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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희 신앙컬럼

모세를 모세되게 한 여인에 대한 기사 반론.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6. 9. 29.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여인' 기사에 대한 반론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여인'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과연 바로의 딸이 모세를 모세 되게 만들었을까?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모성애가 많고 호기심이 많고 불쌍히 여기는 본능이 있어서

 모세를 모세 되게 만들었다고 정현숙 기자는 이야기한다. 과연 모세를 보자마자 사랑의

마음이 싹터서 그를 아들로 삼은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기는 일생을 궁 안에 갇혀 살던 공주에게 아주 재미나고 흥미거리인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공주의 신분으로 자기 자식도 직접 키우기가 힘든데 남의 자식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러므로 자식 키우는 일은 유모에게 맡기고 공주는 아기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놀아 준 것이다.

자신의 취미생활이나 행복감을 누리기 위해 모세를 키운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

모세를 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모세가 자기 나라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을 알았다면 모성애고 연민이고를 떠나서

당장에 죽여버렸을 것이다.

 

공주는 모세를 키우면서 자기 행복을 만끽한 것이며, 또한 다 키워놓고도

 자신을 위해 효도를 할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 정성과

사랑을 무시한 채 적이 되어 돌아서 버린다. 공주는 '역시 남의 자식 키워놓아 봤자 헛수고구나.

이스라엘 사람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내 자식만을 사랑하는 모성애, 여성의 자상한 면, 호기심, 이런 것들이 과연 의가 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서는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인간의 본성마저 죄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모성애를 넘어서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나의 자식을 사랑할 뿐이지 남의 자식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의 고아 수출국이 된 것이다

 

. 결론은 바로의 공주는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단의 짓을 하였을 뿐이다.

그런 잘못된 인간의 행태를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모세를 통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였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삼손을 삼손답게 만든 데릴라,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만든 가룟 유다와 마찬가지로 악한 인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깨닫도록 만드시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성화된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한 귀하고 선한 행동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이런 그릇된 성경 해석이 도출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세가 모세 되게 한 여인
아기에 대한 믿음의 약속을 지켜준 그녀, 바로왕의 딸

출애굽기 2장 5~10절     

애굽왕 바로의 딸, 그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린

 대단한 공주마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그녀가 오늘 강가로  목욕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녀 곁에는 수많은 시녀들이 공주마마를 호위하며, 목욕 중인 공주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때 공주가  갑자기 시녀들을 부른다. “물가 갈대 사이에 상자가 있다. 어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여성 특유의 호기심이 일기 시작한 공주는 갑자기 그 갈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해 견디지 못한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수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출 2:5)

그런데 시녀들이 상자를 열자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주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그 아기의 울음소리가 너무도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출 2:6)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 안의 어린애기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느낀 부분을 영어성경(niv)은

이렇게 표현했다. “She felt sorry for him….”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버려진 아기를 보고 전혀 그녀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하고

안타깝고 불쌍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 마음은 어쩌면 하나님이 여성들에게 준

 모성애적인 마음이 아닐까? 지금 바로의 딸 공주는 물에 버려진 그 아기의 가엾은

 모습을 보고 여성의 본능적인 어머니의 마음, 어떻게든 돌보고 싶은

 생각이 밀려왔다.

 

물론 공주 또한 이 아기는 왕인 자기 아버지가 죽이라고 한 그 히브리 민족의 아이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의 이 아기에 대해 불쌍한 여기는 마음이 워낙 컸기에

우선 이 아기부터 살리고 보자는 생각이 두려움을 순식간에 물리치게 만들었다.

이에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 아기에게 빨리 젖을 먹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그때 마침 이 버려진 아기의

누이가 멀리서 어떻게 되는지 서성이는 거리다가 공주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히브리 여인이 유모를 불러다가 아기를 젖 먹이게 하자”고 말한다. 이 얼마나 공주에게

기쁜 소식인가?

 

‘배가 고파 울고 있는 이 아기에게 젖을 줄 사람이 있다면.’

 

공주마마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 소녀의 말을 듣고 기뻐 이렇게 말한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출 2:9)

아니, 버려진 아기. 그것도 아버지, 바로 왕이 원수로 여기는 히브리 아이인데, 거기에

그 젖을 먹이는 어미에게는 돈까지 주겠다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 옆에 있던 시녀들은 많이 놀라고 당황하며 만류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공주마마 바로 왕이 이 사실을 아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몇 차례 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의 딸, 그녀는 평소 어떤 성품을 지닌 공주였을까? 왜 그녀는 하필

 그 시점에 하수가에 목욕하러 나왔을까? 그리고 갈대 사이에 떠내려 오는

그 상자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으며 우는 아기를 본 순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을까?

 

모든 상황을 만드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이 바로의 딸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기에 그저 짐작하고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바로의 딸 그녀의 위치, 그녀의 마음을 통해 모세를 살리기 위한 역사하심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히브리 민족의 원수인 바로왕, 그 왕의 딸도 이렇게

 그녀의 호기심과 모성애 등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는 놀라운 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갈대상자 안의 아기를 보고 느꼈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 후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출 2:10)

 

그녀는 결코 하수가에서 주운 그 아기를 잊지 않았다. 그 아기가 젖을 떼고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그녀는 어쩌면 그 아이를 이제 나에게 데려오라고 명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는 선뜻

그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았다.

 

바로의 딸 그녀는 비록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강에서 건져 올린 그때부터 그 아기를 내 자식처럼 여겼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들 삼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성경에는 바로의 딸이 그 아이를 아들로 삼기까지 아버지인 바로왕과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또는 궁궐에서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등등은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기에

 그저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의 딸, 그녀는 이 갈대상자 안의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고

그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어주었다.

 

이는 그녀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의미였다.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모세라고 이름지어준 여인. 그녀는 모든 애굽 사람 앞에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을 입증하듯 그 이름을 당당하게 ‘모세’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공주의 신분으로 자기 아들삼아 모세가 당당하게 왕실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돌봐준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옆에 있었기에 모세는 장성한 뒤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이 공주에게 여성으로서 감탄사와 함께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녀의 여성스런 호기심,

 모성애적인 마음, 끝까지 그 아기에 대한 믿음의 약속을 지켜, 아들삼아 모세가

 모세 되게 해준 여인이기에 말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호기심이 많고 불쌍히 여기는 그 모성애적인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그런 것들을 선한 것에 잘 이용한다면 우리 또한 바로의 딸처럼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지 않을까?

정현숙 /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