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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교회주의자들-김영대목사-매인교회 [예수사회]에서 퍼온글입니다.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1. 5. 10.

 

교회주의자들-김영대목사-매인교회 [예수사회]에서 퍼온글입니다.

 

 

교회주의


'주의'(主義:ism)는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정도가 아니라 체계화 된 학설이나 이론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잡동사니 학설들을

교회에 관한 신학으로 체계화시키고 있다.

 

제사장에 대한 말씀이 목사를 위한 교리로 세워지고 있고, 성전에 관한 말씀이 예배당 건물 신학으로 정립되고 있으며, 교회 봉사를 위해 성경과는 상관없는 상급론과 축복론이 마음대로 남발되고 있다.

 

그야말로 신학교의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교회주의란 예수님께 구원의 문제가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교회라는 조직 그 자체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를테면 사람 몸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에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은 교회 조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마치 사람은 옷이 필요 없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옷에 관심 두지 말고 교회가 나타내어야 될 예수님과 그분이 지상에 남기신 십자가 사건과 그분이 보여주신 하늘 나라에 대하여 관심 두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도 된다. 오직 '예수님만'이다.

 

우리에게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다면 예수님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하고, 남편과 자식들도 사랑하고, 목사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목숨은 하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6:24).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그러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내용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최근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면 이미 성경을 포기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오래된 종교의 유물과 같이 취급한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신학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긍정과 자기 사랑의 복음’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처럼 교회주의자들은 말도 안 되는 신학과 행정조직과 정치술로 인간을 긍정하고 세워주며 교회 살리기 운동에 적극적이다. 정작 신경 써야 될 자신의 변화에는

그 교회를 만들고 유지하고 크게 했다는 업적으로 떼울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주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새 언약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이란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죽는 것이었다. 그러니 교회의, 교회를 위한, 교회에 의해 살려고 하는 자들은 이단이다-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자신에 의해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죽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이 살아남는 십자가로 챙긴다는 것은 아직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러므로 교회주의는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 생활의 권태와 무료함을 눈에 보이는 어떤 힘의 결실로 달래보기 위한 조치로 선교와 전도를 빙자하여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합리화한 데서 나온 더러운 열매들이다.

 

선교를 해도 주님이 하시고, 사람을 거듭나게 해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고전 2장, 요 5:19-22,36). 반대로 우리 교회를 망하게 해도 주님이 망하게 하신다. 교회의 흥망성쇠를 주님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인간에게 맡기셨던 적이 없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흥! 성장! 발전! 큰 교회! 풍부한 재정!'라고 외치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싶고 못미덥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들이 너희 교회는 왜 그렇게 부흥이 안되느냐고 창피주니까 그것이 부끄러워서 남부럽지 않게 모아서 넉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목회 실패한 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사람 끌어 모으기에 발버둥치고 있다.

 

큰 교회 다니는 자부심이라도 있어야겠기에 교회 부흥을 섬기고 있다. 그래야 목회자도, 또한 교인들도 제대로 기도하고 있고, 주님을 향한 열심이 있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선교요, 전도하라는 주님의 최후 명령이 아니겠는가 해서(전도의 뜻도 모르고) 사람 끌어 모으기 작전에 투입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허세와 허영, 자기가 세운 교회 조직의 영광과 한데 어우러져 예수님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소위 사람 끌어 모으는데 소질이 있는 목사라는 별명이 붙은 무당을 고용하는 것이다.

 

흔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사라고 장난치듯이 말한다. 내 집을 채우라고 했으니 막대한 스카웃 비용을 제공하면서라도 채워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다.

 

"나를 위해 큰 일을 함으로 교회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내 증인이 되라!"

성도의 삶은 십자가의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교회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마 16:24)는 말씀은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내게 남기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라는 말씀이기에 교회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모든 행위까지도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를 증거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슬퍼하시며 오직 예수님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자를 찾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