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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자살에 대하여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글-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14. 12. 29.

자살에 대하여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글-

 

 

자살에 대하여

 

 

 

 

누구나 사태를 이해하면서 모델을 도입하기 마련이다. 그 모델은 1차적으로 본인들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죽음이 자연스러운 죽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찾아드는 죽음)이라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죽음, 곧 자살에 대해서 비-자연스러움과 당혹감을 갖게 마련이다.

 

 

 

 

 

삶이란 나름대로의 질서 잡힌 사고 체계를 만들어 갖게 된다. 그 체계 안에는 타인에 대한 예의범절과 더불어 국가에 대해서, 가족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이 선(善)함과 악으로 분류되어 터 잡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통념상 자살이라는 것은 선함보다는 악함에 해당되는 행위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자살도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단순히 자살이라는 내용만 악의 항목에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윤리적 프레임(틀) 자체에 혼란과 혼선이 생겨버린다.

 

 

 

 

 

이렇게 되면 자기 정체성마저 흔들려 재조정해야 할 판이다. “자살이 악하지 않다니? 자살해도 나쁜 짓이 아니다니? 내 생각이 잘못되었나? 나의 세상관이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그동안 자아를 형성하면서 깔아놓은 세상관 자체에 내부적인 균열 조짐을 보이게 된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다시 수정해야 하기에 귀찮은 문제이기도 하다.

 

 

 

 

 

 

1차적 모델인 본인의 생각으로는, “자살도 악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윤리관이 감당이 되지를 않는다면 ‘자살도 악한 일이 아니요 죄짓는 일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제시하는 2차적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살의 의미가 밝혀진다. 왜냐하면 ‘자살이 죄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제시한 모델이 성경에서 제시하는가 아니면 성경이 아닌 특정 존경받는 인물을 모델로 삼느냐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수십 년 간 많은 이들에게 오직 복음만 간절히 전했던 그 훌륭하신 목사님께서 인생 마감을 자살을 끝냈다면, 그 목사님을 존경하는 쪽에서는 평소에 그 목사님의 삶의 모습과 연결시켜 볼 때에 자살마저 복음의 구체화를 보여주는 의심할 바 없는 훌륭한 모델이라고 주장되게 된다.

 

 

 

 

 

 

즉 복음을 아는 자가 생의 최후를 스스로 참혹하게 목숨을 끊는 자살로 마감해도 그 자살은 결코 복음과 무관한 게 아니고 복음의 끝자락에서 장렬하게 폭발해버린 거룩한 폭발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기에 죄가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분에게는 복음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그 복음의 위력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인과관계를 그려 볼 수 있기에 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 내용이 현실적으로 드러나 보이기를 원한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성경에 함유된 내용대로 반듯하게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을 ‘살아 있는 복음의 사람’으로 간주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곧 복음의 대표적 모델로 이 시대에 현시화로 목격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봐야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예 믿음의 대상 자체에서 누락이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느냐? 성경에서도 모델을 제시된다. 그 모델은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분들, 곧 선지자와 사도들이다. 뿐만 아니라 자살한 모델도 나온다. 가룟 유다다. 마태복음 27:3-5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스스로 뉘우쳐’라는 대목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는 대목을 상호 연결시켜 보자. 가룟 유다가 분명 스스로 뉘우쳤다. 그렇다면 왜 그는 다른 11제자의 그룹에 예전처럼 합류하지 못하는가? 다른 제자들에게 왜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한바 계시다. 마태복음 26:24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되어 있다.

 

 

 

 

 

즉 가룟 유다의 운명은 가롯 유다의 자기 결정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모든 인간과 인류는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류 되어 있다. 자살해서 죽든, 그냥 죽든 '주를 사랑하지 않는 관계‘ 그 자체가 저주이요 심판이요 영원한 죽음이다.(고전 16:22)

 

 

 

 

바로 이러한 복음적 내용이 구체화하는 방식까지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예시해 놓으셨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28-31)

 

 

 

 

 

즉 모든 인간과 인류는 결코 구원이나 영생을 탐을 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해야 만하기에 천국 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뉘우침’이다. 포도원의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자신들의 고유한 능력을 간직하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인간은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에 한정된 삶을 보장받는 처지이지 결코 하나님 나라까지 넘볼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히 하나님 나라에 넣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이 고유권한의 혜택을 입은 자들의 공통점으로 보여주는 태도는 ‘뉘우침’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도 분명 스스로 뉘우쳤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가룟 유다도 자살이라는 속전속결 방식을 통해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성공했는가? 뉘우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근거가 아니었던가?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난 뒤에 세상사는 것이 힘들면 그냥 자살이란 속성방식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적 모델이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난 뒤에 그 뉘우침의 연장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데 있다. 이 가룟 유다의 모델이 곧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모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 결국 화가 있다는 예언의 성취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람 같으면 가룟 유다가 순간적으로 극한 우울증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을 것이다. 곧 가룟 유다는 신심장애자로서 벌어진 현실을 자신이 감당할 길이 없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병약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방안으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변호해 줄 것이다.)

 

 

 

 

비슷한 예가 요한복음 8장에서도 나온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서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그 여인에게 돌을 칠 위인은 없었고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 둘씩 다 가버렸다. 진정 ‘양심의 가책’을 받아 들었다면 그것을 지적하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받아야 될 텐데 왜 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느냐 중요한 문제이다.

 

 

 

 

즉 자살한 사람이 진정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예수님 손에 맡겨야 옳은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이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뉘우치고 그 뉘우친 책임을 스스로가 짊어지겠다고 나서서 예수님 곁을 떠나버렸다. 그러니까 현재 벌어진 상황에서 본인이 그동안 본인만을 위한 현실관 속에 자신을 기어이 간직한 채 주님 곁을 떠난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다. 그는 영생을 탐해서 예수님께로 왔다가 결국에는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났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혜택을 입은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언급하니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다시 예수님과 함께 아니했다’(요 8:66)

 

 

 

 

왜 복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뉘우쳤다고 호언하면서 끝까지 자기 처벌을 감행하는가? 이 현상을 설명할 모델을 세상 속에서 찾으면 아니 된다.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살인자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자기 처벌을 가해서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 자살할 만큼 죄가 없었기 문인가?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6:29에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즉 사도 바울은 자신처럼 결박당한 것이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경우가 아니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비록 본인은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보편적 고난의 사례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사례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한 제대로 뉘우침은 자기 인생을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처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지시하기를 “오늘 저녁 너는 반드시 자살해!”라고 내리신 경우라면 그것은 성도 아닌 자가 성도로 위장하기 위해 이것마저 스스로 조작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향한 것은 지시가 아니라 예언이었다. “너는 사단이 이끄는 그 길로 가야만 해!”이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자살이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한 모델이다.

 

 

 

 

그렇다면 자살로 보이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지옥 간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치매 걸려 정신이 뒤죽박죽이 된 분이 강을 밭으로 오인해서 뛰어내리다가 죽었다고 해서 지옥 간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면서 지옥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지옥 간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여 헌금을 반만 내고 그 날로 두 부부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옥 간 부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는 고린도전서 5장에서 부친의 첩과 간통한 아들이 간통죄로 인하여 지옥 가느냐와 같은 맥락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이는 곧 구원받고 아니 받고의 기준은 그 사람의 행함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곱게 방긋이 웃으면서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셔도 지옥 간다는 확고한 원칙이 우선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런 명확한 말씀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아 다른 모델을 세상에서 찾고자 한다면 이는 곧 자기 자신만이 제 1차 모델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이는 자기 판단 이외에는 달리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바가 된다. 자신의 모델됨을 늘 파기하고 예수님만이 모델됨을 확인받는 식으로 성도는 늘 새 날을 대하게 된다. 남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확정된다.

 

 

 

 

 

따라서 참으로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 몽땅 맡겼다면 그 가운데서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따로 챙기지 않는 식으로 마음 정리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복음만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활용함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스스로 망했고 저주받았다고 자처해도 이 세상에서 죄도 없으시면서 예수님 보다 더 큰 저주받아 망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죄 지은 주제에 여전히 자기만의 가치를 따로 유지하려는 심보는 유일무이한 예수님 십자가 피 앞에서 용납되지 않는 처신임을 성도는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자라면 범사에 감사하자. “예수를 버리지 못하겠거든 네 눈앞에 있는 사약을 들이켜라!”는 권세자의 자결형식의 처형조치에도 성도는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혹은 스데반 집사님이 기도한 것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주께서 허락 없이는 참새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마 10:28-33)

 

 

 

 

우리는 누구의 자살 소식마저 감사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해야만 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예언에 의하면 곧 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살전 4:18) 세상 모든 일이 주님 보시기에 차질 없이 돌아감을 만끽하면서

 

 

 

 

 

잎새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