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은 있다. 그런데 이단들이 변신에 변신들을 시도하기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단들은 말씀 덩어리로 자신을 뚤뚤 감고 버티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귀신들려 고통 하던 병자들이 있었지만 진짜 이단들은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했고 정치를 했고 신을 경배했다. 말씀을 달고 다녔고 걸핏하면 ‘말씀의 생활화’를 외쳐대었다. 그들이 바로 악마를 아비로 두고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요 8:44) 이 평가는 예수님의 일방적 평가들이 그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전형적인 이단들이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에 근거해서 오늘날 기독교식 이단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 실천에 열심이다.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 믿고, 성령 법아라 면 자신을 성령 받은 자로 간주한다. 바르게 살아라 하면 바르게 살고, 이웃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면 주저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산다. 새 생명 속에서 살라 하면 새 생명 속에 살 용의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옛 육에 속한 악한 일을 하지 말라하면 단호히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성령을 받아 예수 믿게 된 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정신과 영과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선하고 착한 일에 나서서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전형적인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벌써 우리가 간음자이다 는 것을 전제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들은 그들은 모른다. 전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이 이미 ‘간음자’라는 것을 선포하시면서 새삼 그 이유를 언급하시는 식으로 십자가 복음이 작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단들은 실제로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볼 줄 모른다. 기껏 다음과 같은 식이다. “아직은 간음 안했으니 앞으로도 성령님의 간섭과 도움 하에 간음 안해야지” 하는 식으로 나온다.
성경에서 “예수 믿으라”는 말은 그 누구도 ‘예수 믿는 자가 아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인간이 아무리 예수 믿는다 고 우겨도 날마다 성령께서 믿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안 믿을 자들이 인간인 것을 그들 이단들은 고백하지 못한다.
그들이 정작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성령님도 아니다. 자신의 명예와 위신과 가치를 지키는 것을 곧 하나님의 위신과 명예와 위신을 지키는 것과 직결 된다고 여긴다. 당연히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빌 2:18 ) 옛날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방식을 그대로 사도들의 명령과 권면에다 적용시켜서 결국 건져내려는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기’ 이다.
당연히 근원적인 회개가 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회개인 것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는 사도의 의미를 모른다.(갈 2:20) 그들은 죽는 척을 해서 다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건져내는데 늘 성공(?)하고 있다.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자신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자로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뭘 해도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 못한다. 그들이 십자가 대신 앞장세우는 게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말씀을 생활화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그 하나님을 그들의 손으로 지금도 날마다 죽이고 있는 것이다. 기어이 자기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 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정반대로 나오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이단의 판별은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자신이 뭘 해도 죄인이다 는 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살면 죄가 나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책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 16:8)
이단에게까지 베풀 자비는 하나님께 남아 있지 않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단'과 '이단 아님'의 차이 ]
십자가 사건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본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위치에 그대로 있으면 이단이다. 십자가를 관찰과 분석과 해석과 이해와 평가의 대상으로 보는 위치에 자신이 따로 정립되는 있는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반면에 '이단이 아닌 사람(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았기에 십자가 내부에 들어가 있다.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예수님 아버지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다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저주를 받고서는 다시 십자가 바깥으로 뛰쳐 나갈 수 없다, 예수님 아버지의 저주를 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받는다.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이 받으셨던 부활의 능력(=의의 능력)도 같이 받는다. 예수님 아버지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모든 말씀(모든 언약)의 완성으로 간주하시기에 그것을 영원한 고정성으로 정착시켜 버리신다. (역사적이 흐름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고정) 이런 묵시(역사에 대해 초월함) 속에서는 성도가 세상살이하게 되는데 여전히 십자가 사건 밖으로 뛰쳐나와서 독자적으로 생활할 수는 없고 바깥의 시간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는 묵시성을 다 보여주고 다 발산하게 된다.
즉 말씀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섞여 살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받았던 저주성을 발산하게 되고 동시에 용서와 사랑도 같이 발산하게 된다. 그래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았던 그 저주가 세상에 대한 일괄 저주인 것을 성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즉 인간이 무얼해도 저주인 것이다. 자기 몸 위주로 살기에 저주요, 자기 구원 위주이기에 저주요, 자기 축복 위주이기에 이기에 저주요, 자기 중심적이기에 저주다.
세상살이 모든 것이 저주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도달되어 그 피 안에서만 생명이 발생됨을 증거하게 된다. 예수님의 피만이 유일하게 하나님부터의 용서가 된다, 이 성도가 존재하는 것은 더이상 자기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자기 행함의 진원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독자적인 자기만의 자리가 없다. 그는 항상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받았던 저주를 함께 느끼고 예수님이 받았던 의로움으로 인해 제공받은 축복도 함께 받는다.
반면에 이단들은 자기는 항상 고정되어 있고 자신의 눈 앞에 예수님 십자가가 있기에, 장바구니를 듣고, 진열된 물품 고르듯이 진열대에 순서대로 고정된 자아의 자리에 담아 넣고 쓸어 넣기 바쁘다. 십자가 사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그 다음에 부활 사건도 담는다. 그 다음에 성령도 담는다. 그 다음에 회개도 담고, 믿음도 담고, 소망도 담고, 사랑도 담는다. 거듭남도 담고, 칭의도 담고, 양자됨도 담고, 성화됨도 담고, 영광스러움도 담는다.
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도 담는다. 특히 성화를 담는 과정에서 단계별로 정렬해서 시간적 여지를 두면서 담는다. 즉 맨 처음에는 초보 거룩함을 담다가 날이 갈수록 고난도의 착함의 경지까지 레벨을 높여나가면서 달성하는 재미를 만끽한다.
높은 경지의 착함은 '자아'라는 장바구니에 담고서는 어느 새에 말씀에 합당한 뿌듯한 인간 승리를 맛본다.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묵시적 말씀을 자기고 자기 위주의 자기만이 고수하는 역사성을 장바구니 안에서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악마의 숨겨진 모양새다. 이런 자들의 장바구니를 걷어차 보라! 그들이 역사성을 걷어차 보라! 그들은 발작한다. "나의 공들었던 신앙 경력을 누가 함부로 얕보는가!"라고 발작한다.
그들에게 있어 십자가 사건은 그들 내부에 흐르고 있는 시간의식으로 인해 이미 순서상 과거일로 넘겨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은 결코 십자가 지점이 아니다. 사수하고자 하는 것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담고 있는 자아라는 이름의 '자기 만의 장바구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악마와 한패라는 사실이 이로서 밝혀진다. 그리고 이들은 큰 소리친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사니 다들 우리 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 그들의 말이 맞다. 성경 말씀대로, 인간들은 모두 악마들 손에 잡혀서 놀아난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받은 자는 뭐냐? 참으로 불가능한 기적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 이단들의 사상 ]
하나님은 인간과 싸우신다.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 인간 배후에 어떤 권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아신다. 인간은 철저히 그 권력의 시녀이다. 그 권력을 지향하고 그 권력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면서도 이 모든 모습이 마치 인간들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 배후에 누가 있는 지를 모른다.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고 시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머리에서, 경험의 뭉치에서 조성되는 줄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시고 결국에는 흙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려 한다. 죽을 때까지…. 성경에서 인간의 죽음을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징벌로서의 사망이지 자연법칙에 따른 사망이 아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단순히 흙 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징벌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심판 받기 위한 부활이 재차 기다리고 있다.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7-29)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들 있다. 인간에 대해서 다소나마 긍정하는 면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감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고집을 부린다.
인간을 사망의 존재로 보고 있다는 현실을 애써 떨쳐 버리려고 한다. 이단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심판과 저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반자 내지는 협력자로 보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했을 때, 마귀가 나타났다. 그 마귀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8-9)
마귀는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부인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 마귀의 속성이 인간 세계에 그대로 퍼져 있다. 이단이란, 곧 인간의 가치를 높여 주자는 데 있다. 하나님 앞에서도 저주와 징벌과 죽음의 대상이 아닌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지워 버리는데 주력을 하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3:15에 보면 분명 마귀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즉 이 본문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나온다. 누구와 누구를 원수 관계에 놓이는가? 한쪽은 ‘여자의 후손’이요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이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이며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이란 다름이 아닌 생명의 후손이다. 여자의 이름이 이 약속을 받고 난 뒤 하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산 자의 어미라고 한다. 생명이란 그 출처가 생명 나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 생명 나무로 통하는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차단되고 말았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왜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하여 생명 나무 근처에 있지 않게 하셨는가? 그것은 생명 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생명 나무를 따먹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긍정을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시며 흙이 되는 죽음만이 안겨 줄뿐이다. 이것이 올바른 현실이다.
그들 인간들은 하나님이 따먹으라고 지시한 적도 없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에게 있어 그 어떤 경우라도 들어 있지 않아야 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요 인간을 더 이상 정상적인 존재로 보시지 않기 때문에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은 자체적인 지혜와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몸부림쳐 봐도 생명은 요원하다. 생명은 엄연히 인간들에게 있어 도달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도전하는 세력이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확고한 원칙에 대해서 인간들을 동원해서 함께 대들도록 부축이고 지배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 인간들은, 자신들의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이유 없이 신께서 긍정적으로 축복하고 호의적이기를 요구한다. 물론 영생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아벨의 형 가인이 자기가 드린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니깐 안색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로서 하나님과 원수인 악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음이 들통났다. 가인은 가인 나름대로 자기 행위를 인정해 주는 그런 신이기를 내심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부터 이단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단은, 인간 행위를 긍정해 주는 새로운 종교와 신을 창안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산시키는 다른 신의 약속을 인간들에게 제의해 놓고 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그 약속은 선악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나라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삼아서 이점을 기초로 한 약속이다.
1. 가인의 약속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4:23-24)
이 본문에서 “가인을 위하여”라는 대목과 “라멕을 위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라멕은 자기가 행한 행동은 가인과 비교하면서 말하고 있다. 가인보다는 둘 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행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면서 그 뒤에 “위하여”라는 단어를 붙어 있어 목적을 확실히 한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실히 최종 목적으로 삼고 행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 몰든지 아니면 사망의 징벌을 내리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 긍정에 준해서 스스로의 존재성을 최후의 진리 기준으로 삼아 행세한다. 그 입장에서 자체적인 징벌과 심판을 내린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라는 한 목적에 부합되어야만 만족한다. 또 하나의 신으로 자처하기에 늘 자기를 위한 약속을 외부로 배출하게 되어 있다. 가인의 후계들이 스스로 창안하는 약속이란, 자기 자신을 축으로 하여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을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말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당부하는 약속이요 희구요 희망 사항이다. 타인보다 더 신격화된 자아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거기에 비해 창세기 3:15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로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사단을 제거하고 다시 생명 나무 중심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즉 원래대로 하나님이 만이 홀로 영원한 신이 되는 세계이다. 결국 이렇게 되니 세계 역사란, 하나님이라는 신과 인간이라는 신과의 대결장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수로 취급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로마서 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로새서 1:21)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단으로 태어난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실존은 곧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악이란 항상 방향성을 지니고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고 악한 저의로 돌진하는 속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이단 아닌 자가 없다. 악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단이요, 하나님 보다 악마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순응한다는 점에서 이단이요, 현 모습 그대로 구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단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2-3)
하나님은 원수들인 인간들에게 찾아와서 그 중에서 몇 명은 긍휼히 여겨 자기 백성 삼는 식으로 마귀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악마에게 승리하시는 분으로 나타내신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의 승리만을 고백하고 증거 한다는데 있다. 거기에 비해 이단들은 인간들의 가능성과 재주와 능력과 선한 면을 부각시키는 특징을 지닌다. 즉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이러 이러한 기독교 문화를 성립시켜 왔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긍정한다. 신도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배후의 악마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공로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 주권’, ‘하나님께만 영광’ 이라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 구호를 부르짖는 자기 자신의 선한 행위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교활한 자들인 것이다. 자기네들이 이런 선한 일을 했기에 자기만큼은 타인보다 더 위대하게 만들어 주어야 참된 하나님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인간 공적의 우열로 측정하고 싶어한다.
악마가 제시한 약속은, 인간의 공적도 같이 부축여주는 영원한 세계를 구성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성경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 4:10-11)
자기 존재의 확실성, 혹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계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자기를 위한 새로운 계시를 거론하는 것과 같다. 이 계시 안에는 인간들 서로의 영광만이 존중된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결국 이단이란, 인간을 궁극적으로 긍정하기 위한 계시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 종교를 건립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최종적인 영광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까지는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다. 악마의 속성이 이제는 인간의 속성이 되었다.
2. 아벨의 약속
아벨에게 나타난 현상은, 아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현상이 아니라 다, 아벨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 실현을 두고 말한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죽은 자의 대표자가 된 남편 아담과 대비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에 속한 모든 이는 죽는다. 생명과 관련 없다. 하지만 생명은 남편 아담과 상관없이 따로이 하나님에 의해서 여자와 관련 지어 땅 위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남편과 관련 없이 태어나는 자식의 의미란, 일단 하와에게는 자식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설치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4:26-27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본문에서 “잉태치 못한 자”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약속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일단 “모든 산 자의 어미”는 이 지상에 자식이 없어야 된다는 조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하와는 가인과 아벨 두 자녀가 있었지만 모두 다 자식이 될 수 없었다.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아 부모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 자식도 없는 주제에 어미는 되어야만 한다면 이런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까?
그것은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한 살아 있는 존재자가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되는 것이다. 즉 죽은 자의 대명사인 남편 아담과 상관없이 하와에 담긴 약속에 준해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자식이 출산하면 된다. 그것이 셋이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세기 4:25) 그런데 이 본문에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에 주목해야 한다. 아벨은 분명 죽은 자이다. 하지만 가인으로부터 살해당한 이 아벨 대신에 셋이 태어난 것이다. 셋이 아벨을 대신한다면 아벨은 셋 안에서 여전히 산 자가 된다.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셋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벨과 셋 노선은 하와에게 내린 약속의 실현 과정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산 자의 어미”에 합당한 증거자가 된다. 비록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낳은 자식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자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것도 죽은 아벨 대신이라는 단서를 붙이므로서 하와에게 내린 약속이 가인과 악의 방해 공작에도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없었던 자식이 새로 생겼고 끊어졌던 산 자의 노선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모두 다 하나님 혼자 만의 공로이다. 갈라디아서 4:26-27 초반까지를 다시금 적어 본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어머니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혈통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로 통한 잉태를 모두 부정하는 어머니이다. 죽은 자밖에 낳을 수 없는 그런 출산을 고발한다. 산 자만이 잉태하고 출산시키는 것은 위에서 할 몫이다. 즉 아벨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지 인간을 못하는 법이다.
3. 서로 다른 약속관 때문에 발생되는 혼란들
(1)천국(하나님 나라)
이단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자기 몸을 편하고 유익하게 해주기 위한 천국이다. 늘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영원히 죽지 않고 건강하면서도 만족스러운 환경 안에서 살 수 있는 천국을 그리워한다. 또한 그런 것을 성경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단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 완성된 상태를 두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시는 세계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한다고 한다면 자신이 현재 그 어떤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란 십자가와 부활로서 이미 완성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은 일을 마무리하셨는데 어떤 인간이 자기 삶이 고달픈 자기 처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천국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감사와 찬양이 바르게 나오겠는가? 아니면 찬양과 감사를 하되 무언가 나름대로의 속셈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자는 아직도 자기를 즐겁게 해줄, 자기 뜻에 부합되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그래서 천국은 이단들에게 항상 바겐세일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약간의 지식과 상식에 동의한다면 천국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투리 시간을 내어 성경 공부나 묵상 시간을 갖게 된다면 천국을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기술 영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에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터득하기만 된다고 한다. 내세 준비를 일찍 감치 해놓고 살아보자는 대중들에게 있어 이러한 천국 바겐세일은 인기가 높다.
일단 천국에 자기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살면 남은 여생이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것이라는 계산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참된 영생이나 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태복음 19:21-24)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5-27,3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62)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누가복음 13:24-27)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5)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 22:1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천국에 들어 갈 백성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같은 사고 방식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같은 수모를 받도록 되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9)
천국은 농담거리도 아니요 심판은 허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기준은 인간들이 내세운 기준이 아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주님도 봐주지 않는데 아무런 심판권도 없는 이단들 자신들이 나서서 대충 대충 천국으로 집어넣겠다고 나선다. 어쩌구니 없는 사태이다. 전문의가 거절하는 환자를 돌판 둘이 우러러 힘으로 밀어 붙여서는 천국 문까지 부수려 하다. 기가 막힐 사기극이요 항명이다. 천국은 오직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자기나 자기 교회나 자기 교단을 사랑하는 자는 한발자욱도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 천국이다.
오직 한가지 주님만 고수해야 한다. 그 외에 것에는 상대적으로 다 미워해야 한다. 자기 자신까지! 주님 이외에 모든 것을 버린 자에게만 천국에 들어간다. 이것은 사실상 자아의 죽음이다. 갈라디아서 2:20에서는 이것은 ‘믿음’의 진수로 보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사건이지만 성령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시켜 천국 상태를 만들어 내었다. 성도를 예수님과 더불어 늘 죽어 있는 상태를 조성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라디아서 6:14,17)
천국은 아무나 다 들어가는 데가 아니다. 오직 생명책에 이름이 등록된 자만이 들어가게 된다. 이 외에는 어림없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38-39)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데살로니가후서 3:2)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요한계시록 20:15)
이단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제한적 구원 행위에 반발하면서 독자적인 구원 기술 계발에 주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혀 이들의 행위에 쇄기를 박는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태복음 19: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성령님이 이러한 행위는 오로지 예수님의 지시에 준해서만 이루어진다. “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한복음 3:34-35)
이단들은, 하나님에 도전하는 세력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국을 쉽게 약속한다. 이 약속은 바로 가인 노선을 따라 나온 것으로서 지옥 가는 약속이다.
(2)교회
이단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가시화 된 계시와 물질화 된 거룩으로 조립한 인간 조직을 뜻한다. 이들은 말씀의 밋밋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 말씀이 짜릿하고 특수한 체험으로 자신의 감정 속에서 터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군중들의 술렁거림과 급격한 집단 최면을 마치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간주하려고 한다.
계시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 오는 신비함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자신의 이해도와 결부시킨 교회상을 그들은 머리 속에 그린다.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 교회를 감히 생각하지도 않으려 한다.
참된 교회는 인간의 이해 한도를 능가하여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제공되고 세워진다는 상식을 그들은 이유 없는 것으로 거부하려 든다.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확장될 수 있고 팽창시키는 기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루가 달려 있는 교회로 전환시켜 놓고 있다.
인간의 그 어떤 시도도 허용하지 않는 교회를 생각 못하고 있다. 삼위 하나님의 일방적인 작업으로만 이룩되는 것이 교회인 줄 모르고 있다. 이 무지로 인하여 교회도 아닌 것을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도의 회개만이 보여지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상한 심령 자들만이 차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왜냐하면 이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이 은혜로서 작용되기 때문이다.
(3)기도
이단들의 기도는, 자신의 살아 있는 의미와 가치를 있을 만한 내용물을 달라는데 주력한다. 즉 “하나님, 저는 과연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이 확실하지요. 그렇다면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뭔가 조치를 취해 주세요. 가치 있는 거리를 저에게 허락해 주세요” 라는 식의 기도이다.
자기만큼은 망해서는 안 되고 자기만큼은 남보다 뒤쳐져서는 안되고 자기만큼은 불치병에 걸려서는 안 되고 혹시 걸렸더라도 보란 듯이 기적적으로 나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선교 단체나 교회 집단이 다른 교회 보다 사업이 번창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이 적절하게 평가하여 그 설계도대로 세상일이 짜 맞추어 굴러 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에 공들인 만큼 반대급부를 부여해 달라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단들의 기도는,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그 교만함이 교묘한 성실성과 충성심으로 포장된 채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드려지게 된다. 다른 말로 말해서 예수님을 하시고자 하는 그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사 기원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계획과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우리는 빌 바 조차 모르는 존재들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우리들이 하는 기도는 기껏해야 자기 생존과 영광에 주력한 기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악마가 원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져 있다. 그것은 돌이 떡이 되는 것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특별남을 희한한 기적으로 증명해서 유명 인사가 되는 것이고, 세계를 자기 손으로 정복하는데 포부와 비전을 두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하면 악마가 얼씨구나 하고 와서 도와주고 이루어 준다. 철저하게 자기 종으로 삼고 싶어서이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기도는 오직 하나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성도의 기도는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기고 오직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한 기도일 뿐이다.
(4)전도(혹은 선교)
이단들의 전도나 선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들의 활동 사항으로 이해하고 남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참된 뜻은, 자기 집단의 과거 역사로서 보여질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세계 각국 오지에 파견한 선교사들의 순교적 활동들이 한 데 모여 훌륭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동시에 그 선교사를 파견한 자신들의 행위는 진리에 합당한 행위로서 확인 받게 되리라 여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자기 집단이 존재하는 것은 같은 차원에서 발생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집단의 정당함과 권위성을 챙기려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 집단을 긍정하려 한다. 자기 집단의 긍정을 위하여 이들은 신성한 소명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업에 전력 투구한다. 하나님께 충성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행위임을 확인 받고 싶어 자기에게 매질을 가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전도란, 성령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이 하는 사업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시켜서 할 따름이다. 그리고 어느 장소, 어느 경우라도 다 전도가 되게 되어 있지 중심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것에 얶매인 전도란 있을 수 없다. 성경에 있어 전도의 중심지란 하늘에 계신 어린 양의 보좌뿐이다. 거기서 모든 것을 조절하신다. 과연 전도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인간의 타고난 정복욕을 참지 못해서 계시를 새롭게 찾기 갔는지는 선교사들의 고백을 조사해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왜 고향에서 살지 않고 먼 나라에 식구들 몰고 갔습니까?”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복음 전하라는 지시가 떨어져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지시만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선교비를 후원해 주는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왜 그렇게 시비조로 묻습니까?”
“선교비를 후원하는 그 교회에 관심 두면 그것은 곧 그 교회에 선교하는 밖에 더 됩니까? 후원해 주는 교회에 간섭하고 그 교회 내막에 관여하며 선교하라는 것이 당신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지시가 아니지요? 제 말이 맞지요?”
“…”
“과연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지시로 그 나라 선교사로 갔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당신은 그 나라 국민이 되고 그 나라 시민이 그 나라가 당신의 생애 동안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말해서 선교하려 간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자기 고향에 자기 형제들에게 전도하는 사람이지요. 즉 그 동안 한국이라는 타향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이제는 제대로 당신의 고향을 찾아서 거기에 있는 교회를 봉사하게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 동안 한국이라는 남의 나라에 산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라는 것은 없고 단지 전도밖에 없지요. 한국이라는 남의 나라에 신경 쓰지 말고 한국에 있는 교회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 고향에 있는 백성들이나 신경 쓰는데 어떻게 그것이 선교가 됩니까? 전도이지요. 그러니 당신은 선교사가 아니라 그냥 그 나라 교인에 불과하지요 정말 당신이 선교의 중심지인 하늘 나라 그 자체에서 지시를 받은 자라면 말입니다…”
이단들이 내세우는 선교사는 이처럼 겉으로는 하나님 운운 하지만 속으로는 인간들의 돈이 모이는 종교 사업체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전도자, 어느 나라 태생이든 상관없이 지금 자기가 자리 잡고 있는 장소에서 오직 하늘의 본향만 그리워하는 나그네들뿐이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9-10,14-16)
(5) 믿음
이단들이 주장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작업을 인간이 하는 작업으로 대체하는 노력을 두고 말한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대목에다 ‘인간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로 전환시켜 놓고서는 인간 본인이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실현시키려는 행위이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힘 주어 가며 반복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어!”를 강조하는 것과 같다.
철저한 인간 긍정적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일의 시발점이 아니라 “믿고 있는 인간의 자아상”을 모든 하나님의 일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마치 대기업인 하나님이 중소기업인 인간에게 작업을 하청 준 꼴이 된다.
하나님과 동업자인 양 여겨 자진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으려고 한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뭔가 부족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미흡한 하나님으로 전락되었다.
인간들이 태업을 한다든지 고집을 부리면 그만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괴상하고 요상스러운 하나님이다. 이단들의 머리 속에는 이런 바보 같은 하나님만이 들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보로 만들어야 그들이 ‘자기 믿음’을 통한 ‘자기 긍정’의 발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몫까지 뺐고자 덤벼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이런 괴상한 하나님을 결코 안 계시다. 성경에서의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 홀로 하신 작업이다. 그 어떤 인간의 도움 없이 말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로마서 11:33-36)
이 “아멘”에 합당한 마음을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은, 모든 일을 하나님 혼자 해 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만족함에 이를 수 없을 정도로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만 인정되고 그 이외의 어떤 행위로도 의가 산출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로마서 3:23-24,27)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에서도 나온다. 원래부터 의로우신 분이 또한 지상에 의로운 행위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나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17,21)
성도가 의인되는 것도, 믿고 난 후에 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신 죽은 분’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이처럼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만을 고집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뒤에서 후원하는 식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온전히 하신 일에 흠집을 내고자 작동하는 악마의 술책이다.
(6)축복
인간은 희망과 공포, 이 둘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마치 가인이 선과 악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과 같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영광받는 대상이 되는 것을 겨냥하는 희망이요, 공포란 자신의 과오에 의해서 자기에게 재앙과 불행이 벌이 떨어지면 어떻하느냐에서 오는 불안을 두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들이 생각하는 축복이란 다름 아닌 자기가 의인으로서 하자 없는 말끔한 존재로 남들에게 나설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과 연관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축복은 오직 영생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3) 인간들은 생명에 관한 한 자기가 해결하려고 덤벼든다. 자신의 바른 행위에 따른 선한 결과를 생명을 부지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자기 공로와 영광이 높아질 것이 아닌가. 선악과를 따먹은 성질은 항상 살아있다. 그래서 개인 소유물 없이는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유물이 있어야 비로소 생명이 되는 줄로 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까지 찾아와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부추긴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점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다. 인간은 태초부터 말씀의 피조물이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다.
그러나 악마는 이러한 인간은 자기 소유물의 종이 되도록 변질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그런 법칙 하에 매이도록 유혹한 것이다.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식 이외에 그 어떤 방식에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인간은 신에게 소유의 증가를 호소하겠금 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영생이 아니라 자기네들이 원하는 소유물을 증가시켜서 그 다음에는 자기 식으로 그것으로 생명을 부지하겠다는 계산이다.
실상에 있어 인간이 생명이 사라진 것은 죄 때문이지 소유의 모자람 때문이 아니었다. 따라서 소유를 풍부하게 마련한다고 영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생명이란 소유물의 축적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열매로서 제공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명기 9:1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나오게 된 것은 그들에게 축적된 힘이나 소유의 풍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17-18)
이단들은 그 어떤 시도를 해서라도 하나님의 동행 없이도 존재가 가능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창세기 6:5-9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의중은 이러한 마귀의 계략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즉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 곧 저주이며 반대로 하나님과 동행되는 것이 축복이다. 비록 외부에서 보기에 비참한 지경 안에 놓여 있지라도 말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5-37)
(7)기적(혹은 계시)
이단들은, 인간들의 본성 위에 종교를 건설했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이 자기를 소외시키고 매사를 진행시키면 섭섭한 감정을 곧 터트릴 마음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을 배제하고 일하는 그런 하나님을 아예 상상조차 안 할려고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거들어서 발생된 일에 대해서만 사는 재미와 보람을 갖는다. 직접 거들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든지 응원을 했던 일이 잘 되었을 때에 존재하는 가치와 보람을 느낀다.
이처럼 은연중에 늘 패를 가르고 편을 짜면서 생활한다. 물론 이 편가름은 순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라멕이 불렀던 노래처럼 자신의 존재 의미에다 진리의 터전을 닦는다. 기적이라든지 하나님의 계시도 이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본인이 이해하는 신의 계시만이 계시로 간주하려고 한다.
자신이 이해 안 되는 쪽으로 계시가 비켜 갈리 가없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해 버린다. 기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신기하다고 느껴질 때만 기적으로 간주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일과 계시와 기적은 이 우주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복음 5:45)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시편 19:1-6)
그리고 하나님이 종말 때 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이루어진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0)
바로 이것이 기적이요 계시인데 이 기적 가운데는 성도가 새로 생겨나는 것도 포함된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1-12)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이 이미 창세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 백성을 건지기 위한 조처였고 또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이 일을 겨냥해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기적이다. 쉽게 말해서 오직 미리 선택된 자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구원받도록 계시가 진척되어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창세 전부터 예정된 말씀대로 하나님이 일을 추진하셨는데 무슨 인간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따를 돕는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신다. 물론 어떤 인간의 도움없이 혼자 하신다. 홀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분의 권력 밑에서 움직여진다. 심지어 천사와 악마까지도 그렇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로새서 1:16)
세상은 결코 인간 중심이 아니다. 그리스도 중심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 몸의 머리이시다. 따라서 그 하나밖에 없는 교회 이외의 교회는 없다. 왜냐하면 머리 부분은 오직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 4:4-6)
이단들은,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위하여 있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네들이 투자하여 세운 교회를 확장하고 유지,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기해 보이는 체험들을 수집하고 신기해 보이는 계시들을 조립해서 자신들의 단체를 정당화하려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정신 안에 들어 있기에 자기 조직을 결코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조직을 오늘날까지 보존하는데는 자신들의 종교적 간증과 체험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계시를 골라잡아서 그것으로 사이비 교회를 만들어 그 안에서 영원토록 자신들이 영광을 받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단들이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 몸의 유일성에 도전하는 단체라는 것은 말 할 나위도 없다.
결 론
점차 한국 땅에도 구원과 천국과 상관없는 기독교와 교회가 확산되고 있다. 고상한 성인들이 고상한 삶을 위한 노니기 위한 장소 제공으로 교회로 변질되고 있다. 이렇게 등장되는 이유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영생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천국에 무관심해 졌고 또 실제로 관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배하는 상태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물로서의 일종으로서 구원이요 영생이요 천국이다. 인간은 워든지 일단 자기 소유가 되면 자기가 주인이 되는 틀로 고정시켜 버린다. 예수든, 성령이든 모두 다 여타의 소유물로 함께 다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고객 성향을 맞추지 아니하면 교회 운영이 지장이 된다는 불안감이 교계에 퍼져 있다.
따라서 교회가 그들을 다시 붙잡고 놓치지 않는 방도를 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들을 주인으로 대접하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상술과 같은 차원이다. 교회가 주님과 관계있는 단체가 아니라 인간과 관계있는 단체로 전환된다. 교회 머리되시는 예수님과 같이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인식으로 진리를 전파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마치 인간들의 협동체처럼 여겨서 그들이 흥미 있어하고 그리고 소망하는 바를 단지 하나님과 결부시켜 긍정해 주는 장사를 벌리는 것이다. 죄문제를 거론해서 스트레스를 주어왔던 교회에서 이제는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정신 휴양 시설로서의 교회가 되고자 한다.
인간은 꿈이 없이는 시체와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희망거리를 내부로부터 만들어 내면서 그 희망을 속히 차지하고자 무작정 몸부림쳐 보는 것이 노동이요 또한 삶의 현실이다. 그래서 신이라든지 혹은 종교라든지 하는 것은 그 희망의 이루는데 보조력으로 아쉬운 딴에 써먹기 위해서 장식품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신도 아니요 교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그 다음에 중요한 한 것은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자신의 가족들이다.
그래서 종교나 교회라는 단체는 인류가 생존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정신적 유산이나 관습이다. 물론 성경적으로 봐서 이런 류는 명확하고 확실한 이단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신의 본질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성경을 멀리하고 기피하게 된다. 단지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성스러운 단체에 출석하는 것 선에서 신과 타협하려 한다. 만의 하나라도 기적같은 행운을 기대하면서 막연하게 도움의 선을 걸쳐 놓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계나 비종교계나 할 것 없이 이 사회는 생존을 위한 결투의 장이다. “나도 살아남아야 해, 우선 살아남는 자가 되어야 가치가 있는 거야” 상대가 원하는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덕으로 종교인들은 살고자하고, 이와 같이 교회와 사회는 공생 관계로 맺어져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아닌 것이 확실하고 이단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한복음 3:19-20)
이단의 출현, 그것은 인간 자체가 원래부터 이단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꼭 이단적인 종교만 쉴새없이 만들어 낸다. 종교로 먹고 사는 종교인들은 신 세대에 맞는 종교, 현대인 취향에 맞는 종교 제조에 온갖 지혜를 모은다. 어떻게 하면 고정 단골을 확보할까에 사운을 건다. 물론 악마의 사주를 받아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안에서는 인간들의 모든 지혜가 다 총동원된다.
창조 과학이 동원되고, 찬양 부대도 동원되어 분위기를 띄우고, 전도 대회를 열어서 움집한 군중들의 열기에 스스로 자위되도록 하고 온갖 예술적 장르를 동원해서 성스러운 환경으로 청중 압도하려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태를 유념해야 한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열왕기상 22:19-23)
숫자가 문제가 아니다. 가짜를 천을 모으고 만을 모은다 할지라도 단지 가짜의 다발일 뿐이다. 이단들은 인간들의 선한 활동과 흔적의 역사를 가지고 나름대로 진지한 계시를 따로 수집하려 한다. 즉 인간들의 성스러움에 자발적으로 찬탄과 감격하며, 하나님마저도 이러한 인간들의 갸륵함에 감동 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성의 승리를 규합하여 성전화 시킨 것이 오늘날의 이단이다. 기실 외로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모두다 허구며 허상에 불과하다.
헛되고 헛된 것이 시상이라는 하나님의 세상 해석에 동의해야만 한다.(전도서 1:1-2-10) 스스로를 부인해야 한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생명 나무쪽에서 임의로 주시는 방식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어 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참된 교회는 순전히 하나님 쪽의 활동으로만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도 날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회개하는 모습으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태복음 12:28-29)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는 길은 없다. 영원히 없다.
[ 이단에 대해서 ]
1. 이단의 定義
이단이란 사이비한 기독교를 말합니다. 혹은 유사 기독교를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같은데 좀더 조사해 보면 참된 기독교가 아니 것을 가지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기독교 형태를 갖고 있지 않는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것은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타종교' 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종교를 하나 만드는 것은 누구나 봐서도 기독교하고 다르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기독교 근처를 배회하면서 참된 기독교들을 유혹하고 헛갈리게 하는 신흥 종교들이 문제가 되기에 우리들은 그들을 이단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단체가 통일교, 여호와 증인, 안식교, 몰몬교, 구원파 등입니다 마는 지금 열거한 것은 좀 더 노골적인 것이고 사실은 건전한 기독교 속에 이들보다 더 많은 이단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2. 발생 원인
발생 원인은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실은 종말의 현상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벧전 5:8) 현상 중의 하나가 이단의 발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출현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달되는 곳에 반드시 나타난다고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귀들의 활동을 허용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참된 신자가 더욱 더 단단해 지라고 하신 조치입니다. 항상 하나님 입장에서 세상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3. 판별
판별할 때 주의해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노골적이고 드러나는 이단 조직의 신학과 사상을 파악해서 이단을 이기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올바른 대처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물리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이단 조직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이 된다든지 혹은 나는 건전한 교단과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을 공격한다고 정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끼리도 서로 싸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방 나라끼리 서로 싸우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단 판별을 완벽하게 해 낸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남을 공격하는 즐거움 중에 하나 일수가 있습니다.
물론 전에 열거한 노골적인 이단 같은 것이야 그 단체에서 벗어나면 되지만 소위 보수주의 교단 내에 잠입해 있는 엄청난 덩어리의 광명한 천사(마귀)는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이단 문제 해결의 직효탄은 이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바로 사는 것인가 하는 자기 문제로 되돌아오는데 있습니다.
4. 판별을 바로 하기 위한 바른 신학의 정립에 대해서
1) 오직 계시는 성경뿐입니다.
여기에 반대하는 자들은 순복음교파와 김기동교회(성락교회)와 할렐루야 기도원 등 여러 기도원과 자유주의자들 입니다. 순복음주의자들은 성경보다 방언과 병 고침과 가난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실질적인 증거와 계시로 봅니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말하기를 궁극적인 진리는 모른다고 하면서 성경은 다만 여러 참고서 중에 하나로 봅니다. 그들은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한 자들도 성경의 계시 말고 또 다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만이 특별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갈 1:8)
2)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광명한 천사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오직 예수만 전한 사람 가운데서도 어떤 교리나 신학을 전하면서 사실은 자기의 밥벌이를 위하고 돈을 축적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고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5-20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예수님께 와서 외쳐 되기를 "주여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실제로 이들이 이런 일을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열매를 보고 거짓인지 진짜인지 구분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열매란 산상보훈 전체를 뜻합니다. 즉 자기 자신과 교인들로 하여금 좁은 길로 유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희생의 본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내에서 이런 목회자들이 보이거든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ㄱ. 부흥회 하면서 목사 섬겨야 복을 받고 목사 저주하면 저주받는다고 주장하는 자(성경에서 저주는 바르게 사는 사람을 해칠 때 온다. 따라서 잘못되게 가르치는 목사를 그냥 두는 것은 오히려 교인들이 저주받는다.)
ㄴ.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
예수 잘 믿으면 그만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딤후 3:12/마 5:11)
ㄷ. 바른 인간이 되기를 가르치기보다는 교회 부흥이나 성장을 우선하는 목사
성경에서의 성전은 인간 그 자체를 말합니다. 성도의 모임이 바로 교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 다. 예배당을 거룩한 성전이라든지 교회라고 한적이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자 체가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고전 3:16)
ㄹ.헌금을 강요하는 목사
헌금이란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주님을 사랑하는 폭 만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에게 자유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강요에 의해서 헌금하면 헌금을 통해 더욱 더 타인의 눈과 목회자의 저주의 노예나 축복의 종이 될 공산이 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보다 사랑과 헌신을 원합니다.
ㅁ. 섬김의 정신이 결여된 목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성도를 섬기려 왔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신 상태나 마음가짐이 없는 목사는 거짓 선지자이며 광명한 천사(마귀)입니 다. 예를 들면 부르조아적 생활을 한다든지 당회장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교인들을 지배 한다든지 명령조로 지시 조로 다루는 목회 형식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 자기네들이 교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아비처럼 지도자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땅에 잇는 자를 아비나 지도자라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지도자는 예수님뿐입니다.(마 23:8-12)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통적으로 교리 적으로 안 맞는다고 해서 이단으로 규정함으로 쉽게 이단과 구분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지금 마귀는 그런 작전도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용납 안 되는 것도 이단입니다 마는 그것은 보다 노골적인 이단이기에 구분이 쉽습니다. 허나 소위 보수를 표방하고 정통 교리를 고수한다는 인물 가운데서 교인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고 교인들 덕택에 여유 있고 어른 행세하는 실질적인 이단들을 우리는 단호히 찾아 그 정체를 들추어내야 합니다. 선교를 빙자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와 개척교회하면서 큰 교회 되려고 갖은 수단과 요령과 회유와 부흥 집회를 통해 종교적인 힘을 빌려 자기의 세속적 소원을 이루어 보려는 더러운 심성과 짝이 되어 추잡한 형태로도 부흥되었다고 떠벌리는 간악한 마귀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호텔과 고급 식당에서 조찬 기도회 하면서 빛과 소금이라고 사기 치는 고급 종교 사기꾼들도 우리는 마귀로 간주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광명한 천사, 거짓 선지자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방치하시는 이유는 오늘날 교인들 중에서 누가 진정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면서 좁은 길로 나서는 참된 믿는 자인가 골라내기 위한 고급 작전인 것입니다.이점을 잊지 마세요.
[ 이단이 전하는 가짜 복음 ]
1.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안 버린다.
이단 복음 :
인간은 나약하니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인내하시면서 봐주시고 용서하신다. 따라서 성의껏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내칠 리가 없다. 따라서 그냥 편한 대로 하나님 믿으라. 하나님은 성의를 생각해서 그렇게 나무라지 않는 분이다.
반박:
하나님은 예수님과 적당선에서 타협하신 것이 아니다. 자기 아들이라도 조금의 죄가 있는 이상 저주해 버리셨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갈 3:13)
2. 인간에서 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의도 가끔 나온다.
이단 복음:
인간은 연약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속에 착한 일을 하게 하셔서 인간으로부터 착한 일도 나온다. 따라서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다고는 말 못한다. 안 믿는 자들도 사랑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돌볼 줄 안다. 불신자도 자기 자식에 대한 정성을 보면 신자보다 나은 인정과 사랑을 베푼다.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반박: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봐라. 그 앞에서 무슨 자기 의를 자랑 할 수 있을까? 죽은 자 중에 죽은 자가 된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로운 것을 들이미는가? 마지막 심판 때, 자기 행위를 늘어놓는 자는 영원한 유황불 못에 들어간다.(계 20:13-14) 구원받은 자는 자기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서 들어간다.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나오는 행위가 전부가 비로소 알게 된 자신의 죄 때문에 터져 나오는 회개의 행위뿐이다. 이 회개를 통해서 인간은 죄인이요 예수님만이 공로만이 돋보인다. 그러니 이래나 저래나 인간은 자기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
3. 완전한 교회는 없으니 문제가 있더라도 눈감아주자
이단 복음: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약간들의 문제가 있더라도 모두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라고 인정해주자.
반박:
지금 교회 걱정할 때가 아니다. 교회가 당신의 구원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문제는 본인 문제다. 본인이 천국에 못가면 그동안 교회 걱정한 것, 소용없다. 교회 들락거리고 교회 충성했다고 천국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교회 가졌다고 천국행 아니다. 왜 천국만이 완전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피 위에만 세워지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두둔하고 한국교회 옹호하면 교회 사람이지 천국 사람이 아니다. 천국 사람은 반드시 천국을 두둔하고 옹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만 시선이 꽂혀있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불완전한 자신에 대해 불완전한 자기변명으로 평생을 보낸다. “제발 날 좀 이해해줘요!”하는 식이다. 심판주께서 친히 나서서 지옥 갈 자라는데 일반인들이 나서서 어떻게 편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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