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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두 사람의 은자(隱者)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5. 1. 10.

두 사람의 은자(隱者) "

어느 외 딴 산 속에 은자 두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에겐 질그릇 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그들 가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나이든 은자의 마음속으로 악령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젊은 은자에게로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산 지도 참 오래 되었군.
이젠 헤어질 때가 되었네.
그러니 우리의 재산을 나누도록 하세."

그 말을 들은 젊은 은자는 슬퍼하면서 대답 했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떠나시겠다니 정말 슬픕니다.
하지만 꼭 가셔야겠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그는 그 질그릇을 가져와 그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걸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냥 형님이 가지세요."
그러자 그 늙은 은자가 말했습니다.
"선심은 사양하겠네.
내 몫이 아닌 것은 받지 않을 거야.
그건 둘로 나누어야만 하네."
그러자 젊은 은자가 말했습니다.

그릇을 깨면 형님에게나 저에게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차라리 제비를 뽑아 정하시지요."
하지만 늙은 은자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나는 정의와 내 몫 이외에는 받지 않겠네.
그리고 난 정의와 내 몫을 헛 된 제비뽑기에 걸고 싶지 않아.
그러니 그 그릇을 둘로 쪼개야겠네."
젊은 은자는 더 이상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꼭 그렇게 해서라도 그걸 가지시겠다면, 그릇을 쪼갭시다."
그러자 늙은 은자는 얼굴 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겁쟁이!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 칼릴 지브란 -


토마스 흡스(Thomas Hobbes, 1588 ~ 1679)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 투쟁하는 것으로 정확히 본것 같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국회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름대로 옳은 것이라는 기준을 정해놓고
만인을 대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 정의와 공평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정의니, 공평이니 하는 것은 싸우기 위한 구실에 불과합니다.
살고자 하다보니 싸워야하고, 싸울 명분을 찾다보니 정의니 공평이니
하는 구실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세상에는 정의나 공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정의와 공평이라는 명분만 싸움에 필요한 구실로 있을 뿐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구실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심지어 금식과 기도 하는 것까지
싸우기 위한 구실로 이용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현장을 보시고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는 골방에서 하고,
구제는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할 때는 얼굴에 기름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는 십자가의 진리 앞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싸움의 구실로 이용 되기에 예수께서는 기도나 금식이나 선행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현장에서 종교인은 종교 현장에서
신앙생활 하는이는 신앙의 현장에서 싸울 구실을 찾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전히 우리는 혈과 육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혈과 육이 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도구로 구실로 삼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서로 싸우기 위하여 금식하고,
주먹으로 치기 위하여 기도한다." 고 했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두 사람의 은자" 이야기는 살기 위해 싸울 구실을
찾는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은자의 삶은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받은 본래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무소유로 사랑하며, 함께 살 수 밖에 없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싸울 필요도 없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늙은 은자에게 악령이 들어 왔듯이
에덴동산에는 뱀의 유혹이 왔으며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내 것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떠나야 하기에 나누어야 하고 나누어야 하기에 공평해야 한다는
정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나눌 수 없고 나누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늙은 은자도
젊은 은자도 알고 있습니다.
젊은 은자는 분명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늙은 은자에게 질그릇을 양보합니다.

그러나 늙은 은자는 질그릇의 성질을 더 잘 알면서도 공평하게
정의롭게 나누어야 한다고만 억지를 부립니다.
늙은 은자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구실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투쟁을 삶의 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은자는 늙은 은자의 허구를 정확히 알고 대처합니다.
정 그렇다면 그 정의대로 나누자고 하니까
늙은 은자의 속셈이 투쟁에 있음이 드러나고 맙니다.
여러분은 혹시 늙은 은자처럼 질그릇을 똑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정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상당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교회 이름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양 오해하는 이도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싸움의 구실로서나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정의나 공평이라는
싸우기 위한 구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사랑으로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먹고 산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내 노력의 댓가인 정당한 몫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 아래서 주어진 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챤입니다.

내 것 혹은 내 몫을 따지다 보면 필연적으로 정의와 공평을 찾게 되고,
정의와 공평이라는 명분으로 싸우게 됩니다.
악마의 사주를 받는 늙은 은자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게 되면 투쟁의 장에 뛰어 들게 되며
악한 자는 공평과 정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싸움거리를 만들어 싸움을 유도하는 악한 자와의 싸움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이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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