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을 이루겠다는 것은 범죄다.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내 뜻을 이루겠다는 것은 범죄다
인간은 ‘나답다’는 것을 확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속임수를 써본다. 나 아닌 나를 계속 추구해나간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기만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정말 나다운 모델도 모르는 가운데 끊임없이 새 모델을 구하여 바꿔치기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매일 같이 ‘나는 이대로의 나를 진정 인정 못 하겠다’는 속임수 같은 것이다. 이 속임수가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도록 부추기고 그래놓고는 그 오류의 탓을 자기를 향한 그들의 속임수에 있다고 핑계될 참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를 둘러싼 사회 속에서 그 사회를 수시로 악용한다. 하지만 사회도 만만치 않다. 자기 밖에 모르는 그에게 앙갚음 해준다. 한 주체자의 건방짐과 무례함을 두고 보지 아니한다. 개인을 전적으로 후원하는 사회나 우주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대란 오로지 우주 그 자체에만 둘 뿐이다. 따라서 그 속에서 ‘절대적 주체의식’을 갖고 자신을 뜻을 이루어내겠다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를 따로 창조하겠다는 작업이기에 이것은 자신과 남을 속이는 범죄가 된다.
“여기 절대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봐 달라”는 외침인 것이다. 즉 자신이 자신을 향하여 벌리는 속임수에 타인들을 끌어당겨놓고서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면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만들었으니 당신네들이 나쁘다”고 항의할 참이다.
소위 신앙인이라고 우기는 세계, 그곳도 지옥이다. 아무리 자신을 속여도 원하는 만큼의 신앙이 채워지지 않으니 자기보다 악한 자들을 자꾸만 수집해서 자신들의 곁에 두고 씹어 댈 판이다. 이 속임수에 주변인들은 눈치 채고 비난하고 질타한다.
실은 그 보복과 비난을 은근히 고대했다. 악인이 더욱 악인으로 드러날 경우에만 자신은 상대적으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없으면 자신의 악함을 가릴 길이 없는 법이다. 이처럼 성사될 수 없는 ‘절대적 주체상’을 기어이 성사해보겠노라고 시도하게 만든 것이 바로 악마가 노린 덫이었다.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즉 말씀을 매개로 하여 내게로(예수님에게로) 건너올 수 있다 면 건너와 보라는 말씀이다. 제자리에서 평생 자신을 위장하는 것으로 세월 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던져주신 말씀을 건너서 예수님의 나라 이쪽으로 합류될 수 있거든 해보라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자기 쪽에서 자비를 베풀어 ‘원수’를 아예 안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예 원수가 없다고 여겨서 말씀 자체를 무효화 시켜서 해결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이렇다. ‘성도=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롬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 원수 된 자 앞에서 십자가 피를 뒤집어쓰시고 나타나신다. “네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노라!” (행 9:5 “나는 네가 핍박하던 예수니라”)
악마가 보고 싶다면 자기 모습을 보면 되고, 지옥이 보고 싶다면 이 세상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한복판에서 피투성이채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셨다.
뽕나무버섯부치-식용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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