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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반론}자살이 가슴아프긴 하지만....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6. 12. 2.
{반론}자살이 가슴아프긴 하지만....  기사 수정 기사 삭제

 

김형희 kkkk000000@naver.com [조회수 : 3]

이성권님의 글에 대한 반론을 하고자 합니다.먼저 기자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가슴아프기는 하지만, 동정을 펼치지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게 된다는 논리로 자살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자체를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이런 동정과 연민을 가지게 되면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자는 제가 전에 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옥간다고 하는 자들에게 라고 쓴 글을 염두에 두고 이같은 반론글을 올린 것 같습니다.과연 제가 자살을 옹호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일까요?내 글의 촛점은 자살을 비난하는 자들의 현재 모습을 되돌아 보라는 뜻에서 였습니다. 누가 과연 죄인인가 되돌아 보라는 글이 였다.

기자는 제목에서 밝혔듯이 자신은 자살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고백합니다. 과연 그고백이 진실일까요?. 과연 누가 자살하는 사람에게 연민과 동정을 해 줄 수 있을까요? 가슴아픔과 동정 연민이라는 것이 모두 가식과 위선 거짓이 아니던가요?.

그져 지나가는 말로 베푸는 접대인사가 아니던가요? 내가 하는 말을 좋게 꾸미기 위해 내뱉는 접대용 멘트 이상의 효과가 나타날까요?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하느님에게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모든 효도가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고르반을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던가요?

기자는 바로 이부분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말만 존재할 뿐 실천이 없는 껍데기만이 나오는 인간성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지 깨우치라고 이야기 하는데, 연민과 동정에 깊이 빠져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진심으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 할 수있는가요?. 내 부모와 처자식을 내버리는 혈육의 정을 끊어 버리고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해 보라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과연 나는 혈육의 정을 끊었을까요?. 정녕 혈육의 정을 주를 위해 꾾었는가요?. 그렇다면 이제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해 보아라 하고 주님은 명령하십니다.내 가족과의 혈육의 정도 정리하지 못한채 남과의 인간적 정에 [혈육의 정]에 빠질까 하여 염려하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기자는 그러면서도 자살하는 것은 예수생명을 죽이는 일이라고 하면서 자살이 엄청난 죄악임을 극명하게 드려내려 합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그 살인행위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보내지 말것을 당부하면서 자살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니 자살을 하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낭떨어지 끝 나무가지에 매달린 사람이 있다칩시다. 이 사람에게 손을 뻗어 주기만 하면 살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얼마동안 살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손을 뻗어주기만 하면 일단은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떨어지려는 이 사람을 보면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경만 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떨어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 당신은 그대로 죽어버리면 지옥갑니다. 그러니 지옥가기 싫으면 빨리 올라오세요" 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현실감 없는 가정법이였습니까?. 다시 예를 들어 봅니다. 너무 오래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놓고 오늘은 어떤 맛있는 것을 먹을까 내일은 어떤 옷을 사입을까 염려 하는데 내 눈앞에서는 굶어죽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을 보면서 이야기 합니다. " 어서 배불리 먹으시오. 어서 따뜻한 곳에 가서 쉬시요" 라고 하면서 먹을 것과 쓸것을 주지 아니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위선과 거짓이라는 것입니다.내 손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도 구하지 못하면서 영혼을 구하기 위해 구원의 진리를 외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가식적인 위선입니까?.

내 손과 입으로 살인을 하면서 그 손과 입으로 주님의 사랑을 외치는 가식이 너무 부끄럽다는 것입니다.상대적 빈곤을 조장한 죄는 누구의 탓일 까요? 나는 무관하다 할 수있을까요?.

자살하는 사람의 죄를 묻기 전에 먼저 내 죄를 스스로 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순간 세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그 덕분에 내가 호위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체 말입니다..

교회더러 사회 사업을 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악을 깨달아 보라는 것입니다. 연민이나 동정은 커녕 가슴아프다는 말 조차도 위선임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죄악의 실체를 깨우치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은혜외에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기자는 자꾸 하느님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촛점을 맞춥니다.동정과 연민에 빠져 구원의 진리를 혼탁케 하지 말라는 말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의 핵심은 한가지 입니다. 참된 연민과 동정은 실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실천한다고 해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윤리적이고 세상적으로 이롭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하더라고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초대교인들은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죄악의 참상을 깨우치기 위함이듯이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죄악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동정과 연민을 보내고 있다는 착각이 가식과 위선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죽어가는 자들을 본체만체 하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외치는 죄인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내 자신임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는 다른 존재이며, 그들을 훈계할 만한 행위가 올바른 줄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죄아래 매여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 때문에 오직 예수 그 은혜외에 무엇을 더 바라리요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남을 가리치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의 산고백을 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성경을 천년만년 읽어도 주님이 아니고는 배설물만도 못한 것입니다.성경은 이해 할수 없는 난해한 것이지만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쉽게 이해되어 지고 왜 쓰여 졌는지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참고로 덧붙친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져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데, 주변 환경까지 억압하고 짓누르고 고통을 배가 시키니 더욱 고통 스럽게 느껴져서 죽음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의지력으로 벌떡 일어설 수 있지만, 자살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져서 주변환경이 조금만 냉대하거나 힘들게 해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지요.그래서 누구보다 더욱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입력 : 2006년 12월 02일 13:40:59 / 수정 : 2006년 12월 02일 13:5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