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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비판 ...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4. 8. 7.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비판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목사  


잘못된 인식층의 연결

그는 교회 안에서만큼은 세상과의 다른 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실수이다.

이 세상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천국관을 사모하는 것이 인간 욕망의 한 면인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보다 더욱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천국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자신에게 있는지를 묻지 않았던 것이 더 큰 잘못이다.

선해 질려는 본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 났다.
수십 명을 죽은 살인마도, 횡단보도에서 빨간 불일때는 서서 기다리는 배려를 한다.

돈 문제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죽인 교수도 손톱을 깨끗이 단장할 줄 안다.
인간은 '자기 의(義)'가 없이는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 어떤 형식이라고 '자기 의'를 챙겨서 소지하고 다니고 싶어한다.

과연 그런 권리가 있느냐고 자기 자신에게 되묻지를 않는다. 단지 '자기 의'를 따로 소지하는 것이 왠지 즐겁고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나'다운 가치를 부여해줄 그 어떤 정당함으로 그 속을 채우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본성과 본능을 가지고 그대로 신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는데 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스스로 목회자라는 이름의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그 안에다, "올바른 천국 시민 만들기", 혹은 '올바른 천국 시민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소지"라는 내용으로 채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안에서 천국 시민인 자와 천국 시민이 아닌 자의 확연히 구분시킬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것을 위해 그는 먼저  

'행동이란 인간 됨에서 나온다'라는 발상을 한 것이다.

인간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천국 시민다운 행동은 먼저 자신이 천국 시민이라는 신분과 위상을 확고히 다지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도의 신분과 위상을 위해 복음을 사용하기로 한다. 즉 인간의 행동은 잠시 미루어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주어진 신분이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보았다.

이것은 간추려 보면 이렇다.

[도식 1]
하나님→인간(천국 시민으로서 미흡한 존재)→십자가→온전한 천국 시민→윤리와 도덕을 실현→하나님께 영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는 잠시 침투했다고 원죄만 사면해주고 곧장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과정에서 더 이상 십자가를 써먹을 데가 과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도식 2]
하나님→십자가(언약)→죄인→십자가 지신 분의 의→하나님께 영광.

이상 두 개의 도식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과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태초부터 개입되어 있는 분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개입되어 분이 따로 없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과 말씀으로 상대하셨다고 한다면,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해도 여전히 말씀에 순종과 불순종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율권과 자유권은 인간 고유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에 의미를 두고, 그 자유권을 온전한 윤리성으로 가능성을 발휘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태초부터 개입된 분(예수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의 자율권이나 윤리적 발휘를 위해(그렇게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게 되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섬기기 위해 피조된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각자의 인식의 틀에다 다른 쪽의 인식 틀을 마구 연결시킬 그 어떤 여지도 차단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성부께서 성자와의 협약하실 때 일단 태어난 인간이 행함이나 의견이나 인간들의 성실성이나 선행이나 이것의 기초가 되는 인간들의 가능성을 일체 집어넣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9:11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되어 있다.

즉 무엇이 죄냐 혹은 무엇이 의냐 하는 문제는 근원적으로 의의 말씀처럼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라는 하나님의 창조 취지가 담뿍 함유된 채 정리되어 할 문제이다.

인간의 윤리적. 혹은 도덕적 가능성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고 적용 되는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계획된 바 추진되어온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이 우주 피조물과 인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감히 인간의 자신의 윤리나 도덕성을 주창하면서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 하신 행위만 믿을 때, 그것이 곧 '믿음'이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의 과정에서 십자가 의의가 전 과정에 관여해야만 하고 인간을 그 취지로만 통제돠어야 하고 지배하는 원칙으로 고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무엇을 통제하고 지배해야 한단 말인가?

바로 '눈으로 보이는 거룩'을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어서, 인간의 가능성을 있는대로 끄집어 내보겠다는 불신앙적인 발상을 오로지 십자가로 폭파시켜 버리는 통제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버려야 된 세상의 모든 것' 속에는

"말씀의 성취(곧 하나님께 영광이란)는, 이미 태어나 존재하는 인간의 선행 혹은 악행에 의하여 결정 된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에 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십자가의 의의를 도중에 빼버린 조치를 한 것이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란 인간 행동을 추상으로 개념화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인간이 행동에 나서게 되면 그 현장에서 자기 행위를 추상화 시키기 된다.

즉 실제 일함 그 자체와는 별로로 자신의 행동을 모아서 끊임없이 이상적으로(즉 비실제적으로) 추상화된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즉 자기 행동을 자기가 만든 추상적 개념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아원에 돈을 기부하고 자원봉사자로서 장애아들의 빨래를 대신 해주면서,

"이것은 착한 일이야.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훌륭한 일이다. 이것이 불쌍한 이웃을 돕는 일이야.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삶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일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일, 즉 똥 묻은 기저귀를 빤 것은 그저 기저귀 하는 빤 것에 불과하지 그 기거귀를 아무리 분석해서 거기에서는 선함이란 추상화된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말이고 하니, "이것은 착한 일이다"라고 규정한 것은 눈처럼 하얗게 된 기저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빤 자기 자신의 인식에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개념이다.

성경적으로 봐서는, 기저귀를 빤 것이 단지 그 현장에 예수님에 의해서 보내져서 한 행위이기에 정작 의로움이나 선함이란, "예수님이 보내셔서 지금 내가 이 일을 했구나"라는 그 관계성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수시로 이 점을 망각하고, "기저귀를 빤 행위의 주체는 나 이니까 내가 착한 일을 했기에 나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자기 중심적 추상화를 구성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4:9-11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런데 이 '나' 중심의 추상화는 성도든 성도가 아니든 인간이라면 평생을 두고 안 나올 경우가 없을 정도로 모든 행위에 같이 동반해서 등장되는 인식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참된 성도라면

자원봉사하면서도, (또는 아니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오로지 왜 내가 죄인일 줄 밖에 없는가를 아는 인식면에서 속해 있어여 한다.  

이렇게 되면, 애초부터
  
[도식 1]은 잘못이고 [도식 2]가 되어야 정당하고 성경적으로 실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도식 1]를 고집하는가?

원인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언약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바로 연결되는 줄 알았다.

즉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인간이 언약을 지켜 완성시키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놓고서는 의도적으로 못 따먹게 하는 이유를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목사의 임무(소위 스스로 지도자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고)가 교인들에게 잔소리하는 자인 줄 알았다.

그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의 취지를 몰랐다.
"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4-28)

또한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과연 로이드 존스 목사가 심사숙고하며 수용했을까?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 일서 2:27)

로이드 존스 목사는 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할 생각을 못하고, 자신의 '목회자됨'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 확립에서 섞여넣어 버린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결정지을 기준에서 십자가만 남기지 않고 슬그머니 목사됨을 빼지 않고 어느새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그 원인은,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부응에 화답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목사라면 교인들 보기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마치 주기철 목사같이!

죄인 주제에 대단히 큰 착각을 한 것이다.

그는 사람마다 직업과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인생 경험도 다르고 성장 환경도 다 다르다. 윤리적, 도덕적 형식이나 범주가 차이가 난다는 점을 중요하기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도에게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는 정말로 죄인 맞군요"라는 인식뿐이다.

이 인식에서 누군가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금 끄집어 내고자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딴 동네인식과 연결 지은 결과이다.

예를 들면,

문구점→장난감

의류점→수영복

철물점→망치

농구→프리 드로우

축구→페널티 킥

라고 연결되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인간→가능성

죄인→십자가

가 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 않다.

인간→가능성→교회 목회 가능성→교회 유지 가능성→돈이 요구할 가능성→돈이 들어 올 수 있는 가능성(대신 복음 전하고 구제하고 선교할 테니 돈내세요!)→목사가 전문 직업인이 될 가능성→목사 생존 가능성→살고자 하는 자만 살고, 죽고자 하는 자만 죽을 가능성→확실한 반(反)복음성이다.

그러니까 '인간 가능적 성화론→이단의 전매 상품' 이다.


세번째로

로이든존스는, 거룩한 삶을 실제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래야 교인들의 영혼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세상이란 인간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을 관리하기 위한 우발적 상황이 덮쳐진다.

평소에 마음 같이 않고 참으로 난처하고 황당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허약함과 죄성이 드러나는 그런 순간 순간으로 점철된다는 점을 그는 모르고 있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인간의 마음을 장악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증거자로 남아야 될 자들이 목회자요 그리고 성도들이다.

목회자는 단지 말씀 사역자로 감지덕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