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
사람의 몸은 육이다. 육은 곧 세포요 세포는 본능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아무리 노력하고 수행해도 세포의 본능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여자를 보면 음욕을 품고 멋진것을 보면 탐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벗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선을 행하고 의를 추구하는 모습이 언듯 보기에는 굉장히 의로워 보이고 선해 보이지만, 그 밑바탕은 자기의 의가 생성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할 때에 그의 내면은 자부심이 생성된다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세포의 원초적 본능이다. 무슨일을 하던지 거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의미를 두지 않고는 못배기는 존재가 인간이다.[위대한 모습이 세포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요, 영원성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 수있는 심성이 있는 자라면 그는 곧 신과 같은 존재라 할 수있다.이것은 곧 음란물을 보고도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무감각해질 수잇다고 자부하는 것과 같다.
병역을 피하기 위해 눈이 안보인다고 거짓을 꾸미는 사람에게 음화를 벽에 걸고 보여주자 그 본능에 의해 몸의 중요 부분이 텐트가 쳐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신이 되고픈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어떻게 하던지 영원히 사는 비법을 찿아보려고 혼신의 힘을 쏟는 것이다. 10조개의 세포가 바라는 열망이요, 영원히 살지 않고는 안된다는 욕망이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수를 헤아릴 수없는 세포의 열망을 누가 잠재우랴? 그 본능에 의한 행동을 누가 막으랴?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 날 수잇을까?바울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영의 생각만 했을까? 인간이란 노력하면 할 수록 헤메이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갈 수록 자신의 죄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것을 느끼는 자다.바울이 십자가 앞에 쓰러지고 나서 극구 은혜만을 증거한 것은 자신의 육신은 죄밖에 나올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죄의 드러남 없이 회개나 굴복이란 없다.
영원히 살려는 세포의 본능과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욕망인가를 깨우치려는 십자가의 은혜와의 싸움이 곧 영적 전쟁인 것이다.두 손들게 하려는데 곧죽어도 나는 할 수잇다 나는 나의 힘으로 신이 될 수있다 라고 우기니 이열망을 누가 제어 할 수잇으랴?
인간이 어떤일을 하던지간에 그 행함과 함께 죄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노력을 위해 애쓰는 자들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때문에 자랑할것도 내세울것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모든 것이 죄로 다가 오게 만드시는 것이 은혜다. 이것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 죄를 범해야 하는 것이냐 ? 라는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질책한다..과연 은혜로 사는 것이 사실이냐? 라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잇는 것이로다[로마서7장21절] 이 사실을 깨달은 자라면 결코 자신의 행함으로 인해 주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선을 행하는 순간 자부심과 스스로의 자족 자만심이 생기는 것은 세상 그 어떤 의인도 느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자신의 그 오물같은 원초적 욕망이 죄악인지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은혜이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죄가 씯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매순간 느끼고 은혜만을 소망하는 자가 은혜를 느끼는 자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잇는것이 행함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런말을 하는 자는 은혜를 느끼는 자라 볼 수없다.
죄를 아는 자와 죄를 모르는 자 이둘중에 누가 더 크냐 라는 질문과 흡사한 것이다. 죄박에 나올것이 없어 애통해 하며 사는 자가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사는 자보다 잘났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죄를 알기에 죄를 더 범하는 것인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죄를 덜 범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은혜로 인해 숨을 쉬고 살아 간다면 그가 행위가 부족하여 사망에 떨어진들 관여할 바가 아니다. 영원히 살겠다는 본능이 왜 죄가 되었는가를 아는것 십자가의 은혜없이는 원초적 본능이 의로움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을 느끼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변화된 바울이 또다시 변화된 것이 아니다.다만 나날이 죄가 많아지는 자신을 느꼈을 뿐이다. 살면 살수록 죄가 많아지고 은혜는 커지는 것이 주님의 공로이다.
사람의 몸은 육이다. 육은 곧 세포요 세포는 본능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아무리 노력하고 수행해도 세포의 본능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여자를 보면 음욕을 품고 멋진것을 보면 탐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벗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선을 행하고 의를 추구하는 모습이 언듯 보기에는 굉장히 의로워 보이고 선해 보이지만, 그 밑바탕은 자기의 의가 생성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할 때에 그의 내면은 자부심이 생성된다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세포의 원초적 본능이다. 무슨일을 하던지 거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의미를 두지 않고는 못배기는 존재가 인간이다.[위대한 모습이 세포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요, 영원성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 수있는 심성이 있는 자라면 그는 곧 신과 같은 존재라 할 수있다.이것은 곧 음란물을 보고도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무감각해질 수잇다고 자부하는 것과 같다.
병역을 피하기 위해 눈이 안보인다고 거짓을 꾸미는 사람에게 음화를 벽에 걸고 보여주자 그 본능에 의해 몸의 중요 부분이 텐트가 쳐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신이 되고픈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어떻게 하던지 영원히 사는 비법을 찿아보려고 혼신의 힘을 쏟는 것이다. 10조개의 세포가 바라는 열망이요, 영원히 살지 않고는 안된다는 욕망이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수를 헤아릴 수없는 세포의 열망을 누가 잠재우랴? 그 본능에 의한 행동을 누가 막으랴?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 날 수잇을까?바울은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영의 생각만 했을까? 인간이란 노력하면 할 수록 헤메이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갈 수록 자신의 죄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것을 느끼는 자다.바울이 십자가 앞에 쓰러지고 나서 극구 은혜만을 증거한 것은 자신의 육신은 죄밖에 나올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죄의 드러남 없이 회개나 굴복이란 없다.
영원히 살려는 세포의 본능과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욕망인가를 깨우치려는 십자가의 은혜와의 싸움이 곧 영적 전쟁인 것이다.두 손들게 하려는데 곧죽어도 나는 할 수잇다 나는 나의 힘으로 신이 될 수있다 라고 우기니 이열망을 누가 제어 할 수잇으랴?
인간이 어떤일을 하던지간에 그 행함과 함께 죄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노력을 위해 애쓰는 자들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때문에 자랑할것도 내세울것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모든 것이 죄로 다가 오게 만드시는 것이 은혜다. 이것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 죄를 범해야 하는 것이냐 ? 라는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질책한다..과연 은혜로 사는 것이 사실이냐? 라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잇는 것이로다[로마서7장21절] 이 사실을 깨달은 자라면 결코 자신의 행함으로 인해 주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선을 행하는 순간 자부심과 스스로의 자족 자만심이 생기는 것은 세상 그 어떤 의인도 느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자신의 그 오물같은 원초적 욕망이 죄악인지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은혜이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죄가 씯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매순간 느끼고 은혜만을 소망하는 자가 은혜를 느끼는 자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잇는것이 행함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런말을 하는 자는 은혜를 느끼는 자라 볼 수없다.
죄를 아는 자와 죄를 모르는 자 이둘중에 누가 더 크냐 라는 질문과 흡사한 것이다. 죄박에 나올것이 없어 애통해 하며 사는 자가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사는 자보다 잘났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죄를 알기에 죄를 더 범하는 것인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죄를 덜 범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은혜로 인해 숨을 쉬고 살아 간다면 그가 행위가 부족하여 사망에 떨어진들 관여할 바가 아니다. 영원히 살겠다는 본능이 왜 죄가 되었는가를 아는것 십자가의 은혜없이는 원초적 본능이 의로움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을 느끼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변화된 바울이 또다시 변화된 것이 아니다.다만 나날이 죄가 많아지는 자신을 느꼈을 뿐이다. 살면 살수록 죄가 많아지고 은혜는 커지는 것이 주님의 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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