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목사는 욥기의 예를들어 청부의 본을 삼고있다. 욥처럼 정직히고 순수하게 산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잇다. 과연 욥이 정직하고 순수한 자였을까?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공의로운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욥에게 고난을 허락 하셨을까?
욥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 죄도 없이 불행이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인생을 저주한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생각을 죄라고 여기시는 것이다. 엘리후는 말한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무슨 관계가 있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겟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겟느냐 네 의는 네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35-7]
욥의 세 친구들은 부가 하나님의 복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고서는 불행이 올 수없다고 주장하던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 나중에 경책을 받는다.
또한 욥도 하나님께 혼쭐이 난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던 것이 얼마나 추한 행동인지 백해 무익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욥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경고 이지만
그 뜻을 무시하고 그저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을 이용하여 부의 합리화에 사용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기복적 [십자가앞에 죽임을 당해보지 않은자들]]교인들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욥과 같은 자들이다. 즉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신앙인으로 자부하며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한다면 욥처럼 교만해 지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자아를 모두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철저히 부서져야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정직과 순전함이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 그 이상도 그이하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미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수가 없다는 것이다.[욥40-4]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임한자는 욥의 이전 생각 교만한 자의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잇는 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상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상태로는 교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이것이 욥기의 가르침이다. 즉 예전에 가졌던 부와 행복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만 참된 부를 누릴 수 있고 참된 주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욥기에서의 새로운 복은 바로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전보다 더 많은 복과 행복이 주어졌다는 것을 단순히 물질로 보아서는 안된다.[성경의 지향점이 예수님의 은혜뿐임을 안다면]
그런데 김동호 목사는 욥기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귀로만 들었던 상태에서 인간적인 선행에 치중했던 자 곧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던 자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이것은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즉 욥처럼 자신을 의로운 인간으로 생각하게끔 조장한다는 것이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한 것을 망각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의를 부여 하지 않는다. 아무리 선을 행해도 부끄럽게 하신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의가 나올 수없다고 자각하고 주앞에 엎드려지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부를 의로 규정한 것이 죄가 되듯이 욥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없다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예전 생할 즉 청부하다고 생각하고 의롭게 행동 했던 것 그 행위조차도 주님 앞에서는 죄악임을 깨닫느 것이 옳은 일이다. 나는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가 없다고 하는 교만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욥이 하나님을 볼 수잇단 말인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서 귀로만 듣고 책으로만 보고 하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그릇된 바리새인들의 행악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 욥기의 핵심내용인것을, 이것을 오도하여 욥의 교만과 바리새인의 행위를 본받으라고 말하니 그것은 분명 그릇된 성경 해석이 아닐수가 없다. 주님 안에서는 인간적인 행함이 불필요한 것이다.
다만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지 인간이 정해놓는 규칙과 규정 가이드라인 속에서 하는 선행이란 주님의 은혜를 가리고 모독하는 짓일 뿐이다. 부가 의라고 생각하던 욥의 친구와 자신의 선행을 의로 여기는 욥과 같은 자들에게 대갈 일성으로 벼락치는 소리로 다가 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은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욥과 그 친구들에게 올바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행위를 가지고 청부라고 여기는 것은 옳바른 해석이 아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이 본질인 것이다.십자가의 죽음만을 이야기 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 욥은 자신이 청부하다고 느꼈던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 자각하고 재와 티끌을 뿌리며 회개하며 남은생을 살아가는 자로 돌아선 자이다. 다시는 자신의 행위를 두고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 앞에 날마다 엎드려 지는자. 이런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청부한 욥마저 하나님께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데 욥보다 못난 인간들이야 말해 무엇하랴..참으로 죽지 않고는 살 수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기적중의 기적이 임하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는 좁고 협착한 길이 진리의 길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그 때문에 놀라운 은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지혜로는 결코 알 수없는 진리인 것이다..*****
욥이 부자 였을 때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다.철저히 가난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겼을 때에 영성을 회복한 것이다.김동호 목사는 거듭나지 아니한 때의 욥을 의인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욥을 자신의 자녀로 삼기위한 하나님의 직권적 선택의 예시를 보여 주고자 함인데 욥을 의인의 모델로 삼고잇다. 의인이라고 자만하고 사는 욥의 교만에 동조하는 것이다.자신의 행위로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김동호 목사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욥의 교훈은 이 세상에서는 청부한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요, 모든 포기 해야 하는 마음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주의 은혜는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김동호 목사의 청부론은 욥과 같은 교만한 부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데 좋은 변명거리가 되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김동호 / 모든 부자는 소유지향적인가, 또 모든 가난한 자는 존재지향적인가. 그렇지 않다. 두 부자가 있다. 소유지향적인 부자가 있고 존재지향적인 부자가 있다. 욥이 성경의 모델이다. 그는 소유가 무너졌을 때도 넘어지지 않았다. 소유한 사람, 부자였으나 영적인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 중에 얼마나 소유형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소유형인데 기회가 오지 않고 능력이 없어서 그냥 가난할 뿐이다. 정말 존재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 있으나, 솔직히 몇 안 된다.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다. 특별한 은사 가진 사람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처럼 얘기하면 세상이 다 무너진다. 가난한 사람은 다 의롭고 부자는 다 불의한가. 레위기 19장 15절을 참 좋아한다. 가난하다고 편들지 말라고 한다. 가난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편들지 마라. 옳고 그름은 옳고 그름으로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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