만 맞고 거부했는데

한동안 모든 손발톱에 3개의 주름띠가 생기기도 했다.

 

항암제를 투여하는 기간동안 손발톱이 자라지 않아 그 흔적이 주름띠로 나타난 것이다.

 

수술 전 67∼68kg이던 몸무게가 수술과 첫 항암제 이후 52kg 정도로 줄더니

 

두 번째 항암제를 맞고 세 번째 항암제를 맞자 46kg 가량으로 빠졌다.

 

불과 서너 달 새에 20kg이나 빠진 것이다. 무릎을 세우면 정강이 뼈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뼈에 살가죽만 달랑 입혀놓은 듯한 소말리아식 몸매가 됐다.

 

 

거기다 피부나 얼마 안되는 살점들은 탄력성을 잃어 노인들 살처럼 돼 버렸다.

가령 허벅지 살을 꾹 눌렀다가 놓으면 전처럼 바로 원상복구되는 게 아니라 눌려진대로

그대로 있는 것이다.

 


항암제의 독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황폐해져 가게 된다.

 까무룩 까무룩 정신이 혼미해지고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한다.

 

특히 머리털이 빠지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과 자긍심을

완전히 말살하도록 만든다. 거울 속에 전혀 낯선 인간이 들어있다.

 

머리칼도 없고 눈썹도, 코털도 없는 외계인같은, 아니 외계인보다 못한 놈이다.

(외계인들이여 기분 나빠하지 말라) 모자를 써 보


고 가발을 끼워보지만 처참한 건 마찬가지다.

에 그놈의 항암제, 지금 생각해도 넌더리가 난다.

 

4. 병원에서의 생활

 

  우리나라 병원이란 데가 얼마나 있을 곳이 못되는지는 한 번이라도 입원해본 경험이

있다면 모두 동감할 것이다.

 

난 우리나라 병원이 병을 치료하는 곳이라기보다 병을 키우고, 없던 병도 생기게 하는 곳은

아닌가 생각해 본적이 있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위압적인 의사 간호사,

돈만 밝히는 원무과 관계자들, 음울한 분위기, 감옥이나 다름없는 환자의 생활 환경등등...

(물론 실제로는 병원이 많은 환자들의 병을 낫게 해주고 있다)

 


나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서 살아야 했던 아내와 어머님은 더 괴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잘나가던 직장마저 그만뒀다. 매일 곁에서 기도(아내는 카톨릭신자였다)를 했다.

 

어머님은 부처님(어머님은 불교신자였다)의 가호를 빌었을 것이다.

불편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눈도 제대로 못 붙이며 제대로 못먹고 곁에 있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일 문병을 왔다. 평소에 관계가 소원했던 사람들도 병실을 찾았다.

고마운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심심할 거라며 만화책과 무협지 등을 싸들고 온 동료도 있었고 병 회복에 좋다며

수지 침과 수지 뜸을 들고 와 괴롭힌(?) 선배 부인도 있었다.

 

수술로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위문공연이랍시고 후배들이 와서 웃기는 바람에

수술자리가 다시 터질 뻔한 기억도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암이나 건강과 관련한 서적들을 탐독했다.

고시 공부하듯 빨간 줄까지 그어 가며. 책들은 레지던트가 말한 위암 3기말이라는

나의 상태와 생존확률 10% 등을 확인시켜 주었다.

 

 

항암제를 맞고 병원에서 시키는대로 치료해도 생존율이 10%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다른 방법을 찾도록 만들었다.

 

암이나 건강과 관련한 많은 서적들은 당시의 암 치료가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고

꼬집고 있었다. 심지어 병원치료가 암환자를 죽음으로 이끈다고 극언하는 책들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요법 같은 대체의학 등을 소개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나는 환자 스스로 병원치료를 거부하거나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한 사람들이 제3의 요법으로

완치됐다는 일부 책의 주장에 솔깃해졌다. 이쯤에서 두 가지 정도 짚어둘 것이 있다.

 


하나는 건강/검진을 과신하지 말라는 점이다.

 

나의 경우 30세 이후 매년 정밀검진(영동세브란스가 아닌 다른 의료기관)을 받았는데도

위궤양 진단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암이 진행된지 6, 7년이나 됐지만 그만큼 쉽게 발견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도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은 것이 뒤늦게나마 발견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는

점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암보장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둘만 하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 결혼과 함께 S생명의 새생활암보험에 들어두었던 관계로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5. 털이란 털은 다 빠지고

 

  7월 초 퇴원하자마자 충북 단양에 있는 한적한 절로 갔다. 요양을 하기 위해서다.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상선암에 위치한 조그만 암자였다.

 

어머님이 다니시는 절이고 나도 자주 와봐서 스님과도 잘 안다.

지긋지긋한 병원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우선 좋았다.

맑은 공기, 수려한 자연, 한가롭고 여유로움, 고요함이 좋았다.

항암제의 지독한 기운들도 점차 몸에서 빠져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퇴원한지 1주일쯤 지나면서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배갯닛에 빠진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마리를 한 번 감을 때마다 한 웅큼 씩 빠졌다. 정말 황당했다.

내가 정상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항암제 때문에 며칠 있으면 머리가 빠질 것"이라던 의사의 말을 "설마"했는데 현실로

나타났다. 초췌하고 머리카락도 없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 보노라면 내가 중환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고 의사의 말대로 6개월 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갯닛에 쌓인 머리카락을 떼노라면 눈물이 쏟아졌다.

한참 귀여운 두 딸들의 모습도 눈에 밟혔다.

 


다행이 요양을 하던 곳이 절이어서 머리가 빠져도 크게 표나지는 않았다.

이 무렵만 해도 머리가 다 빠지진 않았는데 듬성듬성 있는 게 보기 싫어

스님께 부탁해 면도날로 아주 밀어버렸다.

 

나중 얘기지만 두 번째 항암제를 맞고 나선 아예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털,

심지어 눈썹, 코 털까지 다 빠졌다.

 

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절이 좋다. 무엇보다 고요해서 좋다.

머리털이 빠져버린 데서 오는 정체성의 상실과 황당함을 극복하는데는 참선이 특효였다.


 

 

6. 나에게 맞는 치병 프로그램

 

  그런 와중에도 나름대로 투병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암이나 건강관련 서적들을 읽다 보면 암에 좋다는 각종 비방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 하나가 모두 그럴 듯해 보여 헷갈리기까지 한다. 이들 가운데 신빙성이 있는 것들을

가리고, 또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 정리한 것이다.

병을 다스리기 위한 프로그램과 나름대로 정리한 참고사항들은 2부에서 상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한 언급만 하겠다.


 

치병 프로그램은 크게 4가지였다.

 

약, 운동, 식이요법, 단전호흡과 자기암시 등이 그것이다.

 

우선 약은 황봉실 선생님이 쓴 '기적의 암치료법' 1권에 소개된 약차를 썼다.

 

약사이신 황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연구해 처방했다는 약차는 우선 약재가 맘에 들었다.

 

나는 한의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한약재 도소매상을 하신 관계로

한약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다.

 

단순히 약재의 이름이나 외우는 수준이 아닌, 약재의 성분이나 약리에 대해서도

어깨너머로 또는 서적을 통해 비전문가로서는 비교적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다.

 

황선생님이 연구했다는 약재들은 선생님의 말 그대로 평범한 약용식물들이지만

해독작용에 탁월하고 항암성분이 많거나 면역력을 높이는 것들이다.

 

마침 친동생이 아버지의 한약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양질의 약재를 쉽게

구했다.


 

다음으로 운동. 체력이 워낙 떨어진 상태여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느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묵고 있던 절이 산 중턱쯤에 있는데 산 아래 계곡까지 매일

서너차례 오르내렸다.

 

숨이 막혀 지칠때까지(그래봤자 고작 몇십미터지만) 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리한 운동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생각엔 절대로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또 하나 앉은 자리에서, 혹은 누워서 할 수 있는 운동들도 발굴해 가능한 한 기와 혈의

흐름이 원활하도록 했다.(후에 상세히 소개) 지압이나 맛사지 등도 최대한 활용했다.


 

나의 치병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이요법이었다. 무엇보다 먹는 것과 가장

관련이 깊은 위에 암이 있었는데다 위의 대부분을 잘라낸 상태여서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서점에 가 보면 알겠지만 암치료를 위한 식이요법과 관련된 건강서적만해도 엄청나다.

 

감자요법, 솔잎요법, 포도요법, 무슨 요법 등등. 또 와송만으로 고쳤느니,

홍삼만 먹고 고쳤느니, 표고버섯차가 좋다, 뭣뭣이 특효다 등등의 단일비방과 사례를

소개한 책들도 많다.

 

 

앞서 언급한 황봉실 선생님이 쓴 기적의 암치료법이란 책에도 식양법이라

이름 붙인 식이요법이 소개된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산골 절에 들어가 요양하는 처지에

그런 책들에 소개된 것들을 모조리 써볼 수는 없었다.

 

내가 구할 수 있는 먹거리를 중심으로 식단을 짰다. 식사는 어머님이 챙겨 주셨다.


 

절에 들어간 이후 약 10일간은 죽을 먹었다. 수술 전에도 위가 워낙 약했는데다

수술까지 해서 작아졌으니 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섯숟가락 가량 먹으면 목구멍까지 차는 바람에 하루에 6끼 정도

식사를 해야 했다. 그러다 10여일이 지난 후부터 차츰 밥을 먹게 됐다.

 

절에 들어가기 전에 약 이틀쯤 서울에서 먹거리 준비를 했다. 무공해 유기농법으로

은 농산물만 공급하는 농촌경제살리기실천연합에서 현미, 현미찹쌀, 율무쌀, 보리쌀,

검정콩, 좁쌀(차조)를 구했다.

 

 

초기 식사는 흰쌀로 만든 죽에 소금기가 거의 없고 부담없는 반찬, 예를 들면 소화에

도움이 되는 무국 등을 만들어 먹었다. 수술 전 자극성있는 음식에 길들여 있던 나였기에

소량의 죽은 밋밋하고 맛없는 반찬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약 10일 후부터는 위에

소개한 재료로 잡곡밥을 지어 먹었는데 역시 하루에 조금씩 나눠 6끼를 먹어야 했다.

 


나중에 상세히 소개하겠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먹는 방법이다. 콩 한조각이 됐든 죽 한 숟가락이 됐든 일단 한입 물으면 그대로 100번 이상

씹어야만 삼키는 것이다. 내가 위암 수술을 한 이래 건강을 위해 정한 원칙 가운데 100번

이상 씹어 삼키기 만큼은 이후 약 3년간 항상 지켰다.

 

 

원칙은 100번 이상 씹기지만 실제로는 200번 이상 씹는 게 보통이었다.

위가 워낙 약했던데다(수술 전 항상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돼 손을 명치 끝에 대고

다녔고 위장약이 주머니에 그득했다) 수술로 절제해냈으니 위가 해야 할 일을

입이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철저히 지켰다.

 

 

나중에 상세히 얘기하겠지만 위는 3년정도 후 정상크기로 다시 자랐고 위내시경 검사에서

"어린애들 위처럼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게 됐는데 바로 꼭꼭 씹어먹기

덕택이다.


 

마지막으로 단전호흡과 정신요법. 사실은 말이 단전호흡이지 호흡법을 제대로

익힐 만한 시간도 없었고 해서 가능한 몸 속에 산소를 많이 흡입할 수 있는 호흡법을 썼다.

 후일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며 이론상으로는 많은 호흡법을 알게 됐는데

가장 간단한 것은 어느 책에선가 본 '나무아미타불 호흡법'이다.

 

간략이 소개하면 이렇다. 아무 준비가 없어도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먼저 숨을 끝까지

내뱉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외면서 더 이상 숨을 내 쉴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천천히 내쉰다.

 

 

이 때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나무아미타불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아무거나 해도 된다.할렐루야 할렐루야 해도 된다. 다만 숨을 내쉴 때는 내 몸 속에 남아있는 각종 나쁜 기운들, 독 등이 날숨을 통해

 배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몸 속에서 독이 빠져 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해 연상한다.

 확신을 가져야 한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 최대한 크게 그리고 많이 숨을 들이쉰다.

 

들숨은 자연스럽게 허파 구석구석까지 이뤄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복식호흡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날숨 때와 반대로 세상의 좋은 기운들이 들숨과 함께 내 몸속에 들어온다고 상상한다)

 

이 호흡법은 산소를 최대한 많이 혈액속에 공급하는데도 유효한데 혹시 몸 어딘가에

세포가 남아있다고 할 때 좋은 자연치료법이 된다.

 

호흡법과 함께 정신요법도 활용했는데 매일 잠들기 전 내 몸 백혈구에 있다는

내추럴킬 세포들이 암세포를 잡아먹는 모양을 형상화 해 상상했다.

 

 

새싹, 물위로 솟구쳐 오르는 힘찬 물고기 등 생명의 소생과 활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능한 자주 떠올렸다.


 

잠들기 전에는 보통 30분 내지 1시간 가량을 가벼운 체조와 맛사지, 지압 등을 함께 하며

 앞서 얘기한 정신요법을 함께 했는데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자기암시를 했다.

 

매일 잠들면서 '너는 내일 아침 잠에서 깨면 오늘보다 훨씬 건강해질 거야'라는 암시다.

 

확신을 가지고 매일 세뇌를 했다. '네 몸 속에 남아있는 암세포가 내일 아침이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암시도 많이 썼다.


 

 

 

참고로 위암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들을 알아보자. 아래 글은 위암에 대해 비교적

간결하게 정리가 잘 된 야후! 건강정보를 퍼와 일부 수정했음을 밝힌다.


 

[원인] 위암의 원인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최근 헤리코박터 파일로리라는

세균이 위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되고 있다. 소금에 절인 음식이나 탄 음식,

매운 음식, 위장절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과거력 등이 위암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정신육체적인 스트레스, 약물 장기복용, 불규칙한 식사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특징] 위암은 한국인에 발생되는 암의 1/4 정도로 가장 흔한 암의 하나로서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2배 정도 많다.

 


[증상] 위암은 초기에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상복부 불쾌감, 상복부 동통 등이 있고, 식사후 소화불량, 식후 팽만감, 식욕부진

등이 있다. 이러한 증상은 흔히 볼 수 있는 급.만성 위염이나 십이지장, 의궤양의 증세와

유사하다. 따라서 상기의 증상이 있는 경우 환자는 대수롭지 않는 소화불량 정도로

 생각하고 소화제나 제산제를 장기 복용하면서 대증요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시기를 놓치게 되는 예가 많다.

 


위암이 더욱 진행되면 복부에 종괴가 만져지고 구토가 나며, 토혈과 하혈을 하게 된다.

체중감소, 빈혈, 권태감 등 전신증상이 나타난다.

 

이 정도의 상태가 되면 치료결과가 좋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암에는 칼을 대면(수술하면) 더 빨리 죽는다는 그릇된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기에 진단하고 합리적인 근치수술을 받으면 거의 완치된다.

 


[경과] 위벽은 안쪽에서부터 점막, 점막하층, 근층, 장막하층, 장막으로 나뉜다.

위암은 주로 가장 안쪽에 있는 점막 표면의 상피에서 발생하여 장막 쪽을 향해서 발육하게

된다. 암의 침윤 깊이에 따라 초기암과 진행암으로 나뉘는데 암이 점막 속이나

점막 하층에 머물고 있는 것을 초기암이라 하고, 근층 보다도 더 심부에 침윤해 있는 것을

진행암이라고 한다.

 


위암은 초기암일 때에 발견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 이상적이다.

방치하면 자꾸 발육해서 주위의 정상적인 조직에 장애를 줄 뿐만 아니라 혈액이나

림프액의 흐름을 타고 다른 장기로 전이된다.

그 결과 저단백혈증, 탈수증세, 빈혈을 일으켜 전신 상태가 몹시 나빠지고,

간장이나 신장의 장애를 일으킨다. 그리고 말기에는 암독소(독소호르몬)에 의해서

전신의 세포가 약해지는 암악액질이라는 상태가 되어 죽게 된다.

 


진행암의 단계에서 발견하고도 방치하면 보통 1~2년 만에 사망한다고 한다.

젊을수록 그 속도가 빠르다. 진행암이라고 하는 상태가 되면 수술을 해도 재발할 위험이 있고

위를 절제하는 범위도 넓으므로, 나은 뒤로도 음식을 위에 머물게 하는 위저류 기능이

저하되기도 하고 소실되기도 한다. 또한 수술 후에 장의 내강이 막혀 버리는 장폐색과

같은 합병증이 일어나는 수도 있다.

 


[젊은 사람의 위암] 위암은 50~60대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이지만 30세 미만인

사람에게도 발생하는 수가 있다. 젊은 사람의 위암은 진행암의 단계가 되면 진행이

급속하고, 이른 시기부터 전이를 일으키고, 위의 절제도 불가능하게 되어,

생명에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초기 위암의 단계에서 치료를 받으면 결코

예후는 나쁘지 않다. 젊은 사람일지라도 이렇다 할 까닭이 없이 위의 상태가

나쁘기도 하고, 식욕이 없고, 좋아하는 음식이 변하기도 할 때에는 속히 위검사를

 받아야 한다.

 


[병기] 0기란 암이 위장 벽의 가장 안쪽 점막에 국한되어 있는 상태로 거의 증상이 없어

내시경이 아니고는 발견되기 쉽지 않다. 발견 즉시 위 절제술을 시행하면 90%이상 완치된다.(통계)

 


1기란 위벽의 중간층인 하점막층 혹은 근육층정도 암세포가 파급되고 임파선 전이는

없거나 암덩어리에서 가까운 부분에 국한된 상태다.

 


 

 

2기란 암세포가 위벽의 점막 하층까지 침범되고 임파선 전이가 암덩어리에서 비교적 먼

부분까지 파급된 상태, 근육 층까지 침범되고 임파선 전이가 암덩어리에서 매우 가까운

부분까지 파급된 상태, 암세포가 위전층을 침범하였으나 임파선 전이가 없다.

 


3기란 암세포가 위전층을 침범하고 임파선 전이가 암덩어리 주변이나 먼 부분에까지

파급된 상태다.

 


4기란 암이 위 이외의 다른 장기를 침범하였거나 암덩어리에서 상당히 먼 부분까지

 파급된 상태다.

 


재발이란 암을 치료한 후 남은 위조직이나 다른 장기 즉 간이나 임파선 등에 암이 발견되는

것을 말한다.

 


[진단] 위장 증상이 생긴다면 우선 가까운 병원을 찾아 위장 내시경이나 위장촬영술을

해보는 게 좋다. 위 내시경은 목에 가벼운 국소 마취를 한 후 실시하므로 통증이나

구역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위장 내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내시경을 통한 가느다란

집게로 뜯어내어 조직 검사를 실시하는데 암세포의 유무를 단시간 내에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위X선 촬영이나 위내시경 검사에서 위암이 발견될 경우,복부에 있는 다른 장기에 전이를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어떤가를 조사하기 위해 초음파검사, CT스캔, 혈관촬영 등의 검사도 한다. 또한 몸의 어딘가에 암이 발생하면 혈액 속에 CEA, AFP같은 효소가 출현하므로,

이를 조사하기 위해 혈액검사도 한다.


[치료] 위암의 치료에는 위를 절제해 내는 수술요법이 있고 항암제를 이용하여

암세포를 죽이는 화확요법, 방사선 치료 등이 있다.

 

수술 요법은 말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기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며 효과가

 직접적이다. 암덩어리와 주변의 세포들을 함께 잘라내는 것이다.

수술의 방법은 암의 위치에 따라 위 전체를 다 제거하는 위전절제술과 위의 70% 정도를

절제하는 위아전절제술로 나뉘다.

대개의 경우 위 주위의 임파선을 절제해 내는 임파선 관청술을 동시에 실시한다.

 


위 전체를 다 제거하는 위전절제술은 암이 위의 전체나 상부에 위치하였을 경우 실시한다.

위 절제 후에는 식도의 끝 부분에 소장을 잇는다. 이럴 경우 음식물은 처음에는

소량의 죽이나 부드러운 음식을 자주 섭취하고 잘 씹어 삼키는 게 중요하며 몇 달 지나면

대부분의 환자에서 수술 이전과 비슷한 식생활을 할 수 있다.

 


위를 70%정도 절제하는 위아전절제술은 암이 위의 하부에 발생하는 경우 사용되는

방식이다. 수술 후에도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으며 빠른 시일 내에 수술 이전의

식생활을 할 수 있다.

 


화학요법은 주로 항암제 투여가 활용된다. 항암치료는 투여된 약이 혈관을 따라 순환하며

암세포를 죽이는 방법으로 정맥주사나 근육주사, 내복약 등이 있다.

 

진행된 위암은 이미 미세 전이를 했거나 수술시 암세포를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완전 섬멸을

위해 항암치료가 필수적이다.(화학요법과 관련해 기존의학계와 달리 반대의견을 펴는

의사들도 있다. 항암제의 부작용이 너무 심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추후 상세소개) 빠르면 수술 후 10일 정도부터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대개 6개월 정도 실시한다. 그 효과는 약 20%정도로 보고 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부작용은 항암요법을 중단하면 대개 사라진다.

 


방사선 치료는 체외에서 고에너지의 방사선을 암세포에 투여하여 암조직을 파괴하는 외부 방사선 요법과 암세포 주위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물질을 가느다란 플라스틱 튜브를 이용하여 직접 주입하는 내부 방사선 요법 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효과를 크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술 후에 현미경적으로 수술부위 주위에 남아 있는 미세암세포들이 재발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이들을 수술 중에 개복되어 있는 상태에서 방사선조사를 시행하는 수술 중 방사선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역시 효과는 미지수다.

 

 

 


[예후] 위암은 점막 또는 점막하층에 국한된 조기 위암일 경우는 수술로서 완치에 가까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위암 세포가 위벽의 점막 및 점막하층 이상 침범된 진행암일 경우 5년생존율이 수술후에 30퍼센트 정도로 조기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위암 전체 환자의 5년 생존율은 15-20% 전후다. 통계적으로 0기는 94.7%, 1기는 84.5%, 2기는 53.7%, 3기는 30%, 4기는 0%정도로 보고 되고 있습니다.

 

[예방] 무엇보다도 식생활의 개선에 주안들 둬야 한다. 한국인의 식단은 짠 김치, 저린 음식, 뜨거운 음식, 불에 그을린 음식 등이 많은데 이러한 음식의 섭취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므로 이를 가급적 줄여야 한다. 아울러 위암에 예방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인삼, 우유들을 많이 섭취하고 비타민 A와C가 풍부한 신선한 황록색 야채 및 과일을 많이 먹어 비타민의 섭취를 늘려야 한다. 기타 원인으로 지목되는 과도한 스트레스 등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조기진단에 주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암은 대부분(75퍼센트 정도) 암이 진행된 후에야 증상을 나타내거나 증상이 없는 수가 많아 결국 호발 연령인 40대 이후에 정기적인 위장검사를 통하거나 집단검진을 통하여 조기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7. 2차 항암제 투여

 

  7월 하순. 햇살이 너무나 눈부시다. 그리고 덥다. 단양에서의 생활 이후 처음으로 서울엘 올라왔다. 다 빠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썼다. 무더운 여름날 가발을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머리에 땀이 차는 바람에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덥다.

 


한 달만에 다시 시작된 병원에서의 생활. 2차 항암제 투여를 위해 입원한 것이다. 1주일 동안 계속된 점적주사는 단양에서의 요양으로 크게 나아지던(대머리가 된 것만 빼고) 몸을 다시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처음 항암제를 맞을 때보다 훨씬 부작용이 심했다. 입원 이틀째되는 날부터 속이 울렁거리더니 설사와 구토가 시작됐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물을 억지로 마셨다. 소변을 통해서라도 항암제의 독기운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책을 통해 배운 기공(독학했다)도 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음울한 환경에 워낙 원기가 약해져 잘 안됐다. 몸무게가 48kg 정도로 야위었다.

 


일주일 동안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하는 날. 택시로 목동 처형집에(당시 나의 중국 연수 때문에 온 가족이 처형집에 이사해 있었다) 갔다. 택시에서 내려 처형집(좁은 골목길로 100미터쯤 들어가야 한다)에 가는 동안 3번이나 쉬었다 가야 했다. 100미터 남짓되는 거리를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축났다. 하루를 더 쉬었다가 단양 절로 다시 내려갔다.

 


처형은 나를 위해 일부러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 스쿠알렌을 비롯해 유산균제재 등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잔뜩 구입해 내게 줬다. 수백만원 어치는 돼 보였다. 그러나 스쿠알렌은 먹기가 역겨웠을 뿐만 아니라 자꾸 설사를 유발해 먹는둥 마는둥 했다. 다른 보조식품들도 처형의 성의를 봐서 먹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특효약이나 비방에 속지 말자

 

 


여기서 잠깐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각종 특효약과 비방들에 대한 것이다.

암 병동에 가면 별의별 약 장사들이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혹은 사기성 농후한 방법으로

암 환자들을 꼬드긴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나았다든지, 어딜 가면 참으로 용한 도사님이

계시는데 죽었던 암 환자도 고친다든지 하는 각종 비방과 유언비어도 횡행한다.

 


대부분의 암 환자나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기 때문에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더구나 이런 약장사나 사깃꾼들은 너무나 그럴 듯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사실과 다르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인가 천지산이라고 하는 약이 우리나라에서 개발됐는데 암치로제로

세기의 대발명이라며 언론에까지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모든 암을 100%에 가깝게

 치료한다는 것이다. <주간조선>에서 처음 그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일방적으로 천지산을 개발했다는 사깃꾼의 말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이 기사를 케이비에스 등 방송과 다른 일간신문들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수준으로

받아(베껴) 보도했는데 나는 당시 암 환자였기 때문에 유심히 봤다.

그러나 몇 달 못가 거의 완벽한 사기였다는 게 확인됐고 그 사깃꾼은 구속됐다.

 


중국산 비방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국내에 들어온 수많은 약들도 검증된 것이 없다.

믿을 만한 게 못된다. 그 약 장사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이미 암은 그 약들에 의해

정복됐어야 한다. 상황버섯이니 아가리쿠스버섯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상황버섯만 먹고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암에 걸린 한 사람이 상황버섯을 먹고

나았다 해서 다른 모든 암 환자가 다 상황버섯을 먹으면 낫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북한산 수입품 포함) 진품 상황버섯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시중에 유통되는 물량의 대부분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기 어머니가 자궁암 판정을 받자 어려운 살림에도

수천만원을 들여 상황버섯을 구해다 달여 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느 기도원에서 고쳤다느니, 계룡산 밑에 기 치료로 암을 낫게 하는 사람이 있다느니

하는 소문도 무성하다. 난 가본 적은 없지만 SBS '그것이 알고 싶다'나 '피디수첩' 등을 보고

 판단하건대 대체로 가짜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8. 다시 단양에서의 생활

 

 

  아무튼 다시 단양으로 내려온 뒤에도 항암제의 후유증에 의한 고통이 너무 심해 몸은

더 허약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앞서 간략히 소개한 나름의 치료프로그램은

계속 시행했다.

 

 

현미잡곡밥과 몇 안되는 반찬은 모두 유기농재배된 것들을 썼다. 특히 반찬 가운데 무,

멸치, 콩 등 몇가지 몸에 좋다고 판단되는, 그리고 꼭 필요한 영양소를 가진 것들은 빼지 않고

골고루 먹었다.

 

가령 무는 그야말로 소화제 그 자체인 식품일뿐더러 대표적인 항암식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산대학교 연구팀 등에서 항암작용이 매우 뛰어나다는 논문이 발표됐고

일본, 북한학계에서도 잇따라 같은 내용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책을 읽을 때나 심심할 때 무를 한 두 조각 베어 씹으면 군것질로도 괜찮았다.

항암식품이란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무가 너무 맛있었다.


 

 

콩도 볶아 먹었다. 수술한 사람은 세포의 바른 생성과 원기 회복을 위해 육류

(특히 개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의사선생님이 말했으나 난 그 당시 육식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대신 콩을 많이 먹었다.

 

동물성 단백질 대신에 식물성 단백질이라도 섭취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즐겨 먹은 콩은 한약재로 서리태라고 불리는 검정콩이었다.

 


밥이건 뭐건 한번 입에 들어온 것은 꼭 100번 이상을 씹어 입안에서 완벽하게 죽을 만들어

 삼켰다. 식사시간은 기본이 한시간이었다.

위장을 잘라내 3분의 1 공기도 안되는 식사였지만 꼭꼭 씹어먹다 보니 그렇게 됐다.

여전히 하루에 5끼 정도의 식사를 해야 했다.

 


병원에서 주는 약은 따로 없었다. 단양에서의 생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약차의 음용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황봉실 선생님이 저술한 '기적의 암치료법'

제1권에 소개된 약차를 만들어 처방대로 마셨다.

 

약차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으나 서점에서 책을 구해다 보면

좋을 것 같다.

 

그 책에는 식양법이라 해서 음식으로 암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 많은 참고가 됐고 그분의 저작 내용에 대해 체험자의 한 사람으로서

100% 확신한다.

 


운동도 꾸준히 했다. 매일 산 아래까지 한 두 번 다녀오는 것 이외에 수시로 맛사지며 지압,

등을 했다. 암 세포가 남아있다면 혈액 순환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혈행을 순조롭게 하는 체조도 열심히 했다.

 


역시 매일 밤 명상과 함께 "내일 아침 잠에서 깨면 나는 오늘보다 훨씬 건강해져 있을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암시를 줬으며(거의 자기최면을 걸었다) 암세포가 죽어

없어지는 상상을 확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해가며 잠이 들었다.


 

2, 3주 지나면서 항암제로 황폐화된 몸은 원기를 다소 회복했다. 절에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민둥머리에 별 신경이 안 쓰였다. 수술받은 자리는 신기하게도 잘 아물었다.

큰 흉터가 남지 않았다.


 

 

오래 씹는 것이 대하여


정말 '100번 이상 씹어서 삼키기'는 암이 아니더라도 모든 위장병 환자들에게

권해보고 싶은 '치료법'이다.

 

나의 경우 처음 약 1년간은 200번(정말로 200번이다) 이상을 씹어야만 삼키기로 정해놓고

이를 꼭 지켰다. 이것이 버릇이 돼 지금도 입에 무언가를 넣고 씹으면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숫자가 저절로 세어지기 시작한다.

 

두 번 씹으면 마음속으로 하나를 센다. 이렇게 해서 100까지 세면 200번 씹는 게 된다.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숫자 세는 게 지겹기 때문이다.

 

특히 현미 잡곡밥을 먹을 경우 꼭꼭 씹어먹지 않으면 그 좋은 영양분, 살아있는 생명의

식사를 하면서도 대충 씹어 먹으면 몸에 제대로 흡수가 안될 뿐만 아니라 위장에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하도 오래 씹다 보니 턱 근육이 매우 발달해서

 어금니를 꽉 물으면 가오리 같다.


 

오래 씹는다는 것이 위장병 치료에 좋다는 것은 내가 입증한다.

위장의 3분의 2를 잘라내 위가 작은데다 원래 위장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위벽이 헐어 있었던 나였다. 이렇게 오래 씹어 먹다보니 위장이 해야 할 일을 입이

대신해 줘(위가 하는 일은 저작, 즉 씹는 일과 장에서 소화흡수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는 일이 주가된다) 우선 위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

 

 

만 3년만에 위장 크기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위벽이 어린아이의 위처럼 깨끗하다는

진단도 받았다.

또 오래 씹으면 소화액(침)을 충분히 타서 위 속으로 흘려 보내니 다시 위액과 보태져

소장 대장에서 흡수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먹은 양이 적어도 확실하게 흡수가 되니 영양공급이 잘 된다.

 

9. 3차 항암제 투여

 

 

  다시 8월말. 서울에 가서 3차 항암제를 맞아야 할 때가 됐다. 정말 넌더리가 났고 두려움이

앞섰다.

 

이 즈음 화학요법을 통한 치료가 별 효과가 없다는 내용의 책들을 여러 권 접했다.

일본의 곤도 마코토(부정확)라는 의사가 쓴 '암치료 절대로 하지 마라'(부정확; 내가 암치료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사람들의 소개로 참으로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암과 관련된 서적들을 엄청시리 사 모았는데 이렇게 찾아온 이들에게 체험담을 들려주면서 책들을 꽤 여러 권씩 나눠주다 보니 지금은 주요한 책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책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책도 그 중의 하나였다.

 

책 내용의 골자는 지금까지 개발된 항암제는 암 치료제가 아니라 '사람 잡는' 약이라는 것이다.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함께 손상시켜 몸이 망가지고

항암제가 오히려 암 치료를 방해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에서의 얘기지만 보건당국과 제약회사, 의사 등 3개의 카르텔이 빚어낸

비극의 약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항암제를 맞아보니 그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여하튼 항암제를 그만 맞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어머니나 아내 등

주변사람들이 문제였다. 환자가 병원을 안가겠다니 무슨 말이냐며 막무가내로

병원으로 떠밀었다.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했으나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 입원을 했고 3차 항암제 투여가 시작됐다.

 


항암제는 정말 맞을수록 사람을 더 지치게 한다. 2차 때와 마찬가지로 1주일 내내

링거에 점적주사를 맞는 3차 항암제는 그로기 상태를 지나 완전 넉다운 상태로 만들었다. 구토와 설사는 여전했고 입안은 완전히 헐었다. 항문은 잦은 설사로 괄약근의 힘이 없어져 탈항 상태가 됐다. 단양에서의 자연요법과 식이요법 등으로 다소나마 회복된 몸은 다시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몸무게가 46kg으로 줄었다.

 


10. 내 방식대로 치료하겠다.

 

 

  퇴원 후 강력하게 선언했다. 더 이상 항암제를 맞지 않겠다고.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스스로 치료하겠다고. 이 같은 선언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항암치료를 해 봤자 생존확률이 10%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통계에 의한 확률이지만 당사자로선 그 10%의 확률이 너무 허망한 것이었다.

그 정도의 확률에 목숨 걸고 그 험악한 항암제를 맞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항암제의 고통없이 사는 '삶의 질'을 택하고 싶었다.

 

3차 항암제를 맞으면서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항암제를 안맞을 경우 어떻게 되느냐고. "통계는 없지만 아무래도 죽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는 내용의 답을 들었다. 그러나 죽을 확률이 90% 이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하나는 자연요법에 대한 확신이었다. 내 몸의 상태와 내가 처한 환경에 맞는

치병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해 나가면 아무래도 생존확률이 10%보다야 높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100% 확신이 있었다.


 

물론 지긋지긋한 항암제로부터의 도피도 이같은 결정의 배경이 됐다.

회사의 규정상 병가가 3개월이었기 때문에 9월초 휴직계를 내러 회사에 갔다.

다행이 무역협회 최정근 상무님이 힘을 써서 병가를 6개월로 연장해 주셨다.


 

 

나는 왜 암에 걸리게 됐나


내가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은 1995년5월,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 세 살 때였다.

진단 결과 암이 발병한 지 6∼7년 됐다고 하니 스물 일곱, 또는 스물 여덟 살 때 암에 처음 걸린 셈이다.

 

 

백혈병 등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발병하는 소아암도 있긴 하지만 위암의 경우 스물

여덟 살 때 걸렸다면 매우 빠른(?) 것이다.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왜 암에 걸리게 됐는지에 앞서 위암의 증상에 대해 알아보자. 순전히 나의 경우다.

 

  우선 위통. 평소 위장이 약해 속 쓰림이 심했는데 특히 위암 진단 얼마 전부터 통증이 더 심했다. 위장이 늘 부어있는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된통 체한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위장이 약해지지 않았나 싶다. 대학 다닐 때 속이 자주, 아니 항상 쓰렸다. 그러나 이 때까진 위암이 아니었다. 위통, 또는 속쓰림은 결혼하고도 수술받기 전까지 항상 계속됐으며 늘 위장약을

입에 달고 다녔다.

 

다음으로 구역질. 위암 진단을 받기 약 6개월 전쯤부터 구역질이 점차 심해졌다.

특히 이빨을 닦을 때 구역질 증상이 뚜렷했다. 또 술 마시고 구토하는 체질이 아니었는데 구토를 하게 됐다.

 

세 번째로는 체질변화를 들어야겠다. 암 진단을 받기 3∼4년 전부터 시계를 찰 수 없었다. 피부 알러지가 생긴 것이다. 안경도 금속제 안경테를 쓸 수 없어 뿔테로 바꿔야 했다. 아마 위암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 밖에 극심한 피로감도 위암의 증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크게 피곤할 일도 없는데늘 피곤했다. 특히 위암 진단 몇 달 전부터는 피로감이 심했다. 빈혈증상도 있었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특히 검게 변해갔다.

 


그러나 암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체중감소는 없었다.

나의 경우 오히려 체중은 지속적으로 늘었다. 위암 수술받기 6∼7년 전 몸무게는

55kg 안팎이었으며 매우 마른 몸매였으나 수술받기 직전 몸무게는 67kg 안팎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왜 내가 위암에 걸리게 됐는지에 대해 짚어보자. 순전히 내 생각이다. 우선 약물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얘기한 대로 평소 위장병(주로 속 쓰림)을 앓고 있던 나는 늘 위장약을 먹어댔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산제(주로 노루모)를 무시로(!) 먹었고 겔포스 등 짜먹는 약부터 속청 등 마시는 약, 잔탁 등 간편하게 하루 한 번만 먹어도 되는 약까지 다양한 종류의 소화제를 엄청 먹었다.(약값도 엄청 들었겠지)

 


거기다 매년 봄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편두통을 일주일 내지 열흘씩 앓았는데

이 때는 펜잘, 게보린 등 두통약을 엄청 먹었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먹고 빈속에 두통약만 한 주먹씩(한 두 알로는 진통이 안돼서) 먹기도 했다.

 

편두통을 앓아본 사람은 알지만 한 번 통증이 시작되면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것은 물론이고 고통을 참기 위해 멀쩡한 손톱으로 콘크리트 벽을 벅벅 긁어댈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쨌든 그 많은 약들은 위벽을 상하게 했을 것이고 일부에 침착된 약 성분이 암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화공약독으로 인한 암]

 


다음으로 음식물 및 식습관. 짜고 맵고 자극적인 것을 엄청 좋아했다.

매운 고추장에 더 매운 고추를 찍어 먹는 그 자극적인 맛에 황홀해 했다.

그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다며 후루룩 마시곤 했다. 무엇보다 불규칙한 식습관이 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대학 자취시절. 아침은 굶고 등교하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고 저녁 땐 술만 진탕 마시는 나날이 계속됐다. 결혼해서도 밤 12시쯤 출출하다며 라면 끓여 먹기 일쑤였고 식사시간은 빨리 먹기 경쟁이라도 하듯 후다닥 제대로 씹지도 않고 먹어치우는 형이었다.

 

그리곤 늘 소화불량, 속 쓰림 등으로 한 손을 명치께 얹고 다녀야 했다.

술 잘 마시는 걸 자랑으로 알고 다녔다. 일주일에 평균 닷새는 술을 마셨고

대개 12시 넘어까지 이어졌다.

 

12시 이후 술집 영업금지가 있던 시절에는 단골로 가던 '비밀술집'까지 있었다.

무식하게 24시간 내내 술만 마시며 지낸 적도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위장을 망치려고 작정한 놈 같지 않은가. 거기다 잘 피지 않던 담배도 술만 마시면 줄담배로 이어졌다. 천성적으로 운동을 싫어했다. 오죽하면 대학입시 때 체력장 16점(20점 만점)을 맞았을까. 시험에 참가만 하면 주는 최저점수가 16점이었다. 스포츠는 구경하는 것도 별로 였다.

(농구만 빼고)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도 발암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다가도 조그만 소리에 깨어날 정도로 예민하고 싫은 소리라도 듣거나 하면 잠을

못이뤘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범하게 지나칠 사소한 문제에도 집착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적 요인도 무시 못할 것이다. 암 병동에 있을 때 환자들을 만나 자주 암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내가 만난 대부분의 암 환자들을 보면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게 받으며 살게 되는데 특히 위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환경적 요인도 꼽히는데 대학시절 자취하던 집의 수돗물은 정말 최악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큰 대접에 물을 받아 놓으면 빨간 녹가루가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술을 많이 마시고 집에 온 날은 새벽에 일어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셔댔다.

 


이상은 내가 스스로 되짚어 본 과거의 생활을 기준으로 암과 관련됐을 법한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지 꼭 이런 생활 때문에 암에 걸렸다고는 볼 수 없다.

 

나의 이런 생활과 단 한가지도 동일하지 않았던 사람도 위암에 걸린 경우가 많다.

암은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이다. 치료법이 제대로 개발돼 정복되지 않은 질병인 것도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개 암 환자들은 내가 얼마나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같은 천형이 내려졌나 하며

비관하게 된다. 그러나 무슨 엄청난 잘못을 해서 암에 걸린 것은 아니다.

비관의 감정은 무조건 없애라.

 

살아야겠다는 의지,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억지로라도) 일이 매우 중요하다.

 

참조: 모까페에 쓰여진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