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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영화 " 부산행" 영화평 글쓴이 -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6. 8. 17.


영화 [부산행]  영화평     글쓴이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줄거리)


방역이 실시되는 어느 한적한 톨게이트.


근처 화학회사에서 기이한 바이러스가 누출된 것이다. 방역을 당하고 소형 트럭을 몰고 가던 돼지 축산업자는 길을 가다가 방심해서 고라니를 치고 그냥 가는데 얼마 후 피 흘리고 길바닥에 쓰려져 있던 고라니가 멀쩡하게 다시 일어나는데 눈동자가 허옇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는 주인공(공유)은 서울에서 증권회사 펀드매니저로 일한다. 반면에 아내는 부산에 내려가 별거중이다. 하루는 함께 살고 있는 어린 딸이 엄마 보고 싶다고 혼자 부산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어쩔 수 없이 주인공도 딸과 함께 부산에 데려다주기 위해 서울역에서 KTX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은 서울과 전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부산행 KTX에 합류하게 된다.


주인공과 더불어 탐승객 중에서 몇 몇 가정이 영화 내내 함께 한다. 힘깨나 쓰게 생긴 사나이는 만삭의 몸으로 힘들어 하는 그의 아내와 부산으로 여행하고, 중년의 삼천리 고속버스 회사 전무도 끝까지 줄거리와 함께 하면서 못된 짓는 다 보여준다. 고등학교 야구부와 응원하기 위해 동승한 여고생도 하나 있다. 그리고 노숙자도 기차표 없이 좀비가 무서워 무작정 올라탔고, 또한 같이 늙어가면서 자식 위해 헌신하는 할머니 자매도 KTX의 난리와 함께 한다.


KTX가 무사히 서울역을 출발하여 위험권 밖으로 탈출했다고 여기지만 그 열차 안에 이미 감염된 좀비가 있어 여성 승무원을 물어뜯는다.


물린 여승무원은 근처 다른 승객을 물고, 그렇게 해서 물린 자는 눈은 하얗게 변하고, 온 몸의 핏줄이 오색찬란한 색깔로 소름처럼 돋아 오른다. 그리고 보이는 대로 근처 있는 인간을 공격한다. 물린 자는 좀비로 곧장 변하고, 그 좀비는 또 다른 정상인을 물로…. 그렇게 해서 열차 안에 좀비의 양을 갈수록 증가하고 객차도 접수해 나간다. 수세에 몰린 열차 안에서 아직 오염되지 않는 자들은 앞쪽으로, 앞쪽으로 밀린다. 다행히도 좀비는 객실 문을 열 줄을 모른다.


주인공과 다른 승객들은, 대전에 가면 군인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서 좀비들이 없는 곳에서 안전하게 격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하차해서 대전역 광장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방비하던 모든 군인들마저 좀비가 되어 인간의 피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사적으로 헐떡거리며 달려드는 좀비 떼들, 주인공과 주요 등장인물들은 겨우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주인공의 사랑하는 딸과 만삭의 여인은 네 칸이나 떨어져 있는 객실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 중간 지대에는 피에 굶주린 좀비들이 우굴 거린다. 딸을 구하고 또 만삭된 아내를 구하고, 여자 친구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과 힘 꽤나 쓰는 준- 주인공(마동석)과 야구부 한 학생은 의기투합한다.

 

맨 팔뚝에는 테이프를 감아 좀비로부터 물러서 바이러스 걸리지 않도록 조치하고서는 객실 하나씩 돌파해 나간다. 치고, 때리고, 밀어내고, 하지만 본능으로 덤벼드는 좀비와 싸우기에 힘에 부친다. 그런데 터널에 들어서자 좀비들이 이상한 현상을 보인다. 어두워서 활동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용해서 주인공과 함께 나선 자들은 좀비들을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무사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합류한다.


이제 다시 감염되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는 앞쪽으로 곳으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터널을 지나가는 시간 동안 물건 놓는 선반 위에서 기어가면서 우연곡절 끝 무사히 좀비의 시각에 눈에 띄지 않도록 하지만 터널이 끝나고 환해진 시점에서 노숙자가 선반 위에서 내려오다가 그만 빈 캔을 밟아서 다시 좀비의 표적으로서 일행이 다 같이 쫓기게 된다.


무사히 합류를 하게 되지만 그 와중에서 힘깨나 쓴 사나이는 주인공(공유)을 살리고 자신을 장렬하게 좀비에게 물리면서 시간을 벌어준 비극이 일어난다. 자기 만삭의 아내를 주인공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합류하고 난 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의 안정한 객실이 있던 자들이, 좀비와 힘들게 싸우고 귀환한 주인공 일행이 감염 된 것처럼 여겨서 이구동성으로 반대해서 같은 객실을 사용 못하게 하고 더 앞 칸으로 쫓아내어 자기네들과 분리시킨다. 인간들이 좀비보다 더 악한 면을 드러낸다. 특히 삼천리 고속버스 회사 전무라는 작자가 극렬하게 충동질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언니 할머니가 이미 좀비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안 동생 할머니가 언니와 함께 있겠다고 객실 문을 여는 바람에 주인공 일행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좀비에 잡아먹혀 같이 떼좀비가 된다.


드디어 열차는 동대구역까지 온다. 부산가는 철로가 동대구역에서 다른 열차가 불이 나고 충돌되어 막혀버렸다. 열차 기관사는 동대구역 정비실에 들어가서 화물기관차를 몰고 나온다. 좀비의 공격을 물려 같이 좀비가 된 줄 알았던 못돼먹은 버스회사 전무는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비겁하게 남자승무원을 좀비의 먹잇감을 제공하도록 밀치고서는 그 틈을 타 본인만이 살겠다고 움직이는 화물기관차를 쫓아가고 그 와중에도 야구부 응원부 소녀와 학생을 밀치고 좀비에게 먹히게 한다. 버스회사 전무가 악한 줄도 모르고 기관차에 올라타도록 돕다가 기관사마저 좀비에 물려 좀비가 된다.


이제 남은 자는 공유와 딸과 만삭의 주부와 못된 전무뿐이다. 하지만 전무는 이미 좀비에 감염된 채 화물기관차를 홀로 접수하고 있었다. 딸을 살리기 일념으로 주인공은 못된 전무하고 싸워서 그 인간을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뜨렸지만 본인이 그만 손등에 물려서 딸을 기관사에 남겨둔 채 장렬하게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제 살아남은 자는 만삭의 주부와 주인공의 어린 딸 뿐이다. 달리던 기관차를 인도한 철길은 어느 터널 입구에서 막힌다. 파수하던 군인들이 오염으로 사살된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방어책을 지나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데 맞은편 안전 지역을 사수하던 군인들은 두 사람의 오염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막 사살하려고 하는 순간, 터널 속에서 주인공 딸이 부른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하와이 민요 ‘알로하 오에 Aloha Oa’라는 노래다.

가사는 이러하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여 떠나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다시 만날때까지

라라라라--- 라라라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여 떠나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다시 만날때까지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다시 만날때까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장렬하게 좀비와 싸워서 감염되어서 자결한 아버지가 보고 싶어 부르는 딸의 애절한 노래다. 이 소리를 듣고서 파수하던 군인들이 외친다. “생존자가 돌아온다”


(평)

오직 돈으로 돈만을 계산하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은 자기 업무성과를 위해 늘 바쁘게 살아가면서 가정의 고귀함과 자식에 대한 진심어린 부성(父性)을 상실했다. 그러나 혼란 중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는지를 안다. 일말의 낙원(하와이)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가정의 따스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영화에 실려 있다. 돈을 놓고 모두가 개미떼들처럼 설쳐대지만 가정의 소중함을 아는 자라면 희망하는 낙원은 그 가정에서부터 새롭게 꽃필 수 있다는 희망을 감독은 제시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모든 인간 내부의 서로를 물어뜯는 악마적 본성으로 무장한 채 이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겉으로는 멀쩡하기에 정상인 행세하면서 살아가는 그 인간들 관계가 좀비 세계보다 더 잔혹하고 흉물스럽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주의 밖에 모르고 그 속에서 찌들대로 찌들인 인간 사회는 실은 괴물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감독의 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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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인 평)


좀비란 ‘살아있는 죽음체’이다. 즉 죽음이 ‘살아 있는 형체’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 만으로 온전히 해명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의미를 더 확장하면 이러하다.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는 영원히 저주의 삶으로 떠돌아다닐 뿐이라는 사실이다.


죽기를 무서워하지만 정작 좀비에게 물렸다고 해서 죽는 이는 없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죽음이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본질을 계속 뿜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서 괴물로 달라져 있는 뿐이다. 이렇게 되면 그 전에 가졌던 모든 정겨운 인간관계는 탈색이 되고 박탈된다.


성경은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거룩을 마주한 자는 죽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개입은 본격적인 죽음의 실현이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9민 16:30)


인간의 오랜 지혜와 전통과 문화와 관습과 법률과 종교 관행과 화목한 가족관계도 거룩 앞에서 모두 오염일 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좀비요 괴물이요 정신병자들이었다.


유일한 아담, 유일한 인간은 진정 아들로 인정받으신 예수님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 어디에도 ‘낙원의 부산’은 없다. 따라서 ‘부산행’도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진 ‘생명 행(行)’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지시로 함축할 수 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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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움켜주려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어 있는’ 정신병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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