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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교회신앙

신앙은 극단적입니다..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4. 4. 7.

많은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상당히 보편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지녀야 하는 줄로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과 호응을 많이 얻는 것을 기독교의 믿음인줄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신앙은 이단이라고 무조건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적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것 같으나 기실은 신앙이 무엇인지 애초부터 알지 못한 자라고 볼 수있다.

성경은 말한다. 차갑지도 더웁지도 않은 믿음은 가증스런 것이라고...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은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메세지이다. 차가운 것을 누가 좋아하며 뜨거운 것을 누가 좋아할 손가?

차가운 복음 뜨거운 복음을 사람들은 거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아주 합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완급조절이 가능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 때문에 너무 극단적이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복음은 아예 거부부터 하는 것이다.그렇다 복음은 아무에게나 받아 들일 수있는 간편한 대용식이 아니다. 진정 복음이 없이는 살 수없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아주 차가운 것이던지 뜨거운 것이던지 둘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기분을 맟추면서 다가오거나 이해를 시키면서 다가오는 합리적인 복음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동반하며 다가오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요구를 하시면서 다가오신다. 그러나 욕심많은 인간은 코딱지 만한 행위로 자신을 행위를 정당화 하고 미화 시킨다.  이런 추접하고 추악하고 비열한 자신의 죄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극단적인 십자가의 요구를 하신다는 것이 귀에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에게 배워야 한다. 무엇을 배울까? 율법으로는 완벽하다고 자부하던 그 꺠끗한 행실을 배울까? 너무도 열심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을 배울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철저히 금식을 행하던 모습을 배울까? 이웃을 위해 열심히 선행을 하고 착하게 살려고 부단히 애쓰던 그 착한 행실을 배울까?

과연 바울은 교인들에게 자신을 보고 무엇을 본받으라고 한것일까? 바울은 말했다. 육신으로는 죄밖에 나올것이 없다고...그렇다면 육신이 아닌 마음을 배울까? 그런데 바울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고 배운단 말인가? 바울은 말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겠노라고..십자가의 복음외에는 모든것을 똥오줌으로 여기겠다고..

아니 그렇다면 바울이 아무렇게나 살겠다는 말을 한것일까? 아무렇게나 살아갈 바울에게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바울이 배우라고 한 것은 오직 하나 바울이 고백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인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오직 에수님의 은혜 그 하나만으로 숨을 쉬고 사는 자신의 인생처럼 될수있도록 배우라는 것이다..

결론은 바울처럼 되기위해서는 바울의 행위를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행위도 없이 사울이 바울이 변한 것처럼 아무행위도 없이 자신처럼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변할 수있다는 것을 배우라는 말이다. 한마디 은혜가 임해야 십자가의 본뜻을 알 수있는 것이지 아무리 훌륭한 행위를 하고 도덕을 지키고 교회법을 지키고 율법을 행해도 복음은 이해할 수없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가 된것이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깨닫고 배우라는 말을 하는 것이건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의 어떤 행위를 본받아야 한느 줄로 착각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손가?

이같은 성경의 본뜻을 모르고 어떤이는 조용기 목사의 기도를 배우라는 둥 설교에 반했다는 둥 본받을 만한 행실이 많단느 둥 조용기 목사는 하늘이 내려주신 특별난 사람이라고 말하느 둥 괴상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면 누구라도 차별없이 바울도 되고 베드로도 되고 조용기목사나 김동호목사나 그 어떤 목사와 다를바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을 때까지 젖먹이로 살다가 가려고 하는 철없는 신앙으로 연명하려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니 바울이 수많은 젖먹이 교인들을 질책하며 답답해 하던 그 심정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신이 하나님이 세운 특별난 목사인줄 착각하고 사는 목사들이 대부분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멸시를 가했으니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보다 믿는 자들 때문에 그 고초가 심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던 수많은 교인들에게 혼쭐이 나고 자신의 사도직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수없이 역설해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참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극단적인 신앙자로 치부되어 멸시받고 조롱을 받는다. 만약 그같은 고초를 겪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신앙이 거짓일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차가웁던지 뜨거웁던지 하는 복음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미지근함 속에서 좋은게 좋은거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가를 부르며 대충 살다가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복음이 다가오면 그것을 물리칠 방법은 오직 하나 그것을 거짓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의 이익을 우선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모든 재산을 바치고 나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살면서도 아무 양심의 가책없이 믿음을 자랑하고 천국에 간다고 자부하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없도다..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이  내가 비웃는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추접하고 부끄럽고 가증스런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자가 바울이다. 그 때문에 자신이 알고 배운 모든 것을 똥오줌으로 여기게 된것이다. 오직 은혜 로 인해 숨쉬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다가 떠난 자가 바울이다. 이런 바울에게 배울것은 오직 하나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뿐이다. 우리들 또한 바울의 심정이 되지 못한다면 모두가 지옥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