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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산나물을 뜯으러 다닙니다..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3. 4. 11.

요즘은 달래와 머위잎 그리고 원추리가 많이 나옵니다.몇년동안 봄이면 나물을 뜯으로 종종 다녔지만 한번도 야생 달래를 뜯어보지도 ,아예 구경조차 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많은 달래를 채취했습니다. 환경오염으로 나물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동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을 은폐시키고 자연의 색으로 변화 시키듯이 나물들도 생존을 위해 더 깊고 은밀한 곳에서 정착해서 살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특히나 달래를 보면서 그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제가 산과들을 수도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였지만 달래를 발견 못한 이유는 야생 달래를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것도 주 요인이였지만 그 달래라는 것이 너무도 여늬 풀과 흡사해 분간키 어려웠던 것입니다. 풀들이 많이 새순을 내미는 곳에 숨어 잇으니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농약이 많이 살포되는 일반 농토를 피해 휴경지쪽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달래가 다른 나물류 보다 더 희소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달래의 가치에 있습니다. 일반 나물들은 대부분 전초를 채취하지 않고 부분을 뜯어 갑니다.즉 뿌리는 남겨두고 몸뚱아리만 채취하는 것이죠... [물론 번식력이 대단한 냉이는 예외지만]...이같이 전초를 채취하지 않고 뿌리를 남겨두는 방식은 우리조상들의 오랜 삶의 깨달음에서 나온 지혜였습니다.순간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 말입니다. 그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 덕분에 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산야초의 효능을 만끽하고 산나물의 그 청아한 맛을 현재도 즐길 수가 잇는 것입니다. 허나 과연 내 후손들은 산나물이 무엇인지 달래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할 수있겠습니까?

나물을 뜯으러간 사람들이 달래를 보면 면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채 캐 갑니다. 희소하다는 것은 가치의 효용성을 극대화 시키고 그 때문에 자기 자랑의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서 최대한 많이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느껴지는 그 매운 맛 때문에 달래는 혹사당하고 잇는 것이요, 더이상 숨을 곳도 없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갑니다.그런데 말입니다. 한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그것은 제가 그동안 시골장터나, 관광지 근처에서 산 달래가 모두 야생이 아닌 재배달래였다는 것입니다.저는 할머니들의 말을 믿고 야생달래로 생각하고 사서 맛있게 먹었는데,제가 직접 따서 보니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야생 달래라고 하는 것과 진짜 야생달래 하고는 현격한 차이가 나더군요..할머니들이 가져온 달래는 온통 뒤죽박죽 뒤섞여 있으나 제가 야생달래를 채취해보니 그렇게 뒤죽박죽 섞일 필요가 없더라구요. 나물을 다듬고 손질하려면 가지런해 질수밖에 없으며 그 입의 모양새도 꼬부라져 앞뒤분간 없이 마구 뒤죽박죽 섞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똑바로 곧추 섭니다. 쪽파나 부추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남에게 당하기 마련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알지 못하면 꼭두각시처럼 거짓 진리에 빠져 진리라고 믿고 살지 않을까요? 참으로 신앙은 목사가 보여 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속에서만이 참진리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에베소서[4장11절참조]에 보면 목사의 할일에 대해 나옵니다.거기에는 분명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는 다른 것으로 나옵니다. 지체의 할일이 다르다는 것이지요...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각기 제자리에서 나름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목사만이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주적 은혜속에 나오는 복음을 목사라는 굴레에 가두어 버리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