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괴물이다-슬라보예지젝/존 밀뱅크 저마티-이근호목사 서평[대구우리교회목사]-
[ 예수는 괴물이다 ] 슬라보예 지젝/ 존 밀뱅크 저 마티(서울: 2013)
Ⅰ 서론
기독교에 대해서 슬라보예 지젝과 존 밀뱅크의 논쟁을 실어놓은 책이다. 둘 다 ‘신은 숨어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공통점이지만 존 밀뱅크는 “숨어있는 저편 어디에 신이 여전히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슬라보예 지젝은 “‘숨어있는 신’ 개념 자체가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신이기에 그것 외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무신론적 기독교인 반면에 밀뱅크는 기독교의 무신론적면을 주장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을 나란히 대비하므로 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이 살아가는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믿고 의지할 만한 큰 자(者)’를 소개할 목적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두 사람 주장의 공통점은, 기독교란, 성경 구절에서 따온 교리들에 맞추어 반복하는 것에 신이 자동적으로 출몰하고 거기에 맞추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해서 영글어낸 삶의 상황에 맞추어 ‘믿고 기대고 의지할 만한 큰 타자(他者), 곧 신(神)’을 기독교에서 생산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밀뱅크는, 그것마저 보이지 않는 신이 배후에서 사역해 오신 전략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비록 현대 사상은 모든 진리를 언어 배열 자체에서 나온 효과적 의미에 간주하지만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귀환의 노정이다 고 본다.
하지만 지젝은, 그러한 밀뱅크의 인식은 제대로 기독교의 밑바닥을 살펴보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철저한 자기 부정의 자세로 자신이 인정하는 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기에 여전히 ‘믿고 의지하고 기댈 타자=신’을 선정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은 어떤 식으로 신의 본질 바닥을 훑어보는가?
Ⅱ 본론
1. 지젝이 말하는 기독교의 신(神)과 주체
현실은 그것을 드러내는 모습과 서로 분열되어 있다. 즉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실제 현실이 활동하고 작용하는 것은 일치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괴리는 늘 재생산되고 곳곳에 확대된다. ‘인간이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문장의 분석을 차분히 조사할 수가 있다. 확인과정을 거쳐 믿든지 아니면 알든지 한다. 하지만 ‘신이 존재 한다’는 문장이나 선언이나 고백은 그것을 돌출한 우회로를 찾기가 수월치 않다. 왜냐하면 이런 고백한 사람이 서둘러 그 과정을 감추기 때문이다.
생각해내는 과정 자체가 은폐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버는 과정에서,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돈 벌기에 미쳐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대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지 어려운 이웃에 대한 구제라든지 사회봉사라든지 건전한 공동체 건설에 대한 책임감 같은 사명감 같은 형식으로 왜곡되어서 나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빚어낸 ‘이데올로기(일반적 통념)’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한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기독교다. 즉 ‘이데올로기’는 항시 ‘기만’하는 속성으로 작용한다.
바로 이 기만을 부수기 위해 냉철하고 냉혹한 이성(理性)이 동원되지만 이 이성마저 자신을 대항해서 사용되지는 못한다. 이 점을 알게 되는 자아는 차라리 이성으로 인해 자신이 상실되는 대가를 따로 외부에서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래서 ‘신은 만들어진 인간’이다.
지젝이 말하는 신의 무한성이란 세상에 남겨진 창조물의 유한성에 담겨 있는 증거나 그 증거의 총집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으로서 찾아질 수 없는 무엇(X)이다. 신은 없다. 다만 토대 없는 사랑의 집단이 곧 성령이 일하신다는 증거다. 신이 직접적으로 신으로 죽는다면 그는 기존의 기독교 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전히 잠재화된 큰 타자로서 행세할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 죽을 때, 예수 본인마저 신이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왜 자꾸 기독교세력은 신을 인정하라고 하는가?
신은 신으로 행세하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죽었기에 ‘큰 타자’로서의 역할도 해체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 땅이 흔들리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는 곧 천국 질서가 교란되었다는 징후다. 지상의 모든 좌표들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현실이라고 여긴 모든 것이 흔들린 것이다. 이 흔들림에서 예수는 곧 ‘기괴한 그리스도’가 된다. 그래서 예수는 괴물이다.
2. 밀뱅크가 말하는 기독교 신(神)과 주체
밀뱅크는 창조물의 유한성과 유연성 충실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영원이 이 역사와 만날 때 필히 모순이 발생되는 것은 기성사실이지만 그래서 이 유한성의 고유 가치는 보호되어 된다고 말한다.
분명 현실 사회의 인간은 세속 속에 갇혀 있는 게 맞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모순과 투쟁은 근원적인 평화와 화해를 위한 고난이요 고생이다. 따라서 유한한 개개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참여되므로 서 비로소 넘치는 선물의 혜택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들이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규정지은 바로 그 신 외부에 존재한다. 이러한 과잉 속에서 무한자가 탄생하며 이 속에서 참된 자아도 발생한다. 이 지상에서 성도의 자아란 결코 안정화되지 않고 무한한 신의 속성 속으로 진출하면서 전개된다. 따라서 세상의 질곡과 변화 속에서 인간은 그 유한성을 깊게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신의 무상의 선물인 신의 사랑의 구현해야 한다.
3. 결과에서 지젝과 밀뱅크의 공통점과 차이점
자본주의에 의해서 조성한 지옥 같은 세상에서 기독교나 교회가 보여줄 것은 오직 궁극적으로 ‘사랑’이다 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사랑으로 역사(役事)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갈 5:6)
이 사랑을 신의 존재에 근거한 안정된 주체성 위에서 줄 수 있다는 것이 밀뱅크의 주장인 반면에 지젝은 불안정한 주체를 안정되게 만들기 위해 자꾸만 신의 존재를 도입하는 바로 그 행위가 진정한 성령의 사랑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신도 믿고 사랑도 믿자’는 것이 밀뱅크이라면, ‘사랑만 믿지’라는 것이 지젝이다. 신도 사랑도 믿으면 진정한 성령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주체 정립을 위하여 동원되어야 될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는 거짓 사랑이라는 것이다.
Ⅲ 결론
1. 십자가 사건을 성육신 사건에 포함시킨 것이 문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를 위하여 성육신이 있는데 지젝과 밀뱅크 이점을 모르고 성육신 의미의 확장된 개념 안으로 십자가 사건을 포함시키면서 다루고 있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의미 있는 기독교일 경우에만 기독교답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기독교 역사가 줄곧 그리 왔으니까)
즉 인간을 보호하는 하나님이어야 인간들이 신을 다룰 대상이 된다고 여기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 는 그 성육신 사건에 주목한다. 기독교의 핵심이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 사건으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여긴다. 인간에게 결정적으로 찾아오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겠다는 신의 몸짓은 바로 이 성육신 사건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하나님만 보호하신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일의 핵심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일의 핵심이다. 그것은 인간마저 배제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외친 복음은 오직 십자가 중심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런 점에서 밀뱅크는 처음부터 복음에서 이탈된 인식을 보여준다. 그 대신 종교성의 완성으로서 기독교의 완전을 말하고 기독교의 완전을 신의 완전성에 근거를 두고 연결하고자 한다. 그는 기독교가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라는 특정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신이지 예수가 아니다. 예수는 단지 신의 임시적 대변인 정도 밖에 안 된다.
반면에 지젝은 십자가 사건을 주목하되 성육신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사건으로 취급했다. 그것이 헤겔이 바로 진리를 이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풀어내었기에 지젝은 그 학문적 권위에 기댄다.
2.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린 양의 피’를 요구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사건에 참여시키기 위함이다. 참여된 그들마저 심판받아 마땅함을 아울러 나타낸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하나님의 심판 사건에서 면제되어 딴 자리를 잡고 관람객으로 행세하지 못하는가? 자기 심판 속에서 그래야 악마가 보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인간들은 일상에서 악마 활동을 전제로 하고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인식과 사상과 의지와 감정과 지식이 악마로부터 지배당한 흔적이라는 것은 수긍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악마가 보이는 자리로 데려간다.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받는 그 경우를 성도도 평생 겪도록 하시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의 책망을 받으면서(요 16:8-10) 십자가의 피 복음을 주목하고 증언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 소망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들이 인간을 구원하고 새 삶을 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만을 최종 증언하기 위한 선물인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의 책망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책망은 바로 ‘인간 보호 위주’의 개념들이 모두 악마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것을 지적하기 위한 책망이다. 이것이 새 언약에 의해서 적용되는 원리다.
지젝은 새 언약을 모른다. (밀뱅크는 인간의 신성화에만 관심 있다) 지젝은 결국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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