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모르는 자들
고무줄은 늘어난다. 길게 늘어뜨릴 수도 있다. 그 고무줄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았다고 보자. 고무줄을 길게 늘어뜨리면 마치 파리는 먼 세계, 즉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영적 세계나 복음의 세계나 천국에 진입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고무줄이 탄성의 한계에 도달하면 맹렬한 속도로 제 자리로 찾아든다. 역겨울 정도로 우둔하고 무의미한 타성에 젖은 짐승 같은 일상의 자리다. 고깃덩어리 하나가 굴러다니면서 세월 보내는 그런 자리다. 늘 자신의 지나온 육의 세월을 핥듯이 감상하며 입맛 다시는 자리다. “짐승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자리다.
교회에 복음을 전하다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매주 씨뿌리는 비유를 다시 보는 것 같다. 복음을 처음 들을 때는 감격하는 듯 하다가 타인이 자신의 가치를 안 알아주니 순식간에 원래 자리로 도피한다. 숨겨놓은 개집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목만 내놓고 짖는다. “왜 나를 건드려! 왕왕”
여전히 ‘나’가 살아있는 형국이다. 나의 체면을 챙겨주는 십자가도 십자가인가? 그렇다면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은 실제 예수님의 육체가 아니라 걸쳤던 누더기란 말인가? 도대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나?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는 어디서 흘러나온 피인가? 우리의 옛사람이 저주받아야 함을 선언하는 의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 피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다시 우리의 자존심을 챙겨줄 개집이 하나님의 저주의 폭격을 맞아 저주스러운 공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자아를 다시 집어넣고 보물로 삼다니!
교회 내에 복음 안다는 자들이 참 많다. 복음을 모르겠다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다. 하지만 막상 복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면 복음대신 욕설이 나온다. “왜 내 집안을 건드려”, “왜 내 신학을 건드려” “왜 내 교회를 건드려”
정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 맞나? 그동안 십자가를 거론해 왔던 것이 과시용이었나? 공개적으로 올라간 척하면서 만인을 속이다가 비밀리에 뒤로 얼른 내려와 버린 것이 아닐까? 나라는 가치가 없어진다는 상실감, 모든 나의 일생이 쓰레기 더미로 지금도 계속 쌓이고 있음이 들통 난 그 수치감, 이것들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내팽개친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십자가를 한 번 맛본(히 6:4) 그 고귀한 자아를 마음 중심에 모시고 평생 광내면서 섬기기로 작심한다. 그동안 십자가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한 것으로 십자가 올라간 걸로 떼운다. 이것이 소위 복음 안다는 주위의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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