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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우리 안에는 내가 없다. - 박윤진님의 글 - 대구우리교회-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4. 2. 13.

 

 

우리 안에는 내가 없다.     - 박윤진님의 글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 

 

위의 말씀은 어렵다. 창세라는 말은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이고, 그 이전이라면 하늘도 땅도 바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 전에 [우리]를 택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위 말씀이 난해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가정이 미리 깔려 있기 때문이다.

1.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무리를 의미하는 복수대명사는 [저들]이므로, 택하신[우리]에는 당연히 내가 포함되어 있다.

 

2. [우리]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3. 나는 누가 뭐래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받고 싶은 내가 지금 성경을 읽고 있다. 읽는다는 것은 문법에 따른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법은 한국어 문법을 의미한다. 한국어 문법에 우리라는 대명사는 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나는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점 찍어주신 존귀한 존재이다. 

 

이렇게 나의 구원을 달성할 셈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놓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위 말씀만 봐도 그렇다. 분명히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고 흔들림 없이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 편지를 에베소 교회에게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사도 바울에게 물어보자. “당신 머리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게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도 바울의 대답은 항상 같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그렇다면,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고의적으로 읽지 않은 이유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십자가 안에는 내가 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신세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사랑의 법은 생경하고, 한국어 문법은 생생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결심한다. 주님의 십자가 지심은 나의 구원을 위함이라고!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쾌척하셨노라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살과 피를 얼마든지 주문할 것이며, 그에 상당한 노동력과 자본을 투자할 용의가 있노라고! 

 바로 이 부분이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말한 [육체의 기회]의 전체 모양이다. 십자가로 내 구원 따내기야 말로, 현저한 육체의 일로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의 뒤범벅인 것이다. 내가 주인인 탓에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히브리서 10:29) 

 

 

 이제 다시 [우리]로 돌아가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라는 말은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모여든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든 무리이다. 성도요 교회이다. 그들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기로 작정된 죄인들이다. 원래 우리는 본질상 진로의 자녀일 뿐이다.(에베소서 2:3)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여보세요, 성경을 정확히 봐야지 대충 자기 해석에 맞출 목적으로 편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 본질상 진로의 자녀이[었]더니, 즉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현재]에 있어서는 성도의 본질이 의인이란 말이오.” 

 바로 이런 과거, 현재, 미래라는 죄인의 시간관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창세 전]이라는 말씀이다. 창세 전은 시간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간보다 강력하다. 그 사랑만 충만하게 남는 시공간, 그것이 바로 [창세 전]이다. 그 충만한 사랑을 받은 죄인으로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특권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이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분명해 졌다. 그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든든하게 우리를 용서하고 있음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랑은 본질상 진로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도, 우리가 고집하는 시간관도 훼손할 수 없다. 어떤 권력과 재산도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 안에는 내가 없다. 용서만 있다. 용서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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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댓글

 

 

14-01-31 06:2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고의적으로 읽지 않은 이유"라는 문구가 폐부를 찌릅니다. 사람은 자신이 평생토록 끌어오면서 형성한 자기만의 세계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부는 명절날 외부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분주한 판에 '그리스도 안'을 고의적으로 생각 못합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지금도 노심초사 그들의 행복을  빌기에 '그리스도 안'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업무량을 제각제각 처리해야 봉급날 통장에 생활비가 들어오는 직장들에게는 '창세 전의 그리스도 안'을 고의적으로 기피합니다.

 

결혼을 앞둔 아가씨들은 살 빼기 바쁘고 친구 만나 스트레스 풀기 바빠서 고의적으로 '그리스도 안'을 잊고자 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한결같이 '내 인생은 내 것이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주님)의 인생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