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 대구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
[피로사회] 한병철 저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서울: 2016)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타자를 면역 방어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런 시대였다.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21세기의 사회를 제대로 진단할 수 없다. 이민자나 난민마저 위협적인 타인이 아니라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그는 ‘차이’일 뿐이다. 21세기는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자기스러워지고 싶은데서 오는 ‘긍정정의 과잉’이 탈이 된다.
면역적 사회에는 예상되는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먼저 받아들이는 수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교양 있게 호기심어린 눈으로 구경하듯이 이질적인에 대해서 약간의 불편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과다한 긍정성이 주는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같은 편이라는 점이 더 부담스러운 것이다. 가족끼리라도 어려울 때는 흡수하고 동화하는데 진력을 다한다. 똘똘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요한 시대에는 굳이 갈라질 이유가 없어서 힘들어지고 따라서 나누기 위한 핑계 찾기에 골몰한다.
이 시대 전의 사회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 1926 ~ 1984)는 ‘규율사회’라고 불렀다. 병원, 공장,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을 이 사회를 대표하는 모델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델집단 자리에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대형 쇼핑몰, 유전자 검사소 등이 주목을 받는다. 이는 사회가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이다. 그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고 경영한다. 규율사회는 “〜을 해서는 안 된다”로 통제되는 사회였다. 하지만 ‘성과 사회’는 “우리는 새로운 것을 해낼 수 있다”로 움직이는 사회다.
이렇게 해서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를 낳는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우울증이 전염병처럼 퍼지는 이유는,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주도적이 될 수 없는 것이 새로운 사회 규범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늘 ‘나다운 나가 되어야 돼’라고 하면서 자신을 재촉하다가 스스로 지쳐버리게 된다.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적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늘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분명 남으로부터 자유롭다가 자부하면서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성과 극대를 위한 자유로운 강제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다. 자기 착취, 이것이 피로 사회를 만든다.
이처럼 긍정성의 과잉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과다한 여유로움으로 인하여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에 쉽게 노출되고 수입으로 비롯된 것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고 이미 있는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예를 들면, 사색하고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달리기, 또는 뜀박질 같은 형식으로 걷기의 속도를 높일 뿐이다. 사유(여유 있는 생각)도 이제는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 전락되었다.
이처럼 성과사회는 필히 ‘피로’를 낳는다. “지쳤어. 그만 헤어져!” 요즈음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상대를 붙들고 관계를 지속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어느 것이 자기에게 덜 피곤한지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피로는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내다버려도 괜찮은지’에 대해 새로운 도피처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주기(週期)를 짧게 가져가는 것이다. 사업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취직을 하든, 모임에 가담을 하던 항시 탈퇴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순환구조를 짧게 가져가면서 회춘(回春)을 자주 경험해보는 것이다. 이런 무차별적으로 순환되는 피로- 회로 속에서 모두가 ‘하나임’이 확인되면 ‘모두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는 공동체 의식이 본인들이 위로가 될 것이고 고립 의식도 사라진다 고 저자는 조언한다. 즉 ‘나만의 피로’가 아니라 ‘우리 피로’라서 우애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나 피로한 상태이기에 그 어떤 지도층도 부러워하지 않는 그런 미래 사회를 예상할 수 있다하면서, 저자는 이것을 ‘무위(無爲)의 피로’라고 말한다. 즉 ‘성과사회의 피로’에서 ‘새로운 영감을 주는 피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피로에서 벗어날 구상은 이제 그만하자”는 것이다.
(평)
저자는 후기근대 자아의 문제를 ‘고립’으로 보고 있다. 탈진을 해도 혼자 할 때만 서러운 법이다. 종교가 이 시대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신성함이 종교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옴과 동시에 신성함의 근원을 파헤치는 작업을 통해서 바닥이 ‘벌거벗은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애초부터 신성함이란 없다 는 말이다. 그것은 현대에서 모든 역사는 탈-서사(徐事)화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 해줄 이야기가 붕괴 되었다는 뜻) 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저자는 새로운 집단이 ‘다 같이 피곤한 상태’임을 결과적으로 받아들여라 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열린사회’로 본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복음적 평)
이 사회에서 ‘남’이란 내가 원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좀비처럼 지평선 너머 꾸역꾸역 계속해서 나타나서 다가온다. 궁극성을 짊어지고 다가온다. 일종의 ‘굶주린 심판행위’다. 궁극성에 담긴 내용은, 우리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남을 내 쪽에서 먼저 죽여 없애든지 아니면 피하든지 해야 한다. 이로서 평소에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지 반복해서 폭로 당하게 된다.
이게 성도의 삶이다. 신앙생활이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며 왜 죄인인 이유를 지속적으로 찾게 되는 작업이다.
저자는 죽음에 직면한 개인의 반응에 살피면서도 왜 인간에게 보편적 죽음에 주어지는 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해답보다 해결책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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