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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이근호목사님이 보완해야 될 점-박정우 전도사의 글-대구 우리교회-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6. 4. 17.

이근호목사님이 보완해야 될 점-박정우 전도사의 글-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 보완(개론)


2016.03.08. 12:00

 

사실 누군가의 가설을 비판하기 위해선 그 가설을 깊이 연구한 후에 그 가설속에 내재된 사항들을 중심으로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반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볼 때, 제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을 논쟁의 대상으로 두려하고자 한다면 저는 분명 그의 신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뒷받침하여야 할 것입니다. 앞서 김성수 목사님에 대한 글에서 제가 그의 신학을 수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4년 동안 그의 설교를 매우 충분히 들으며 그의 신학을 몸소 경험하고 또 고민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파자로 인해 마치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것 같아보이지만 그 근원적 원리는 사실 매우 단순한 것이며 그 원리를 눈치챌 때야 비로소 그의 후기 설교의 허무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감히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에 도전장을 내보려합니다. 사실상 김성수 목사님이나 이근호 목사님 또 순단의 김용의 선교사님등 어떤 의미에선 제 스승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전 그분들을 계단삼아 한단계씩 도약했으며 비약적인 발전을 건네받았습니다. 그것은 분명 성령께서 하신 일이였으며 그러한 과정속에서 모든 오해되고 왜곡된 신학을 올 곧게 해야겠다는 목표 또한 설정되었습니다.



제가 이분들에 대한 제 생각을 글로 남기려 함은 먼저는 저 자신이 이해하려는 신학에 대한 확증과 더불어 독자들에게 올바른 신학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자 함에 있습니다.바로 이런 위치에서 이들에 대한 저의 신학적 도전은 비판이나 논쟁이 아닐 것이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활동들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또한 이분들 처럼 저 자신의 소리를 많은 회중들 앞에서 내게 될 때 누군가 저의 약점을 보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고민과 경험과, 열정을 지닌 주님의 사람들이 계속하여 일어나주기를...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사실 굉장히 깊습니다. 이분의 신학은 그의 설교를 어느정도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그는 김성수 목사보다 훨씬 깊고 제가 만난 어떤 훌륭한 고전 신학자 만큼이나 깊은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어쨋든 원리는 매우 간단하지만 그래도 그의 말 한마디 뒤에 숨겨진 신학적 사상은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솔직히 제 고백은 그분 보다 지혜로운 신앙인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분의 신학을 걸고 넘어지려 하는 것은 분명 그 안에 결핍된 부분이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김성수 목사님 때와 같이 그의 신학 안에서 내재된 사항들을 깊이 살펴보았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직 김성수 목사님 때 처럼 그의 신학의 오류가 제게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까닭에 저는 이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분명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오류에 대한 희미함도 더욱 선명해 질 것이란 확신이 있습니다.


 

이분은 철학을 중심으로 거의 대부분의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을 섭렵하신 분입니다. 그가 목회자 분들과 함께 신학자들에 대해 나누는 강의가 있는데 그 강의는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그는 위대한 신개혁신학자인 바르트의 사상의 오류조차 매우 정확하게 짚어냈으며(제가 보기에) 그의 오류를 거의 완벽하게 수정해 내었습니다. 다른 종교철학자(헤겔,칸트,라이프니츠)들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둘째치고서라도(어쨋든 그는 철학자가 아니기에 그들만큼 깊은 이해를 수반하지 못하였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그렇게 이해하고 수정하였다는 사실에 참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솔직히 많이 배웠습니다. 김성수 목사는 자신이 겨우 바르트의 신학적 위치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신학을 구성하려 했지만, 이근호 목사님은 분명 그의 바르트의 이해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가 충분히 있어 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분의 핵심적인 신학은 제가 보긴엔 바르트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본회퍼까지 공부하고 이제야 바르트를 개관정도를 이해한 사람이기에 바르트의 신학이 이렇다 저렇다 말 할수 있는 처지는 못되지만 제 짧은 지식과 소견에는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바로 이 바르트를 중심으로 수정 보완되어 있고 그런 그의 신학을 이식 받은 것이 김성수 목사의 중기 설교 였으며, 이제 저는 이근호 목사님이 놓치고 있는 듯 보이는 그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최선의 방법을 독자들에게 제시해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한마디로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마라, 넌 단지 주님의 말씀의 효과만 나타내라'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사실 그의 설교에 늘 중심적으로 자리잡은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엄청난 신학적 배경이 깔려있는데 그것은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설교하듯 편안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자기 자신을 존재로서 설정합니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결핍없이 자신이 자신의 어떤 행위들로 자신을 채워가며 하나님께 다다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인식하면 되고, 반성하면 되며, 회개하면 되고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스스로 믿음을 가지면 되고, 기도를 하면 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되고, 좋은 마음을 갖고 착한 행동들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장 예수를 닮은 자신의 모습속에서 그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위와 같은 사실들이 바로 이근호 목사님이 부정하는 2000년 기독교 역사의 개혁주의 신앙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면서 부터 이미 자신을 존재로 설정해 두었기에 성경의 내용들을 끄집어 자기가 지켜냄으로써 소유화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런 소유의 효과들은 무엇입니까? 율법이지요, 모두 죄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이 성화론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근호 목사님이 말하는 것입니다. 뒤집어라! 존재가 뒤집혀야 한다. 존재가 존재아닌 것으로 탈로나고 참 존재로서 뒤밖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란 말인거죠. 예수만이 존재(인자)고 인간은 존재가 아니기에 죽음은 예수의 죽음만이 진정한 죽음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의 죽음은 그 진정한 효과 안에서 인간을 존재로서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로 요 부분이 바르트의 말을 이근호 목사님이 자신만의 말로 보완하여 말한 것인데,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것은 그가 무얼 하므로 자꾸 스스로를 존재로서 설정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도를 함으로 기도 잘하는 나를 인식하고, 구제함으로 구제 잘하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차피 부패한 마음으로 죄를 향해 달려가니까 그 죄를 더욱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죄인식을 통해서 택함 받은 자라면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니까 그 말씀의 효과만이 그냥 그대로 있는 신자안에서 매우 확실하고 선명하게 그 나라의 능력을 부여할 수 있게된다는 논리입니다. 참, 이 논리를 헤집고 결핍을 끌어낸다는게 사실상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이부분을 꽤 오래 고민했는데 이제야 조금 그 실마리가 풀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바로 칼빈을 놓치고 있어요.. 이 목사님은 루터, 칼빈 별로 높이 평가 안합니다. 제가 보기엔 바르트를 그나마 가장 낫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의 사유체계가 그것을 매우 좋게 여기니까요. 어쨋든 그가 칼빈을 놓쳤다는 것을 가지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끌어내려하냐면 바로 인간의 죄인식 과정을 끌어내려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제가 보기에 이목사님의 주장에 결핍된 부분이라 생각하는 곳입니다.


칼빈에서 칼 바르트로의 죄인식과정, 칼빈을 생략하고 칼 바르트만으로 죄인식이 순수하게 가능한 것인가?


바로 요 질문을 가지고 그분의 신학을 제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보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머리를 썻더니 배가 고프네요. 지금 12시인데. 밥먹고 오후에 쓰던지 아니면 내일 쓰던지 하겠습니다.

그럼 투 비 커티뉴...


죄 인식 과정


2016.03.08. 16:20

칼빈에서 칼 바르트로의 죄 인식 과정 없이 혹은


칼빈을 생략하고 칼바르트의 그것 만으로 순수한 죄 의식이 가능한 것인가?


자기에게 인식된 말씀을 자기에게 부여하여 그것으로 이념을 삼아 지탱하는 삶은 사실상 그 자체로 죄를 생산하는 삶임에는 틀림없다.(이것은 개혁주의 성화론) 우리의 감정은 현상에 귀착되어 끌려가고 만들어지는 무의미적인 것이 되어선 안되고, 우리의 행위는 생산적이 방식에 한해서 자신의 고유한 힘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주체가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우리 안에서 인식되는 주체에 의해 피동성을 지니고 그 대상의 활동에 대한 영향으로서 반응되는 존재여야 한다. 즉, 주체안에 벌어지는 낯선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그 타자로 인해 주체가 지속적으로 반성하게 되고 결국 그 타자와 동일함을 이루는 순간 말씀은 인간과 연합하여 인간의 전인을 최상의 위치로 끌어 올린다. 그것은 인간자신이 반성하는 타자로서 자신에게 대상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낯선 타자로서 인간에게 대상지어지는 것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은 분명 옳고 성도의 수동성은 매우 필연적이다.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한 즉, 본 것(증인으로서의 부르심)을 어떻게 무슨 언어를 사용하여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어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리가 살펴볼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보다 순수한 방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바로 칼빈과 칼 바르트와의 대립속에서 찾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은 옳은 말로 평가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마음대로 사는 삶은 인간의 마음을 주체로서 실현하는 삶에 한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말인 듯 싶다. 지난 포스트를 통해 나는 이 진술이 나오게 된 배경을 짧게 소개하였다. 칼빈과 칼 바르트와의 관계는 사실상 약간 복잡하다. 둘다 계시를 경험하고 각자의 시대속에서 사명을 잘 감당했지만 칼빈의 신학과 바르트의 신학은 판이하게 다른 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개혁주의는 사실상 칼빈주의다. 김성수 목사의 초기 설교가 그랬고, 현 시점의 90% 이상의 교회가 바로 이 칼빈주의를 기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는 칼빈의 교리를 암묵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만큼 인정하고 있고 칼빈의 교리를 벗어난 것은 거의 이단으로 규정하려 한다.



칼빈의 자연계시니 예정론이니 하는 것들은 각설하고(물론 이것을 다루는 것은 매우 유익하지만) 이 목사님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영역인 성화론적 측면 곧, 죄 인식의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지난번 포스트에서 말했다시피 칼빈과 칼 바르트의 가장 큰 대립이 무엇이냐면 바로 존재 설정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정론과, 계시론, 삼위일체론 등이 양측간에 논쟁적인 구도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대신학자들이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태도를 가지려하는 시도들이 나타나는 이유기도 하다. 칼빈이나 칼 바르트나 둘다 모두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였다.



칼빈이나 루터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발견하고 죄 인식을 이루어내며 그런 죄에 대한 해결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바르트는 오직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계시에 의해서만 인간이 죄 인식이 가능하며 그로써 말씀(그리스도)과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그들 서로는 같은 원리 안에서 같은 말은 하고 있지만 언어가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바뀔 수 있으므로 바르트는 그의 사유를 통해 모든 출발점을 바로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을 설정해 두려한다.



이런 바르트의 태도는 사실 매우 성경적이다. 그리고 성경을 오직 예수와 십자가 그리고 은혜로만 보는 바르트의 해석들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자 그럼 이제 이근호 목사님은 어떻게 바르트의 신학을 응용하여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새롭게 설정하였는가? 하는 부분으로 넘어가 보자.



이근호 목사님이 보기에 예수로 부터 시작되지 않는 것은 다 가짜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해는 그 안에서만 참으로써 나타나고 충족될 수 있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지속적인 죄 인식이 가능하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에서 계시를 경험하고 날마다 그 계시가 내어주는 효과 속에서 자신의 죄를 생성하며 그 죄를 통하여 은혜를 발견하는 작업을 지속하게 된다.


이것이 참이라면 그의 말대로 성도는 정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경험되어지기 까지 그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허무하고 어리석고 자기 기만들과 방어들이며, 율법화를 촉진하지만 그러면서도 죄를 나타내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의 활동이 확보됨으로써 죄가 가려지고 죄가 가려지므로 은혜가 발생되지 않는다. 어떤가? 내가 보기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간과 한 것이 있다. 사실 그가 간과 한 것인지 아니면 애써 간과하려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신학에 배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은 자신들의 활동으로써 율법을 지속하면서 죄를 가리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욱 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죄에게로의 속박이다. 요즘 복음을 말하는 자들이 너무 쉽게 자유를 내다 팔고 있다. 성도들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면 그들이 정말 자유해진 줄 착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아마 그런 의미에서 이근호 목사님도 죄를 죄되게 하라 즉, '마음대로 죄 지어라'고 하는 뻔히 욕먹을 담대한 외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은 결핍이다. 인간의 마음이 죄를 죄 되게 한다고 즉, 그의 부패한 본성을 통해서 끊임 없이 죄를 확보 받고 그 죄속에서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죄는 오히려 그 자신에게 더욱 더 감추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죄는 분명 성령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은 그러한 죄를 발견 하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 안에 율법을 놓는 작업을 먼저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 안에서 어떻게 이 진리가 나타났는지 알고자 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지만 지킬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다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들이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그들의 경험이고 분명 하나님은 이러한 경험을 뛰어넘어 자신의 계시를 펼치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은,



이렇듯 맘대로 살라는 복음의 자유를 미리 확보하여 신자에게 주게되면 신자는 자신 안에 율법의 작용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의 허위 의식속에 형성된 자유의 확보된 개념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죄를 죄로써 인식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의 성화론 즉,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반응하는 삶은 그 자체로 율법에 묶여 있으므로 죄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도무지 그 말씀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을 보게 하심으로써 그가 십자가를 경험토록 하실 수 있다. 반대로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대로 어차피 그리스도의 사건은 무시간적으로 그 효과를 진행하고 있고 성도의 아무런 조건을 삼지 않으니 마음대로 살아 죄를 드러내어 그러한 죄를 그리스도 앞에서 인식하게 되면 그것으로 은혜를 전환하여 받으라는 진술은 허무하고 빈약해 보인다.



물론 불현듯 찾아오는 계시의 출현은 동의하지만 그러한 계시가 오기까지 주님은 성도를 얼마나 단련해 가시는가? 어떻게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고(물론 그것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질서안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죄에 대한 인식과정이 가능하고 죄의식이 올바로 진행될 수 있는가? 이미 그는 헛된 자유개념을 확보 받았는데도 말이다. 다시 질문을 통해 반복하여 알아보자.



신자는 스스로에게 율법을 부여하는 삶에도 동일하게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함으로 죄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칼빈을 통해 역사의 한부분을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것은 틀렸지만 우리는 틀렸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럼 일련의 단계적인 죄의식 없이 계시에 도달할 수 있는가? 단지 그리스도의 사건의 효과로 나타나는 삶의 자유속에서 죄는 어떠한 과정없이도 신자에게 한번에 엄습해올 수 있는가? 성령의 활동의 과정들이 그러한가?


만일 성경의 법으로 율법을 삼는 과정을 제외하고 말씀의 효과만으로 죄인식이 가능하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물론 계시의 우선성에 동의 하지만 그것이 우선되기 위해 수많은 거짓 회개들이 동원되지는 않았어야 했는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요한의 세례는 얼마나 제 때에 맞춰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는가?



이근호 목사님의 진술을 내가 위험하다고 혹은 결핍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는 성도 자신이 계시를 받기 이전의 위치에서 작용되는 전제를 제공받지 못함이며, 이 전제는 바로 성령이 활동성이고 이것의 결핍은 오로지 말씀의 효과들이 이미 진행 중에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제 멋대로 내버려둠으로써 허위의식의 자유 속에서 죄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을 놓치게 하고 있다는 그것이다. 이 계시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 이해로 인해 증명이 매우 불분명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만한 쉬운 의미로서 성경은 증언되어야 하며 그런 방식으로 모든 오류와 지식에 대한 오해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변적 진리를 자신에게로 앞서 끌어당겨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 하려 했는가?

인간은 생래적으로 율법 아래 매여있으므로 성경을 법으로 소유 삼아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속박에서 풀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뿐이다. 설교자는 다만 그 계시가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신자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러한 고민을 매개로 진리를 온전하게 선포해야만 한다.


 성령은 어느 때든지 어느 영역에서든지 위치된 신자의 율법과 죄를 폭로하실 수 있다. 신자의 위치가 칼빈의 성화론적 위치든 바르트의 그리스도 안의 존재적 위치든 상관 없이 말이다. 죄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성령을 통하여 가능하며 성령은 모든 인간의 모든 활동과 영역과 신학과 이해의 거짓됨에서 조차 가능하다.



정리하자면 설교자가 만약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계시받은 자에게 이미 얻어진 결론 즉, 그리스도의 사건을 볼 수 있는 영적인식으로써 성도를 가르치고 그가 그것을 받아 개념화 하였을 경우 그는 자신이 자유에 놓여져 있음을 전제하고 그런 자유를 보장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될 것인데 그러한 경우에 그는 철저히 이방인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근호 목사님의 담대함은 어차피 성도 자신이 막 살아도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을 조건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의 삶의 내용 여부와 상관없이 계시가 충돌되면 그는 신자인 것이고 아니면 신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만일 성도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한 인식을 늘려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보장 받은 자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의 의식과 의지에 따른 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왜곡된 성화론도 주님의 전체적 시간안에서 의미를 놓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오류라도 인간안의 율법의 속성을 작동시켜 다시 죄안에 가두시며 그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것을 굳이 기독교 전체가 잘못되었느니 어쩌느니 하며 스스로 적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 온전한 진리의 선포인가?




계시를 경험하지 못한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마음대로 사는 삶이란 어차피 주님께서 자신의 계시로 찾아오실 것이라는 담대한 자유보다는 자신의 육체적 기회를 더욱 늘려 고난과 고통을 더해주며 그 스스로의 인생을 허비하게 한은 그런 시간을 매우 충분하게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성경의 재판관이 되어 그 자신에게 법을 부여하여 율법을 촉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가 보이실 계시를 위해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며 이에 대하여 우리의 시각으로 어떠한 판단도 내려선 안된다고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건은 처음엔 매우 희미하다가 성령을 받은 후 그 성령안에서 선명하게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자도 그 사건을 이해하기까지 그 자신을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선 결코 안될 것이다.



아무리 그 자신이 자유에 놓여있다는 이념속에 들어가 있을 지라도 성령이 없이 어떻게 죄 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단 말인가? 비록 그 자신이 성경의 입법자가 되어 그 자신에게 도덕법을 부여한다 할 지라도 성령이 그의 무력성을 폭로 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죄인식이 가능하단 말인가?



또한 어떻게 성령에 반응되는 자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으며 자신 안에서 드문드문 인식되어진 그 죄에 대하여 수치스러움과 비참함을 느끼며 통렬한 돌이킴을 간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성령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신의 부패한 마음대로 사는 삶에서 돌이키길 간절히 희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의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놓여진 자유 속에서 별안간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올바로 주어 질 수 있단 말인가?



굳이 부패한 마음의 본성을 따라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할 지라도 성령은 충분히 우리 마음의 추악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죄로써 인식할 수 있도록 드러내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죄를 드러내려 노력도 하지도 말고, 부패한 마음의 본성을 내버려 두지도 말고, 마음대로 살겠다고 헛된 자유를 꿈꾸지도 말아야 한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막연한 계시의 필연성을 더욱 희미하게 하는 것이며 자신을 그러한 시간 안에 둠으로 고통과 번민을 갖고 메마르고 무력한 마음 그리고 공허한 정신을 갖게 하는 일에 매우 열성적일 것이다. 이렇듯 진리를 이성의 원리와 체계와 논리성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런 자기의 사유를 설교하는 자들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들은 거듭난 성도라는 많은 열매를 보았는가?아니면 진리를 안다고 하는 수많은 입법자와 판단자만을 배출하였는가?내가 경험한 바로는 후자쪽이 헐씬 더 많다.



이 후자들은 말로는 은혜를 말하면서 지식이 모자란 자들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받으려 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신뢰하는 설교자를 비판하면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없이 무조건 적으로 방어하려 달려든다. 그들은 예수를 지키려 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사를 방어하는데 더 에너지를 쏟는다. 어떻게 이런 현상들이 발생하는가? 같은 예수를 말하고 그 예수를 지키려하는 수많은 시도들 속에서도 말이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이 삶의 과정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경험해야 할 그 이상의 앞선 사변적 진리들을 끌어 사용한다. 지식은 채워졌는데 말씀이 자기 안에서 참된 진리의 실재로 나타나질 않는다. 즉, 자신이 이해한 어떤 말씀도 실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더욱 이런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자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일만 마디로 방언을 하는 것보다 이해할 수 있는 한마디의 예언이 나은 것처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한 통찰을 말하는 것보다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의 전인적 고백이 충분히 녹아들어가 있을 때, 설교자와 성도사이에 영적인 교통사이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가 더욱 큰 파급력이 생긴다.



 진리를 경험한자가 사변적인 통찰로써 진리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매우 단계적으로 성도에게 주어져야 한다. 오늘날 미디어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생략시키고 있다. 저마다의 설교가 무분별하게 주어짐으로 많은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올바로 정립하는데 불편을 갖고 있다. 그냥 이것 저것 듣고 보고 좇아 다니지 말고 자신의 교회에서 아니면 바른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를 찾아 그곳에서 고민하고 씨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주님이 이 사람을 통해 듣게 하시면 그 사람의 것을 듣고, 다시 저 사람의 것을 듣게 하시면 그 사람의 것을 들으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성령의 역사를 앞서가지 말아야만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의식은 아무리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만 한다.






(박전도사님에 대한 나=이근호의 답변)


“그리고 나를 비롯해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지만 지킬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다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들이였다.”

 

이게 문제다. 참으로 십자가를 만난 자는 ‘지킬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함’ 자체가 죄가 됨을 늘 소급적으로 확인하는 양상임을 고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죄를 자신에게 덮쳐 씌워진 세력화된 상황 그 자체임을 알지 못하고 (‘불순종의 영’ 엡 2:1-2) 자신이 다루어 하는 어떤 대상체로 여기고 있는 선악과 원리에 근거한 육신의 소욕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로만 활동하시는 영역에서 ‘나의 구원’을 시도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이다. 어떤 식으로도 인간 구원은 없다. 죄인은 ‘추방되고 심판받을 대상’이라는 조건이 계속 유지되는 조건 ‘예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재료가 될 뿐이다. 애초부터 인간이란 언약적 완성상태에 대해서만 인정받는다. 이 상태를 이룩하신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고, 성도란 예수님께서 자기 몸의 지체로서 새롭게 창조하신 ‘왕의 백성’들이요 양자들이다.



칼빈의 문제점은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칼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경로를 우회하더라도 “설마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시지는 않겠지”라는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은 신학이 곧 칼빈 신학이요 칼바르트 신학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은 다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사도 바울은 본인의 기대나 (자유)의지나 소망을 제쳐두고 일방적으로 말씀과 언약에 의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가 갈라디아서 1:8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본문에서 ‘우리’라고 하는 소여적 위치가 어디에 있는 가를 주목하자.


즉 비록 사도를 포함해서 사도의 말에 신빙성을 보내는 소위 성도라고 하는 ‘우리’가 할지라도 지속되는 복음의 활동성에 준해서 위배되면 당연히 저주받는다는 원리로서 지금도 복음의 위력은 살아있다는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래서 나도 신자 맞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성도는 복음의 살아있음에 종속되는 것이 수동적 결과물 관계로 늘 생산되어진 존재로 변이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구원받은 자신’이 자신에 대한 관찰이나 분석을 구원의 반복되는 주체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서 계속 나오는 활동성을 유일하게 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또 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1-22)

즉 기존의 ‘나’를 포함시켜주는 그런 ‘너희’가 아니라, 구원받고자 시도한 그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제거해버린 그 상태의 유지가 항상 이어지는 상태에서 등장하는 ‘너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낯선 존재이듯이 성도 본인에게는 매일같이 낯설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말씀의 활약상’의 결과다.

이는 ‘자아’와 상대할 타자로서 ‘삼위일체’라는 영적 대상자를 상정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칼빈의 신학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성질이다.



칼빈은 언약의 우월적 위상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활동과 성과를 결국에는 무의미한 죄에 불과함을 미리 규정지을 의사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신의 주권’과 ‘죄’를 외쳐도 결국에는 ‘죄 속에서 나올 의’를 미리 기대하고 시작한 신학 작업이었다.



이는 곧 우회적으로 인간의 자체적인 근원적 구원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의도를 숨기지 못하고 노출시키는 알고리즘( 논리 전개 순서)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복음적 평가)


사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사단의 의도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세상 속에 나타나는 것을 결사적으로 가로 막는 일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께서는 한결 같이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의 사단과 상대하시는 분이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늘 자기 백성을 매일같이 십자가로 집어넣어 “너는 이미 죽었음”을 확인시키시고, 더 이상 죽은 자가 자신의 미래를 고려할 그 어떤 건더기로 용납하지 않게 하신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 증거케 하신다. 약속의 실행자는 성도가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말씀이 인간들의 세세한 활동을 놓치지 않고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지적하시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저자의 주장대로) 인간들의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신앙 활동에 자체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긍정적 의미를 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주장은) 죄의 세력화와 통치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가운데 인간에게 그 어떤 긍정적인 것은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그 굴레에서 벗어남에 성공자라고 나타내고 그 벗어남의 원칙이 오직 ‘언약’으로만 가능함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성령님의 조력도 오직 이 의미로서만 ‘그리스도 몸의 지체’에게 반복적으로 작용시키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 기능으로 인해 예수님의 죽으심(십자가 복음)만이 부각될 뿐이며 이것만이 의미 있다.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시는 기능이다. 성령조차도 예수님을 구심점으로 여기시는데(요 16:13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인간들이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구심점을 놓기를 싫어하고 외면한다. 그게 바로 사단이 평소에 바라고 있던 바다. 성도는 결코 삼위일체의 증인으로 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등장되는 존재다.(행 1:8 “나의 증인이 되리라”) 그런데도 왜 저자는 자꾸만 삼위일체이론을 균형 있게 챙기려하는가? 그게 바로 이성(理性)의 함정이다.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제거시킬 수밖에 없었던 그 이성의 힘이 또다시 고개를 쳐든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이상규 16-03-23 12:32 

성도가 아닌자들의 공통된 결론은 "내 쪽에서" 예수님 알기 혹은 믿기, 죄 이해하기 , 예수 안을 신학적으로 정리. 계시 묵시 알기...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나"  에게로 돌아갑니다. (행함. 성화론.  개혁주의, 개인 구원) 십자가마을 "이전 게시판글"" 참조  이들은 나(죄인) 를 통해서  십자가 은혜에 감사가 되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괜찮은 나로 항상 돌아옵니다.


이런 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된 점은 죽은 자,,, 막 사세요,,, 그냥 사세요,,, 묵시 증거,,,성도의 삶을(죄) 복음 위해서 사용,,,나는 점,먼지 같은 존재,,, 성도는 십자가를 위한 도구 부속,,, 주께서 하셨습니다.는 말씀에 (우린 뭐꼬?) 라며  발작을 하며 화를 내며 십자가 마을을 떠납니다. 내가 믿는 행위를(행함, 자기 부인 안됨) 마귀가 십자가 공로를 막는 일에 사용하고 있음을 모르는 불신자입니다.


 이상규 16-03-23 12:45 
,이 목사님 신학은 완성된 언약, 복음을 항상 가리킵니다.
전에 표현 처럼 달(십자가만 자랑 )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생명 없음)
혹시 이 복음에 칼빈이나 바르트 처럼 교회,, 예수 믿는 나, 행함,, 신학,, 등을 섞는다면
그때는 태양의 후예들 처럼 "이렇게 설교,강의 하시면 복음이 아닙니다. 말입니다.^^" 하시면 됩니다.  전도사님...


 이근호 16-03-23 13:01 
'교회 있음'이 문제거리입니다.  죽을 때, 사람이 바뀌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미리 바뀌어야 하는데, 자꾸만 교회나 교계에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신경에 곤두서 있어 그들에 맞는  자기 입장과 자기 정립에 급급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참으로 미리 사람이 바뀐 자는 이 땅에서 남들의 시선은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시선와 지시에 진중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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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내가 하는 도덕적 행위나  신앙적 행위는 그리스도의 의만 증거하는 자들보다 혹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잠재된 의식이  박정우 전도사의 심정속에 박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과 젼혀 다를바 없는  내재된 심성.. 인간의 기본적 욕망 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