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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희 인생칼럼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

by 골동품나라 밴드 리더 2004. 12. 24.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

바쁘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는 돌덩어리처럼 , 오직 일등을 위해 치달리는 백미터 달리기 선수들처럼, 사자에게 쫓겨 달아나는 한마리 사슴처럼, 솔개를 발견하고 도망치는 새앙쥐처럼, 바쁘다. 잠시 숨돌릴 여유도 없이 바쁘다. 왜 바쁘냐고 묻는다면 바쁘니까 바쁘다 라고 대답할 뿐이다.그런 질문을 하는 인생이 얄미워 보일 보일 정도로 바쁘다.

공부를 위해서라도 바쁘다.사업을 위해서라도 바쁘다. 운동을 위해서라도 바쁘다.종교생활을 위해서라도 바쁘다. 바쁘지 않게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한심해 보일정도로 바쁘다. 느림의 미학은 몰라도 빠름의 미학은 안다. 정신없이 뛰어 내달리는 무리들을 쫓아 달린다. 이유없는 미학..

너무도 바쁘게 살아온 탓에 나밖에 몰랐다. 오솔길에 아지랭이가 솜사탕처럼 피어오르는 의미를, 마을 뒷산 찔레밭에서 게슴츠레 눈을 감고 졸음을 즐기던 인형같던 산토끼의 한가로로운 표정의 의미를,맑은 시냇물이 흐르던 개울가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려 한가로이 휘파람을 불던 물총새의 의미를, 봄바람에 실려와 넙죽넙죽 인사하듯이 날아가는 후두티새가 전해주는 소리의 의미를 몰랐다.

바람이 분다. 파아란 논들녁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잡초가 풍겨주는 내음이 바람속에 뭍혀 코속으로 들어오고 그 향기에 취해 어린날을 회상해보게 해주던 바람과 풀내음의 의미를 바쁨이라는 것에 의해 모두 망각해 버렸다. 바람의 의미를 전해주던 들녁도 모두 사라지고, 바람에 실려 종알종알 재잘되던 시냇물의 소리도 사라지고, 뒷산에 산토끼도 산과 솔개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풀내움과 함께 다가온 바람은 내게 " 너는 누구지?" 라고 질문을 해왔었다. 바람에 실려 떠내려 가던 개울물은 내게" 너는 왜 살지?" 라고 물어 보았었다.잠시 스쳐지나가는 소리였기에 그땐 몰랐지만, 깨끗하고 맑은 자연은 언제나 내게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소리를 전해 주었었다. 그 자연과 다르게 살아가는 욕망의 실체를 일깨워주는 것은 자연밖에 없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그들을 모두 쫓아 버렸다.

뒷산과 새들과 시냇물이 떠난 자리에는 아파트와 자동차 빌딩 네온싸인 술냄새가 풍겨져오는 조형물들이 "빨리 빨리 " 를 외칠 뿐이다. 생명이 없는 무형물로 가득찬 도시는 삶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물어오지 않는다.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 속에서 아우성치는 미꾸리의 절규소리는 내 심장을 뛰게 만들지만 사방팔방으로 가득메운 아파트와 빌딩들은 심장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아파트에 가로막혀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바람에 실려 조잘조잘대던 시냇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물총새의 멋진 사냥솜씨를 구경하며 미소짓던 얼굴도 사라지고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는 토끼를 침을 흘리며 노려보던 황조롱이의 눈매도 사라졌다.

생명없는 메케한 매연만이 바람에 실려 폐속으로 들어가고 삶의 의미도 어린시절의 추억도 매연속에 혼합됨으로써 오염된 마음으로 변질 시킨다. 남은 것은 바쁜 일상사뿐... 생명없는 나란 존재만이 사막속에서 신기루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친다.살아 숨쉬던 바람이 전해주던 가슴쓰리던 이야기가 사라지고, 욕망으로 점철된 생명없는 바람만이 이유없이 빠르게 치달리는 자동차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을 쫒아 정신없이 내달리는 사람들의 생명없는 아우성만이 무의미한 시간을 만들어낼 뿐이였다.그리고 정말이지 아무일도 없었다.